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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 (요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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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비유의 의미(요 15:1-8)

가을이 점점 깊어 갑니다. 벌써 안뜰에 벼 베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올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풍성한 가을에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에도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14-16장은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기 전까지 긴 시간 동안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이 다락방강화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 거의 다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 성령께서 오실 것과 제자들이 핍박을 받지만 승리할 것 등, 앞으로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중요한 가르침이 다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농부와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의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원’ 또한 ‘포도나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7절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라고 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2:21절에서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는 호 10:1절에서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시 80:8절에서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다”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이처럼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이요, 표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포도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하셨으나 포도나무였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4절에서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됨인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했고, 호세아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가리켜 “헛된 포도나무”라고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타락해 버린 이스라엘의 상태를 대조시켜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합니다. 여기 “참”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만 포도나무지 포도나무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기적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예수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것이 곧 믿음의 삶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있을 곳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서는 결코 살 수 없듯이, 성도가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결정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거하라”는 말이 11번이나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져 마르나니”라고 했습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했습니다. 

“거하라”는 말은 “머물라”는 뜻으로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떠나지 말고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생명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16절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님 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은혜의 자리, 구원의 자리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 맡은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의식에 참여하거나 구제와 봉사에 힘쓰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자,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정말 끊임없는 교제를 이루며,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제일 무서운 죄는 주 안에 거하지 않는 것, 주님을 떠나 사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사는 것이 죄입니다. 주님 붙들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주님 떠나서 내가 주인 되어 사는 것이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했습니다.

포도농사를 지으면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연약한 가지나 불필요한 가지는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팔레스틴의 더운 날씨와 뜨거운 바람은 잘려진 가지들을 바짝 마르게 합니다. 그러한 가지들은 불에 살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떠난 자의 삶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마지막에는 뜨거운 지옥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마 3: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희한한 전도지를 만나는 사람마다 돌리고 다녔습니다. 이 전도지를 주면서 집사님은 “그 뒷면을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별 내용이 씌어 있지 않고 “아무 것도 없다.”라는 큰 글씨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옥을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결단이 없으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오는 시간이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지옥은 저절로 가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관심 속에서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잠재의식 안에서 지옥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떠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 깊은 곳에서 어쩌면 내가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공포가 그 영혼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누가 감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것은 거기에 가야할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지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것은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 남아 있는 지옥의 공포는 그 영혼을 붙들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는 불에 사라지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 천국을 생명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포도나무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있습니다. 

겔 15:3-4절에 보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포도나무는 오로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만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겠는가?”하는 말입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재목으로서는 아무 쓸데가 없는 나무입니다. 포도나무는 꽃이 피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꽃은 아주 볼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연료로 쓸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금방 타 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을 때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 당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 그들은 이미 이 땅위에 있어야 할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고를 보십시오. 눅 3:7절 이하에 보시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도끼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더 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데도 쓸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를 잃고 있었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선언하셨다면,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열매 없는 삶을 어떻게 보실까요? 

바꿔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면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면 누가 좋아할까요? 열매를 많이 맺은 포도나무는 주인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더욱더 놀라운 건 예수님의 제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풍성한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과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약속된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로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십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제거를 당하게 되고, 뜨거운 불에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들은 지옥불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 물과 양분을 얻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시골의 한 마을이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은 모두 말랐고 논바닥은 쩍쩍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들은 여전히 잎이 푸르고 싱싱하지만 시냇가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말라 죽은 것입니다. 산꼭대기의 나무들은 평소 수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분을 얻기 위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가뭄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보였습니다. 수분이 충분한 시냇가의 나무들은 땅의 겉 표면에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꼭 예수님께 붙어 있어 예수님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아 왕성한 생명을 유지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가을에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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