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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에 나선 선교사 (사도행전 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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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나선 선교사(사도행전 8:26~40)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없음)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오늘은 사도행전 강해 서른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말씀에서 우 리는 광야에 나선 선교사 빌립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일곱 집사의 한 사람으로 평신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사도가 아닙니다. 요샛말로 전문적인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는 평신도로서 교회에서 구제와 봉사를 맡아해야 하는 직책에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런 일보다는 지난 시간에 공부했듯이,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전하는 일에 우선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풉니다. 이것은 단 한 사람을 향한 전도이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내시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지금 다시 고국인 에디오피아로 돌아가고 있는 사람으로 상당한 권력을 가진, 권세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 선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빌립은 이름 자체에서 풍기듯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 이름 자체가 헬라적입니다. 물론 유대사람이기는 하나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방 땅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예루살렘에 와 있습니다. 그렇게 미루어보아야 합니다. 때문에 빌립은 히브리 종교에 대하여 능통합니다. 히브리의 종교예식과 모든 규례를 다 갖추어 행할 줄 압니다.

 그런가하면 빌립의 철학과 언어와 문화는 헬라에 속합니다. 태어나기를 헬라문화권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그래서 빌립은 헬라어에 도 능통합니다. 당시의 국제언어는 헬라어입니다. 요즘의 국제어가 영어이듯이 말입니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영어만 하면 그런 대로 말이 통합니다. 그래서 영어가 편리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헬라어가 지성적인 언어요 철학적인 언어였습니다. 말하자면 국제적인 언어였다는 것이지요. 헬라어만 할 수 있으면 어느 나라에 가든지 말이 통합니다. 큰 도시에서나 지성인 앞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점에서 선교하기가 유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헬라철학에 능통하고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입니다. 선교사로서의 더할 나위 없는 배경과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빌립도 그렇습니다. 그는 선교하기에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하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에디오피아 사람에게도 언어의 장애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은 cross-culture, 다시 말해서 타문화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핍박 속에 있을 때에는 선교하는 데에 평신도가 유리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공산국가에 선교를 할 경우 성직자는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평신도는 장사하러 들어가기도 하고, 기술자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로써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도 선교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중국에는 아직도 선교사란 이름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는 가능합니다. 평신도 가운데 사업하러 들어가서 선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영어선생님으로 들어가서 전도하기도 합니다. 요새는 중국도 영어를 많이 배우니까요. 혹은 컴퓨터선생님으로, 혹은 의사로 들어가 정착해서는 그들과 만나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평신도가 유리합니다. 이렇듯 사도라고 하는 특별한 직분으로는 선교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평신도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이 평신도 선교사는 매우 중요한 신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효과적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프리카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인종으로 말하면 흑인입니다. 황인이 흑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순간입니다. 벌써 이 때 흑인에게까지, 아프리카사람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생각 할 것은 하나님의 선교전략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전략이 본문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진 것을 봅시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을 핍박을 통해서 사마리아로 쫓아내시어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만드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피난민들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전략입니다.

 에디오피아사람이 순례차 예루살렘에 오게 됩니다. 순례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 사람을 붙들고 빌립이 선교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여행자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됩니다. 비록 내가 아프리카까지 가지는 못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프리카사람이 여기에 왔다고 합시다. 이제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가 예수를 믿게 되면 내가 아프리카까지 안가도 그 자체로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 믿어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 자라던 고향 소래라고 하는 곳에 송천교회가 있었습니다. '소래'나 '송천'이나 같은 소리입니다. 소나무송(松)자에 내천(川)자거든요. 솔내, 그것을 소래라고 발음하는 것입니다.

'석교'를 '돌다리'라고 하는 식입니다. 어쨌든 그 교회는 어느 선교사가 설립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관련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갔다가 선교사를 만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직접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교회입니다. 선교사보다 먼저 세운 교회입니다. 이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람이 외국에 가서 여행 중 복음을 받아 가지고 고국에 돌아옴으로 선교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선교전략입니다.

 우리 나라에 여행 오는 많은 사람들, 어떤 이유에서든지 특별히 잘 대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한사람 한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함으로 이루어지는 선교의 역사를 생각할 것입니다. 특히 요즘은 우리 나라에 유학 온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학생을 받아들일 필요도 있어요. 예수 안 믿는 나라 사람들 가운데 똑똑한 청년 몇 데려다가 장학금 주고 공부시키면서 교회에 다니게 하고 예수 믿게 만들면 내버려둬도 그 사람들 돌아가서 저절로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참으로 효과적입니다. 우리가 직접 가서 서툰 말로 전도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언젠가 러시아의 그리스정교 교회 주교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잠시 우리 교회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3부 예배에 나왔던 분들은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시커먼 예복을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아주 잘생긴 양반입니다. 그분은 영국에서 공부한 분으로 신교라고는 영국 교회만을 보았을 뿐으로, 러시아의 기독교인 그리스정교밖에는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영국교회라는 것이 열심이 없거든요. 큰 교회에 몇 사람 안 모입니다. 그분이 한국에 왔을 때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우리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통은 어느 누가 오더라도 인사를 시키는 일이 없는데 멀리 러시아에서 온 분이기에 여러분 앞에 모셔서 인사를 시켰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닿아 제가 모스크바에 가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국교회 선전을 입이 마르게 해왔더군요. "한국교회만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분은 러시아 그리스정교의 신학담당 주교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책임을 가진 분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침이 마르게 한국교회를 선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살아 있는 참 교회를 보려면 한국에 가야 합니다"라고 말이지요. 딱 한번 와서 보고 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 분이 왔을 때에 우리가 잘 대접해야 합니다. 어쨌든 그분을 만나서 다시 우리 교회를 방문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승낙했는데 워낙에 바쁜 분이라 아직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행자들이 선교사가 됩니다. 여행하는 중에 복음을 받아 가지고 고국에 돌아가서 선교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행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에게 잘 대접해서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중국에 있는 교포들이 많이 와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잘 대접해줌으로 그들 하나 하나가 예수를 믿고 중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봅시다. 저 만주대륙은 잠깐 사이에 기독교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이러저러한 일로 그들을 가정부로 데리고 있는 집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돈벌려고 몇 달 동안 와 있을 때에 선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잘 믿는 가정에 들어가서 일함으로 더불어 예수 믿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선교하고 싶다면 일부러 라도 그들을 가정부로 하나 데려오세요. 일을 시키고 싶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그 한 사람이 똑바로 예수를 믿고 성경을 배우고 만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중국에 가서 선교한다고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가 가서 하는 말 한마디가 훨씬 효과적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가정에 혹 가정부 를 쓴다면 다른 사람을 쓰지 말고 중국교포를 쓸 것입니다. 선교적인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에게 잘하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새벽기도까지 함께 나와 드릴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단단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 돌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이로써 엄청난 선교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괜히 선교비 써가면서 선교사 하나 보내봤자 별다른 선교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국교포들 가운데는 중국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말 중국말을 다 할 줄 압니다. 그러니 중국사람 11억을 상대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선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높은 차원의 선교전략을 빌립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벌써 이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행자에게 전도하라, 여행자를 믿게 하라, 여행자를 붙들어라. 그러면 그를 통하여 선교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서 효과적인 전도자가 될 것이다-----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전략입니다. 아주 효과적입니다. 지금도 이것은 최고의 선교전략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여행자는 여행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Open mind person입니다. 폐쇄적인 사람은 문 밖에도 안나갑니다. 아주 보수적인 사람은 여행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좀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세계를 향하여, 넓은 세상을 향하여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 믿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적어도 고국을 떠나서, 고향을 떠나서 낯선 곳에 와서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을 가능성이 99퍼센트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수적인 세계관에, 혹은 고정관념에 매여 있는 사람하고는 벌써 질적으로 다릅니다.

 간혹 우리는 이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집을 옮겨서 이사할 때에 새로 이사온 그 사람을 붙들고 전도해보십시오. 전도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납니다. 왜요? 이사할 때에는 사람의 마음도 함께 좀 변하거든요. 평소 티격태격하는 부부라도 새 집에 이사오면 '이제부터는 좀 새롭게 살아보자' 하는 마음이 생기거든요. 그런 마음이 좀 있을 때에 '제대로 살려면 예수 믿으세요' 하고 전도해보세요. 그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이 삐거덕하고 좀 열릴 때에 '행복하게 살려면 예수 믿으세요'하고 전도해야지, 마음이 잔뜩 닫혀 있는 데에 대고 '주 예수를 믿으라' 해봐요. 당연히 어렵지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여행자의 마음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행자의 마음은 open mind입니다.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행자에게 전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본문말씀에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선교전략이 나타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고관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마는 권세 있는 자가 하는 역할이 선교적 차원에서는 더욱 큽니다.

회사로 말하면 직원 하나가 예수 믿는 것과 사장이 예수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중역이나 이사 몇 사람이 예수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군대로 말하면 장교가 예수 믿는 것과 사병이 예수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선교 전략적 차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이 예수 믿으면 그 군목사업 전체가 원활하지만 사단장이 예수를 안 믿으면 군목은 반 정도의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교 전략적으로 볼 때에는 언제나 귀족이 중요하고, 지방 유지가 중요하고, 고관이 중요하고, 부자가 중요합니다. 상위권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권위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권력자를 예수 믿게 해야 합니다.

 요즘도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가보면 소위 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추장이 있는데 그 추장 하나만 예수 믿으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부족이 다 모여 예수 믿고 세례 받게 됩니다.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아무리 밑에 있는 사람이 믿어 보아야 소용없습니다. 추장이 믿기 전에는 절대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집단적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고관이 예수 믿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고관 하 나가 예수 믿고 돌아갔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로써 선교 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로마감옥에 가두시어 그 시위대 사람들 을 예수 믿게 하신 것도 당신의 선교전략이었습니다. 이로써 고관들 이 먼저 예수를 믿게 되어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이 불과 9퍼센트밖에 안되던 로마제국을 마침내는 기독교 국가로 선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고관들이 예수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교의 주도자는 과연 누구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대로 성령이 그 주도자입니다. 보십시오. 성령께서 빌립에게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26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광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에 빌립이 광야로 갑니다. 다시 성령께서 말씀합니다.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29절)." 다음으로 "병거에 올라타라" "이 사람에게 전도하라" "세례를 주라" 하고 거듭 명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신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강권적으로 붙드시어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완전히 고용하시어 선교 사역에 쓰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선교사가 아닙니다. 참선교사는 오직 성령뿐입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거기에 고용되어 있을 뿐입니다. 쓰임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의 자격이나, 그 사람의 실력이나, 그 사람의 지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사람을 쓰시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온전히 주도하십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동시에 그 주도하시는 성령의 역사 앞에 빌립은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광야로 가라 하니 광야로 갑니다. 병거 하나가 지나갑니다. 병거에 탄 사람에게 가까이 가라 하니 가까이 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병거에 탄 사람은 에디오피아의 왕족입니다. 중요한 인물입니다. 요새로 치자면 재무 장관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한 사람만이 병거에 달랑 올라 광야를 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무리가 70명은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광야를 지날 수 없습니다. 강도도 많고 맹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의 고관이 여행하는데 적어도 70명 정도는 동원이 되었겠지요. 그런데 지금 빌립이라고 하는 이 촌사람이 감히 그 병거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하고 간첩으로 오인되어 죽기가 십상입니다.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라 하니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올라타라 하니 올라탑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도 성령께서 주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보십시오. 빌립이 만나 에디오피아 내시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낯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에게 가까이 가라 하십니다. 그래서 가까이 간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적으로 또한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선교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데에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교회에 와서 앉을 때에도 가까운 사람끼리 앉거나 친한 사람끼리 앉는 것보다는 가능하면 낯선 사람하고 앉으라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하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마친 다음에는 인사도 하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매주일 한 사람씩만 사귄다 해도 그것이 얼마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친한 사람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돌아갑니다. 선교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찾아서 만나는 정도의 순종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stranger를 만난다는 것을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요 모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성령께서 만남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책임지고 있는 내시와 만나게 하셨습니다. 내시라고 하니까 혹 거세당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궁정관리인으로 지칭된 사람을 내시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궁정재정을 맡아보는 아주 중요한 직책에 있는 권력자입니다. 재무장관격입니다. 그런 그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전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 에디오피아는 원래 그 인종이 흑인입니다. 왕족은 솔로몬 의 후예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있을 때에 시바의 여왕이 찾아왔다가 경배를 하고 돌아가서 솔로몬의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후예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디오피아 왕족은 솔로몬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 종교를 믿고, 히브리 문화를 향유하는 것을 그들은 특권으로 삼고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병거에 올라탄 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그는 왕의 전적인 신임을 받는 귀중한 인물입니다. 바로 그 한 사람에게 빌립이 전도함으로 결국은 그가 예수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교회사에 나오는 대로 그 내시가 에디오피아에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지금도 에디오피아에 그 때 세운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에디오피아에 오늘까지 2천 년 동안 교회가 있어온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의 마음을 연 것도 성령께서 하신 일이요, 전도하게 한 것도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말씀에 대한 이해입니다.

빌립이 병거에 가까이 가보니 에디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 먼저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읽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내시는 뜻도 모르는 채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뜻을 몰라도 읽어야 합니다. 다 알고 읽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읽다보면 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언젠가는 깨달을 날이 올 터이니 자꾸 읽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신학자들의 말대로 성경이 내게 직접 말씀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내게 말씀해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꾸준히, 자꾸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성경을 읽고 있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다가가 "읽는 것 을 깨닫느뇨"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가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지도하는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간혹 보면 성경책 하나 들고 산에 올라가서 수년동안 그것만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성경책만 읽습니다. 그리고 내려와서는 "내가 메시야다" 합니다. 실제로 제가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 혼자서 성경책 보는 것도 좋습니다마는 위험합니다. 가르침을 받고 읽고, 읽고 가르침을 받고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지도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겸손하게 지도하는 자의 가르침을 받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서 읽고, 나 혼자서 내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태도입니다. 때문에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 성경에 대하여 읽는 것과 더불어 가르침을 받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는 비록 낯선 사람이지만 성경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올라앉으세요" 하고 성경을 배우려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기독교인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도대체 기독교인이란 누구입니까?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성경을 달달 왼다 해도 기독교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를 보십시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32절)"라는 말씀을 다 읽고 나자 내시가 빌립에게 '제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간 철학을 배우는 것도 아니요, 소위 life principle--생의 원리를 공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덕률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격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든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신약성경을 보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야 합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예수님과 나와의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때부터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알아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도 알고, 나도 알 때에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오늘의 본문에 인용된 이 이사야 53장의 예언서를 아주 읽기 싫어한다고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하는 말씀 가운데 '저가'가 '예수'인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이사야 53장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예 귀를 막고 눈을 감을 정도로 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솔로몬 긴스버그라고 하는 브라질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유대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유대 랍비입니다. 폴란드에서 랍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엔가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에 이사야 53장을 읽다가 "여기서 말씀하는 '저가'의 '저'가 누구입니까?" 하고 아버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답은 안 하고 그의 손에서 성경책을 빼앗아들고 뺨을 때렸습니다. 왜 맞는지도 모른 채 그는 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그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그를 통하여 비로소 '저가'의 '저'는 '예수'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저가'의 '저'가 '예수'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저가'의 '저'가 '예수'라는 것을 알고 다시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그는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말씀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고, 마침내는 브라질 선교사로까지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릇 예수 믿는 사람은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personal savior-개인적 구주'로 고백하게 될 때에 비로소 교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누누이 가르쳐주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때에 거기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 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말씀을 통하여, 빌립의 가르침 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난 내시가 뭐라고 말합니까?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36절)." 이제는 충분합니다. 그래서 당장 세례를 받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선교전략을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간단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교전략과 예수 믿는다는 것의 의미와 바른 신앙의 의미를 전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광야로 나간 선교사 빌립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 모두 내가 오 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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