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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멍 난 복음 vs 온전한 복음 (눅 16:19-31)

첨부 1


구멍 난 복음 vs 온전한 복음 (눅 16:19-31)


부자의 변명 ‘하지만’

지금 World Vision의 회장으로 있는 리처드 스턴스가 쓴 [구멍 난 복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흥미로워 책을 주문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읽은 책 중에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리처드 스턴스는 소위 잘 나가는 성공한 기업인이었습니다. 레녹스라는 고급 주방기기를 생산하는 회사의 회장으로 경건한 크리스천 가정의 헌신적인 사역, 그리고 축복으로 주신 큰 집과 좋은 차, 순종적이며 착한 자녀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그런 삶 말입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던 그의 삶에 갑자기 월드비전의 회장을 찾는 헤드헌터에게서 전화가 온 것입니다. 자신이 돕는 단체, 그리고 늘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다는 자신에게 회장이 될 수 없느냐고.
“저요? 아닙니다. 저는 자격도 안 되고, 관심도 없고, 게다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기도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제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많은 경우에 기도해 보겠다는 것은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피하고 싶은 순간이 많지요.
그렇게 막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상대방은 전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열어 놓고 계십니까?”

사실 저는 요즘 크리스천에게서 참 묘한 현상을 봅니다. “기도해 보겠습니다!”라는 말이 대개 하나님의 뜻을 좇는 쪽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쪽으로 응답이 온다는 것입니다.

순복음 교회 이영훈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조용기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순종했답니다. 특히 목회지를 옮기는 문제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7번씩이나 예기치 않게 짐을 싸야 했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하나님께 책임적 삶을 사는 것은 언제나 ‘겸손’과 ‘섬김’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부목사들에게 새로운 임지나 선교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아주 지혜롭게 대답을 한답니다. “기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는 답은 “기도해 보니 하나님의 응답이 없네요!”라는 대답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늘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사명 앞에서 토를 답니다. “하지만….”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런 고백이 리처드 스턴스에게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끔찍한 질문을 하다니.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하다니! 얼마나 대답하기 거북한 질문이었던지. 그 질문에 나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한참 침묵이 흘렀던 것 같다.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글쎄요. 그래요.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열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데 내 대답을 생각해 보니 ‘하지만’이 아주 많았다.”

* 하지만 난 자격이 없어요. 제가 이 자리를 맡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에요.

* 하지만 나는 전 세계의 빈곤이나, 구호나 개발이나 기금 모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요. 정말 큰 실수하시는 거라고요. 그리고 더 이기적인 ‘하지만’들도 있었다.

* 하지만 나는 회사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20년이 넘게 일해 왔어요. 나에게 그 모든 걸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없어요. 그건 경력 면에서 자살 행위라고요.

* 하지만 난 레녹스의 최고 경영자 자리가 좋아요. 조금만 있으면 돈을 많이 벌게 될 겁니다. 몇 년 만 더 일하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만큼 돈을 벌게 될 거예요.

* 하지만 우리는 6천 평의 대지에 침실이 열 개 있는 200년 된 농장에서 살아요. 우리가 몇 년 동안 기다려서 산 꿈의 집이에요. 그걸 팔라는 건 지나친 요구예요.

* 하지만 새로 산 회사 차는 어떻게 해요? 감청색 재규어 X K-8이라고요. 돌려줘야 한단 말이에요.

* 하지만 난 아이가 다섯이에요. 다들 학교도 잘 다니고 있고 친구들도 좋아해요. 그런데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반대쪽으로 이사를 하라고요? 그리고 월드비전 월급으로 아이들 대학까지 어떻게 다 보내요? 그나저나 봉급은 얼마나 돼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성경 어디에도 부자가 죄를 지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부자이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누린 것입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영어 성경에서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
“expensively dressed in the latest fashions, wasting his days in conspicuous consumption”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경계를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

어쩌면 우리 크리스천 중의 깨끗하게 번 돈으로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그런데 성경은 자신의 것을 누리는 것이 축복이라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함께 하지 않는 축복은 축복이 아니지요. 바로 그 부자의 대문 앞에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앉아 있는 한, 부자의 누림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복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시각을 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믿고 행하는 복음이 온전한 복음이냐? 아니면 구멍 난 복음이냐? 에 대한 물음을 가지게 하지요.


구멍 난 복음

[구멍난 복음]의 저자 리처드 스턴스에게는 신학교를 다니던 짐 월리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트리니티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급생들과 함께 한 가지 실험을 했답니다. 성경 66권을 모두 살펴보면서 가난, 부, 정의, 억압을 다루는 대목과 구절마다 밑줄을 치고, 동료 중의 하나는 가위를 가지고 와서 그 구절을 모두 잘라 냈답니다.

그 결과 너덜너덜해진 채로 간신히 붙어 있는 책이 남았습니다. ‘가난과 정의’에 대한 2천여 개의 구절을 다 잘라내고 나니 성경이 구멍 난 채로 너덜너덜해진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도전합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온전한가 아니면 구멍 난 복음을 가지고 있는가?”

온전한 복음을 이루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오래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온전한 복음을 이룬다는 것은 매 순간 예수님의 생각을 묻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복음에 구멍이 난 것은 매 순간 예수님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취사선택하고 가져와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이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면서 갈림길이 나오면 “동전을 던져” 길을 선택하는 것이죠. 무조건 앞면이 나오면 직진이고 뒷면이 나오면 좌우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동전이 나오는 대로 따르다 보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예측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을 지시하시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흥미진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surprise’ 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면?”이라는 물음은 때로 우리의 계산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단지 기분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순종하며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내 삶을 드렸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에 헌신합니다. 물질도 사용합니다. 교사로, 성가대로, 때로는 차량을 안내하고 예배시간에 안내자로, 호스피스로, 자원봉사자로, 중보기도자로 시간을 드립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이 온전히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구멍 난 복음을 온전하게 메워 나가기 위해 우리의 삶에서 좀 더 다른, 심각한 삶의 요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계속해서 우리가 “하지만….”이라고 변명하는 순간 복음에 구멍이 뚫립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며 나아가면 구멍 난 복음을 채워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응답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입니까?

김남준 목사가 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책에 나오는 한상동 목사님에 관한 글입니다.
작고하신 교계의 지도자 가운데 한상동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한 교회를 목회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시며 교계에 영향력을 끼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일찍이 신학교 예과에 입학하셨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신학교 교과목을 따라서 영어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성경 신학 과목이라면 설교라도 은혜스럽게 한 편 작성하고라도 시험장을 나오겠는데, 시험이 외국어였으니 성령 충만한 한상동 전도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답니다.
시험지를 앞에 놓고 한숨을 쉬며 “주여!”를 연발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시험 답안지가 자꾸만 한상동 전도사 쪽으로 밀려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동료 급우의 처지를 못다 못한 학생이 자기의 영어 답안을 보도록 그의 옆으로 밀어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한상동 전도사는 그 자리에서 시험지를 덮어 놓고 교실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주님, 제가 평소에 살아온 삶이 어떤 것이었길래 나를 가장 잘 아는 급우가 자기의 시험지를 보여 주면 제가 보고 쓸 것으로 생각하였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살고서도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영어 답안지를 보여 준 그 전도사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 그날 정직한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영어 답안을 백지로 제출하고 나간 그 학생이 후일 그 신학교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에 구멍이 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추상적인 답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답해야 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이상향이 아닌 부패한 세상이기도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도 하나님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가진 ‘부’가 믿음으로 반응하는데 장애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부자는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의 삶의 기득권이 달린 문제 앞에서 그것이 믿음으로 반응하기에는 걸림돌이 되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1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거지를 보았고, 아브라함을 알아보았고, 자신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형제들을 염려하는 것을 봅니다.
28절의 말씀을 보세요.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문제는 그가 알고 있었지만, 아는 대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부패한 세상 속에서. . .

우리는 부패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많은 데모가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이 시대를 한탄하며 술을 먹었습니다. 운동권에 있든지, 현실을 외면하고 공부를 하든지, 퇴폐 문화에 빠지든지.
왜냐하면,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명한 목회자 워렌 위어스비는 [Strategy of Satan 그리스도의 강한 용사]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백성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이 부패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며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여러분! 야곱이 받은 복을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보아도 그는 복을 받을, 조상의 복을 상속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진정한 복이란 자신이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믿음도 인격도 함량 미달입니다.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간사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복은 계속되었습니다.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야곱이 점점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 받을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패함과 부족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A. W. Tozer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어떤 존재로 변화하기 위한 장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부패한 세상 속에 계시며, 그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

코리텐 붐이라는 아주 유명한 신앙의 인물이 있습니다. 독일 나치 시대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오랜 기간 엄청난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가운데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삶을 간증한 몇 권의 책이 지금 베스트셀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악몽 같은 세월을 겪은 뒤 35년간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는 한 번도 편안한 안식처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85세가 되었을 때 친구들이 그를 위해 캘리포니아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집 한 채를 마련해줍니다. 그때 친구가 그에게 말합니다.
“코리 너에게 이런 아름다운 처소를 주신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정말 선하신 분인가 봐.”

그때 코리 여사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내가 라벤스부르크에 있을 때도 역시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었어.”

그렇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부패한 세상, 불공정한 일 가운데서도 역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드러낸다면 이 세상은 점점 변해가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리처드 포스터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조용한 기도실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한 자매님이 거기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 자매님이 너무나 화가 나 분을 참지 못하여 때맞춰 들어온 목사님께 이렇게 항의하듯 말하더랍니다.
“리처드 목사님. 제 기도가 도무지 이 천장을 뚫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답답했던 것입니다. 리처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헬렌 당신의 기도가 이 천장을 안 뚫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기에 계시니까요.”

부패한 세상 속에서 우리 믿음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어떤 믿음과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말입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 아주 좁은 길에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이 피해주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제 한 친구가 길을 딱 가로막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악당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라고 모욕을 줍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길을 비켜주면서 말합니다.
“나는 악당을 만나면 그냥 조용히 길을 비켜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누가 복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둘째, 부패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증거 한다는 것

로마서 10장 14~15절을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지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부자와 나사로가 죽었을 때 둘의 모습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거지는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지옥의 뜨거운 불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때 부자가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자신은 죽어서 어쩔 수 없지만 자기 자식을 위해 거지 나사로를 보내 복음을 전해 달라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6장 27-31절을 보세요.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아시니라.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주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죽어서 살아온 자가 말을 해도 듣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패한 세상 속에서 아니 뭔가 불공정한 세상 속에서 복음이 작동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곳저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행동으로 전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리처드 스턴스가 월드비전의 회장으로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만난 오우르능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국민의 90% 이상이 불교도인 나라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행동으로 나타난 온전한 복음의 능력을 확증해 주었다고 합니다.
“5년 전 월드비전이 우리 마을에 와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리 마을에 온 외부인들이 의심스러웠고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크메르루즈의 인종 학살 이후 외부인들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월드비전에서 나온 사람들은 결핵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살피기 위해 보건소를 세웠습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좋게 만들고, 농부들에게 더 나은 농업 기술을 가르쳐 수확량을 늘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제 의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화까지 났습니다.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낯선 사람들이 왜 우리를 돕는 걸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들에게 직접 따져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월드비전 책임자에게 가서 여기 온 이유를 밝히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굽니까?”
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생님이 지금 보시는 이 성경책을 저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한 모든 것이 이 책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집으로 돌아와 창세기를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제가 평생 궁금하게 여기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나를 사로잡았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계기를 준 사람은 가난한 자들을 섬기러 온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 알고 나서 너무 신이 났지요. 그래서 이 좋은 소식을 제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든세 명은 제 작은 양무리입니다."

구멍 난 복음이 부패하고, 뭔가 부족한 세상에서 온전하게 채워질 수 있습니다. 뭔가 모자란 것을 채우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채우는 것은 복음을 사는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복음을 마음에 간직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들의 엄청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가 많았습니다.
늘 성전이 있었고 율법이 있었고,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복음대로 행하는 자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단지 성령의 능력을 받고 끝까지 기다렸던 120명의 제자를 통해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이후에 나오는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했습니까? 하루에 3천 명이 회개를 하고 또 하루에 5천 명이 예수를 믿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8만 명쯤 되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당시 사람을 계수할 때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했다면 약 8천 명의 가장이 예수를 믿는 사건이 며칠 사이에 일어난 것입니다. 적게 잡아도 예루살렘 인구의 50% 정도가 예수를 믿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죽임을 당했고, 박해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감동을 했지만, 그들의 삶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옛날로 돌아갔던 것이지요.

복음을 듣고 복음을 살지 않으면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와서 말합니다.
“분명히 낫이 있는데 안 빌려주던데요?”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그 이웃집에서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냥 낫을 빌려주라고 이릅니다. 아들이 화가 났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며칠 전 일을 생각해 보세요. 빌려주지 마세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릅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도 빌려줄 수 없다면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우리에게 낫을 빌려주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저 집에 낫을 빌려준다고 말하면서 빌려준다면 그것은 증오다. 거절당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상대가 그저 낫이 필요하니까 빌려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그것이 긍휼이다.”

마태복음 9장 1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이 있어야 기도의 응답이 있고, 하나님의 일상적 삶의 은총도 있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본문을 보세요. 부자의 집 앞에서 죽어가는 나사로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고 계셨고, 주변의 사람들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를 둘로 나누실 때, 우리가 어떤 존재였느냐를 가지고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일을 했느냐를 가지고 나누실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너희가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집 문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집 문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십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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