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문제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행 6:1-7)

첨부 1


문제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행 6:1-7)

제목을 듣는 순간, 우리 교회 문제 있나? 이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을까요? 모든 교회가 그렇듯이 우리 교회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잘못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조금만 문제를 만나면 문제가 없는 교회를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하루는 무디 목사님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문제없는 교회를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 제가 그 동안 교회를 옮긴 것이 벌써 세 번째인데 지금 교회도 문제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랬더니 무디 목사님이 말합니다.

“제가 문제없는 교회를 한 군데 알기는 아는데 당신에게 추천할 수는 없겠습니다.”

“아니, 왜요?”

“제가 당신을 그 교회에 소개해 주는 그날부터 그 교회는 문제가 생길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문제없는 교회, 문제없는 가정,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문제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에 대해 웨인 코데이로는 “태도를 바꾸면 성공이 보인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당신 가족의 상태가 어떤지, 당신에게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족, 문제, 상사, 그리도 돈에 대한 당신의 태도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처음부터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한 번에 3000명이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수적인 성장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쓴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전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고난과 역경이 와도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고, 오히려 전도할 때 오는 능욕을 기쁨으로 감당한 위대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루살렘 교회에도 문제는 있었다고 본문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6장 1절 보세요.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소외’라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소외당한 거예요.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성령충만한 교회에서도 소외라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 7절은 예루살렘교회가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는 위대한 교회로 성장해 나갔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루살렘교회가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교회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 우리의 가정, 아니 우리의 일터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Ⅰ.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요?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많은 가정사들을 상담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집안이 잘 되고 어떤 집안이 안 되는지 알게 되는 거예요. 잘 되는 집안과 안 되는 집안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안 되는 집안은 사소한 문제를 큰 문제로 비화시켜서 결국 서로 큰 상처를 남깁니다.

하지만 잘 되는 집안은 문제를 만나면 서로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 나가려고 지혜를 모읍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혜를 모으지 않는 것일까요?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은 리더십의 바이블이 된 책 ‘리더십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 해결 방법은 반드시 존재한다.”

너무나 당연한 원리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일어날 때 늘 놓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일어나면 그냥 손을 놓는 거예요. 그냥 피합니다. 일을 중단해요. 하지만 예루살렘교회는 그렇게 문제를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구제에 문제가 생겼지만 구제를 중단하거나 문제를 그냥 내어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왜요?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앞부분 보세요.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자, 사도들은 문제를 듣는 순간 모든 제자를 불렀고 제자들은 모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을 가진 것입니다.

본문 1절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누구를 원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습니다. 왜요? 당시에는 타국에서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서 계속해서 살아온 히브리파 유대인들 있었거든요. 그런데 헬라파 과부들이 늘 구제에 빠지는 거예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빠졌습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히브리파 사람들이 사도들과 짝짝궁이 되어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것이 틀림이 없어. 하루 이틀이면 실수라고 할 수가 있지만 어떻게 매일 그럴 수가 있어!’ 헬라파 과부들에게 바로 그 원망이 생겼습니다. 원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해결하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망이란 늘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그 사람에게 반드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서로 상처를 받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오해가 있거든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헬라파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에 순종하여 히브리파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문제를 만날 때마다 반드시 답이 있다는 것을 믿고, 함께 만나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요?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점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두 교회로 갈라졌습니다. 왜 갈라졌는가 했더니 잘 성장하다가 교회를 리모델링하면서 갈라진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강대상의 휘장을 빨간색으로 하자고 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무슨 말이냐 파란색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빨간 색으로 하자는 사람들은 빨간색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기 때문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했고 파란 색으로 하자는 사람들은 파란 색은 푸른 초장을 상징하기 때문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이 사람들은 보혈파와 푸른 초장파로 나뉘어서 끝까지 싸우다 결국 갈라 섰다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문제로 인한 갈등은 본질적인 문제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비본질적이 문제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사도들은 제자들과 함께 모여 비본질적인 문제로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히브리파 사람들이 사과했다. 사도들이 헬라파 사람들을 달랬다. 뭐 이런 말도 없습니다. 본문 2절 보세요.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어떻게 접근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헬라파 과부들의 구제가 매일 빠지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해야 할 고유한 일을 제쳐 놓고 접대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사도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그것이 문제 해결의 본질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에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아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점점 많아지니까 제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사도들 본연의 사역인 말씀묵상과 기도시간도 가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계속 빠진 거예요. 참 지혜롭지 않습니까?

대개 교회가 왜 싸우고 분쟁에 휘말리게 됩니까?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의 본질을 나두고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크게 실망을 하는 거예요. 사소한 문제로 티격태격하다가 나중에는 깍두기는 간곳없고 감정싸움이 되는 거예요.

교회만 그렇습니까? 부부간의 싸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가정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다운 가정이 될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갈등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감정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질로 돌아가서 원점에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본질적인 대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3-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표면적인 구제의 문제가 아닌 본질적인 해결책을 바라보았습니다. 문제를 크게 비화시켜 마치 예루살렘 교회에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떠벌이지 않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없는 교회, 문제없는 가정,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표면적인 문제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목표를 바라보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가정, 아니 우리의 교회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성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Ⅲ. 마지막으로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5-6절 보세요.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자, 최초로 세워진 일곱 집사들의 이름을 보세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교회 일꾼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 헬라식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헬라파 사람들만 뽑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파 사람 중에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요? 아니요. 왜 없었겠습니까?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는 부흥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현장에는 헬라파 사람들 뿐만 아니라 히브리파 사람들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히브리파 사람들 중에도 믿음과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들은 다 히브리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일곱 집사를 어디서 뽑았습니까? 주로 헬라파 사람들에게서 뽑았습니다.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람을 집어넣으려고 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약해 있었던 헬라파 사람들 중에서만 뽑은 것입니다.

왜요?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됨’이기 때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사실 자연적인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생기고 원망이 생긴 것입니다. 왜 우리도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로 좋아하는 찬양도 다르지 않습니까? 모임에서 나눌 때 관심도 다르고 표현하는 법도 다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불편을 느끼고 모임을 갖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그들과 하나 되기 위해서 양보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주신 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양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양보했습니다. 성경은 헬라파 사람들만으로 집사들이 뽑혔을 때 온 무리가 기쁨으로 그들을 뽑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위대합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의 일곱집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들을 세운 위대한 사람들, 자신의 입지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은 진정 위대한 무명의 그리스도들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다투지 않고 약한 공동체가 일어설 수 있도록, 소외 받지 않도록 양보한 참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늘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영혼 구원하여 제자삼아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교회의 꿈이자, 바로 우리교회의 꿈입니다. 이 꿈을 위해서, 저와 함께 문제의 언덕을 넘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 함께 만들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존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미국 대통령에게 닥쳤던 문제가 결코 쉬운 문제만은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이 쉬운 문제였다면 다른 누군가가 이미 해결했을 것입니다.”(존맥스웰의 리더십의 법칙)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은 모든 인생, 모든 가정,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도전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가정, 그리고 교회에 찾아오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반드시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답이 없는 문제는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현실일 뿐 그것은 이미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문제가 찾아올 때마다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반드시 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표면적인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소명과 비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양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교회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도행전적 교회,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인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