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창립] 다윗의 헤브론 입성 (삼하 2:1-11)

첨부 1


다윗의 헤브론 입성 (삼하 2:1-11)
  
온누리교회 창립 28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합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오해나 고민이 없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교회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로 불렸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Church’가 아니라 ‘Community’번역 했습니다. 교회가 제도나 조직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공동체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의 정신 중 하나인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한다’는 주장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되지 않으면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개혁해야합니까. 제도나 조직을 개혁해야 합니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에클레시아’로서 개혁하는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스스로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에클레시아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공동체로 부르셨는지,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를 알고 순종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부르심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제도, 조직, 건물만 남은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온누리교회가 창립 28주년을 맞이하면서 에클레시아로써 사명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합니다. 우리가 선택해서 온누리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으로써 떼래야 뗄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성령공동체, 선교공동체, 예배공동체로써 사명을 감당해야합니다.

  
다윗을 훈련시키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에클레시아의 원형입니다. 교회의 원형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형성된 민족을 하나님이 에클레시아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에클레시아로 부른 것입니다.
  
에클레시아의 지도자가 될 다윗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마음과 태도,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소년일 때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곧장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준비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다윗으로부터 우리는 참된 에클레시아의 마음과 지도자들의 생각이 어때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도 분명 죄와 허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죄도 범했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이 나타났습니다.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
  
다윗이 왕으로 선택 받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이유는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섬기며 고난을 받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에 대해서 온유하고 인내하며 그를 품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했던 모습은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했던 예수님의 인격을 보여줍니다.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왕이 됩니다. 온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왕이 된 것은 아니지만 한 지파의 왕이 됩니다. 이 때부터 다윗에게 놀라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광야에서 도망다니 던 다윗이 권세를 가진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열두지파가운데 가장 힘이 강력한 유다 지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과정에서 하나님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의 왕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니까. 다윗은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헤브론의 왕이 되기 직전 다윗의 태도를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참된 에클레시아로써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어야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며 음성 듣는 다윗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사울은 치명상을 입고 스스로 자살을 하고 맙니다. 요나단도 전투에서 죽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완전히 정복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에 엄청난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는 다윗에게 있어서 절호의 기회입니다.
  
시글락에 머물던 다윗과 그 일행들이 사울이 다스리던 수도를 점령하면 이스라엘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 역사로 보면 다윗이 진군해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고 해도 다윗을 비난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블레셋을 잘 아는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국가에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눈앞에 이익이 될 만한 상황이 펼쳐지면 조급하고 초조하게 뛰어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이 중요한 요소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에는 가장 마지막에 확인해야할 요소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상황으로 보면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다윗은 상황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영성을 보여주는 기도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제가 유다의 성읍으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올라가라.’ 다윗이 다시 여쭈었습니다. ‘어디로 올라가야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헤브론으로 가라’(1절).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윗이 주도적으로 왕이 되기 위한 어떤 정치적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왕이라는 위치를 목표로 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위치를 향해서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분명 주도적으로 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유다의 성읍을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유다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동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소망감과 사명감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운데 자신이 안전하게 블레셋 진영에 있으면 안 된다는 자각과 깨달음이 생긴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적절한 판단과 결정을 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그의 영성을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위치보다 중요한 사명
  
하나님이 다윗에게 유다의 성읍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헤브론은 고산지대입니다. 해발 1300미터 이상입니다. 사해를 기준으로 하면 훨씬 높을 것입니다. 헤브론은 높은 고지였고, 기골이 장대한 거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정탐꾼들이 두려워 떨었던 산지입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 때에 그 굴에 사라가 묻혔습니다. 헤브론은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로 볼 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간 것입니다. 왕이 되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헤브론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다윗은 어떤 위치에 오르기 위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동행했을 뿐이고,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명감 때문에 헤브론에 간 것입니다.
  
여러분, 에클레시아로써 쓰임 받는 사람들은 위치가 먼저가 아니라 사명이 먼저입니다.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에클레시아가 아닙니다.
  
사명을 따라 움직이고, 소명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언젠가 하나님이 자리를 만들어주십니다. 위치도 세워주십니다. 위치보다 중요한 것은 사명입니다.
  
참된 교회는 위치나 자리가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위치나 자리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에도 조직이 필요하고 제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부르셨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사명과 소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다윗처럼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필요한 자리를 주시고, 필요 없으면 하나님이 가져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사명과 소명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수의 사람을 구별
  
“당신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또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의를 빛나게 하시고 당신의 의를 한낮처럼 밝히실 것입니다.
  
여호와 안에서 잠잠히 그분을 참고 기다리십시오. 일이 잘돼 가는 사람들, 곧 악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화를 그치고 분노를 참아 내십시오.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악으로 치달을 뿐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여호와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 땅을 유산으로 얻을 것입니다”(시 37:5~9).
  
여호와께 맡기고, 신뢰하고, 그분을 참고, 기다리고, 바라는 사람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체험한 진리입니다. 다윗이 우리에게 이러한 권면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1년 이상 광야에서 도망자 생활을 했고, 헤브론에서 한 부족의 왕이 되었지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거기서 7년 반이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먼저 유다 지파 한 족속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소수의 사람을 먼저 구별하셔서 참된 에클레시아가 되게 하시고, 그 다음사람도 에클레시아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땅의 모든 족속을 구별하셨고, 온누리교회를 부르셔서 온 열방을 에클레시아로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유다 지파의 힘이 강력했기 때문에 다윗을 왕으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겉으로 볼 때 국가가 분열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온 지파가 하나 되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분열되어 있더라도 한 지파라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행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한 지파라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연합과 일치가 우상이 되면 안 됩니다.
  
도둑들도 하나 되면 도둑질 잘합니다. 좋지 않은 일도 하나가 되면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하나가 되었는지 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영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다윗으로 하여금 유다 지파 한 족속의 왕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을 먼저 구별하셔서 참된 에클레시아가 되게 하시고 그 다음사람도 에클레시아가 되게 하십니다.

  
에클레시아로 변화시키려는 목적
  
하나님은 다윗 한사람을 통해 400명, 600명을 구별하시고 유다 지파를 구별하시고 난 다음 전 지파를 구별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온 민족을 구별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땅의 모든 족속을 구별하셨습니다. 온누리교회를 부르셔서 온누리교회만을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열방을 에클레시아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방을 향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된 에클레시아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부르심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가 강력한 것은 유다 지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를 통해 다른 지파에도 영향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CGNTV의 역할도 같습니다. CGNTV가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CGNTV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연합해서 해야지 한 교회가 방송국을 운영 하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CGNTV는 온누리교회만을 위한 방송국이 아닙니다.
  
처음 CGNTV를 시작하려고 할 때 교회연합으로 하려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모임에 참여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정치적인 문제와 내부의 어려움 때문에 큰 실망을 하셨습니다.
  
‘순수한 방송으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나님의 방법대로, 원리대로 지켜낼 수 없을까?’,‘계속해서 순수성을 이어가고, 확산시킬 수 있을까?’, ‘참된 에클레시아의 방송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CGNTV가 시작되었고, 확대 되었습니다. 이제는 CGNTV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숙적들을 축복하는 다윗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한 일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고 시체가 버려졌다는 것을 듣고 어려움 속에도 사울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성껏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암몬 족속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때 사울이 그들을 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사울에게 능력이 있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일종의 사울파 사람들입니다. 사울의 지지세력 집합지입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사울의 집권세력입니다. 사울이 광란의 질주를 해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무조건 사울편이었습니다. 그런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울의 죽음 이후에도 그를 애도하고, 기념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다윗은 길르앗 사람들을 칭찬하고 축복하고 보상을 하고 도와줍니다. 

다윗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치 역사에서 끊지 못하는 사슬, 대적관계에 있었던 숙적들을 진심으로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자기편을 만들기 위한 제스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설사 정치적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다윗의 행동은 훌륭합니다.

  
참된 에클레시아 지도자
  
다윗은 사울을 진심으로 애도했습니다. 사울의 잘못된 것을 하나도 열거하지 않고 그를 칭찬하는 것으로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사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기가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던 아멜렉 소년을 죽이면서 진노했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보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행한 것을 보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인내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를 인내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다윗은 앞서가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앞서가지 않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처럼 자신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축복했습니다. 이것은 온 이스라엘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게 다윗은 참된 에클레시아 지도자로 세워져 갔습니다.
  
다윗의 헤브론 입성은 그의 정치적 노력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로부터 선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때를 의식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끌어가는 에클레시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에클레시아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다윗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우리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재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