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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사도행전 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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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의 본문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제 만국 땅끝까지 전해지기 위하여 이방으로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유대땅을 떠나서 이방으로 전해진다고 하는 사건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모릅니다. 이것을 우리는 타문화권 선교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Cross culture mission이라고 합니다. 문화를 초월해서, 넘어서 다른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니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한 번만 이렇게 넘어서기 시작하면 타문화권으로 넘어서는 이 원리에 따라 마침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타문화권적 선교의 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문화에 집착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기문화권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잘 길들여졌기 때문에 스스로는 얼마나 자기문화 속에 깊이 침륜, 투옥되어 있는지를 모르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 점입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까요? 여러분, 제발 부부싸움은 하지 마세요. 우리 민족이 지금 남한 북한 합쳐야 칠 천만 됩니다.

중국은 11억입니다. 그런데 11억 인구가 전부 부엌에서 일하는 것은 남자입니다. 그것이 불편하지 않아요.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압니다. 남자들이 모여 앉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먹을까 하고 음식 얘기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시장을 일부러 가봤습니다. 시장도 남자가 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택도 없다고 해요.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당연히 여자가 해야지 무슨 소리냐 합니다. 시장도 여자가 보고 음식도 여자가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지만 이는 그실 우리 남성들이 멍청해서 그래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문화일 뿐입니다. 내가 지금 자기문화 속에 갇혀 있으면서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우주적인 진리인 줄 착각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문화일 뿐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신앙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그리고 동시에 이 두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교되느냐,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말씀 속에 저러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아주 깊고 높은 차원에서 주고 있습니다. 자, 복음이 일단 타 문화권, 이방에로 전해지기 위하여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준비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충만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맥락을 보면 1장, 2장, 3장에 충만했지 않습니까? 그리 고 이 충만은 감정적인 요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인 요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에 나타납니다. 가슴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충만하고, 죄 사함 받은 감격으로 충만하고, 주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충만하여 마침내는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게 되는, 내 것을 남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복음으로 충만합니다.

이러고야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적인 헌신입니다. total commitment입니다. 집도 중요하지 않고, 직장도 중요하지 않고, 가정도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제일 중요해요. 그래서 저들은 집을 떠나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생을 무릅쓰고 전하고, 생명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안일한 생활에 집착하고, 고향에 집착하고, 자기문화에 집착하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선교적 역사를 위해서는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거룩한 사역에 자기를 전적으로 헌신하는 역사가 이루어 져야 됩니다. 그것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문화적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민족주의, 협소한 민족주의적인 우월감도 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제일 잘났다, 우리 문화가 제일이다, 우리 풍속이 제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선교하는 사람은 피선교지의 문화를 존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 도 더러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선교사라고 우리 한국에 와서 이십 년 삼십 년 복음을 전하면서도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못합니까? 한국말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마는 한국에서 한 30년 선교사일 하고 은퇴해서 미국에 가 있는 사람의 집을 한번 방문해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집이 온통 한국 물건으로 꽉 찼어요. 몇백 년된 뒤주, 갓, 담뱃대 등속을 잔뜩 갖다 걸어놨어요. 마치 골동품점 같았어요.

"왜 이러고 삽니까?" 물었더니 "저는 이것들이 좋아요" 합니다. 그 사람이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는 자기 문화도 소중히 여기지만 자기 가 선교하는 나라의 문화, 그 나라의 풍속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문화에 익숙해지고, 그 언어를 배울 수 있고, 선교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는 말을 합디다. 그 나라의 문화를 좋아하면 그 나라 말을 배우게 됩니다. 그 나라의 것들을 존중하게 될 때에 비로소 복음의 문은 열리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문화, 자기풍속, 자기경험 에 대한 고집을 버려야 됩니다. 절대적인 복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말고, 상대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상대화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은 절대화하고 문화는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지름길입니다. 고정관념, 편견을 다 버리는, 말하자면 개혁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일이 그리 만만치 않아요. 어려운 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의지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도행전을 봅시다.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충만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방에 복음을 전해야 될 줄 알았어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저들은 복음 전할 생각을 안 했어요. 그대로 예루살렘에 집착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해서 저들 을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강권으로 핍박을 통해서 내모셨습니다. 이제 저들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다가는 죽게 되었으니 피난을 간다고 갔는데 그게 바로 선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하나님께서 핍박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사람들을 이방 땅으로 내모셨어요. 바로 이런 와중에서 저들은 편견을 버리게 됩니다. 하는 수 없게 됐지요. 이방 땅에 갔으니 이제 싫어도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가야 되고 이방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저들을 만나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을 통해서 역사 하셨습니다.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만나서 이야기해보는 가운데서 저들이 자기네와 다름없이 복음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봤더니 저들도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더라, 이방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서 복음을 못들을 줄 알았는데, 사람 취급도 안 했는데, 이제 보니 저들도 우리와 다름없이 성령을 받더라,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세례를 안줄 수 있느냐-----그래서 세례 주었다고 합니다. 자기네의 규례를 어기고 세례를 주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사건을 통해서 이방사람 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오히려 유대사람들보다 더 쉽게, 더 빨리, 더 활짝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건을 만나면서 저들은 감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있구나, 이방에도 이루어지고 있구나 하는 경험을 하면서 선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확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경험도 있었고 열의도 있었습니다.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이 신학화 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적으로, 혹은 계시 속에서 이 사건이 확증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지금은 될 수 있지만 내일은 무너집니다.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합리적으로, 또 자기의 확실한 신앙 속에서 잘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신학화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확증해주십니다. 이렇게 체계화된 신앙이라야만 뒤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구약에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스라엘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 요나서나 룻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요나서, 룻기를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니느웨 성에 전해지는 이야기, 복음이 이방여자 룻을 통하여 전해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이방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라 하신 말씀이 구약에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선지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방사람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을 누누 이 강조하고 있는데도 편견 심한 이스라엘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했어요.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이스라엘만이 선민이다 하는 고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약에 들어와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려고 할 때에 문화적 편견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고넬료가 예수 믿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10장 전 장에 걸쳐서 고넬료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지 않았습니까?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 하나가 예수믿음으로 말미암아 문화권적으로는 복음이 로마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고넬료가 가이사랴에 와서 살지만 엄연한 로마사람이자 군인입니다. 로마귀족입니다. 그런고로 이 사람 하나가 예수 믿게 되고, 이제 공부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로마를 위한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 하나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온 집안이 구원받는다는 것, 여기에는 엄청난 선교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건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 봅시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신비로운 체험으로 역사 하시는 것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데려 오라 했고, 오늘의 본문을 보면 베드로에게는 고넬료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가자고 하 거든 가라 합니다. 쌍방에 함께 계시해주셨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한쪽만 가지고는 안돼요. 다시 한번 사도행전 9장으로 돌아가 보면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그가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다메섹에 들어가라,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너를 인도해줄 것이다 하시고, 또 아나니아에게는 지금 사울이라는 사람이 여기 와 있다, 가서 만나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양쪽에 다 계시해주셨어요. 그럼으로써 그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본문에도 고넬료와 베드로의 쌍방에게 다 말씀하십니다. 그 같은 쌍방 계시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역사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읽은 것은 베드로에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했다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웅성거릴 때에도 지붕에만 올라가면 조용합니다. 그래서 지붕이 여러 모로 쓰이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기도처로 쓰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경건하게 살아가는 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규례를 따라서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하고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머물고 생각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는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의 본래적인 전통적 문화적 편견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피장인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름이 시몬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은 히브리사람입니다. 히브리사람이지만 이방 땅에 살면서 이미 이방문화에 젖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시몬이지만 생활은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의 직업도 좋은 직업이 아니었어요. 피장이었어요. 피장은 피혁업자입니다. 요새처럼 공장에서 손 하나 안대고 만드는 그런 피혁 업이 아닙니다. 제 손으로 가죽을 이겨서 그릇도 만들고 기구도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동물의 시체를 만지는 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벗겨서 피를 씻어내고 이기고 해서 그릇도 만들고 기구를 만들어요. 그러므로 피장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로 볼 때에는 천민 직업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 동안 부정합니다. 민수기 19장 11절에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동물의 시체라도 만졌다 하면 일주일 동안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죽은 동물의 가죽을 만지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은 그실 이스라엘 사람다운 직업을 가진 것이 아니지요. 벌써 이방인화한 사람입니다 돈벌기 쉬우니 여기에 와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먼저 예수를 믿었어요.

베드로가 이 집에 가서 머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본래적인 규례로 치면 이런 천민의 집에 가서 머문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다만 그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집에 가서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는 신앙적으로 이미 이스라엘의 편견과 문화적 고집을 극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방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 사람 집에 들어갈 만큼 의 용기와 자신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오늘의 본문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한번 유대사람들의 식사문화를 좀 생각해봅시다. 본문에 보니 하늘로부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에 갖가지 짐승이 있었고, 하늘에서 오는 음성이 잡아먹어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속되고 깨끗치 아니한 물건을 먹은 적이 없다며 못 먹겠다고 대답합니다. 왜 이런 대답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사람들은 음식문화가 대단히 까다롭습니다. 레위기 11장에 주로 나타납니다. 짐승에 대해서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라야 먹습니다. 약대는 먹지 못합니다. 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토끼도 먹지 못합니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는데 새김질을 아니하므로 못 먹습니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을 하는 짐승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물고기 중에서는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이라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장어 같은 것은 먹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거룩하고 저런 것은 속되다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소는 거룩하고 돼지는 속되다고 돼 있거든요.

 그런데 생각할 것은 이같은 성속(聖俗)의 개념이 어디서부터 오 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조금 신학을 하는 마음으로 생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자세히 들으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기나 짐승자체에 거룩하다 속되다 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먹어라 저것은 먹지 말라 하는 데는 위생적 연유가 있습니다. 유명한 사회학자들의 해석을 보면 이렇게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옛날에 아직도 위생시설이 좋지 못할 때에 돼지를 잡아서 먹는데, 며칠을 굶었으므로 빨리 먹고 싶거든요. 그래서 잘 익혀서 먹어야 할 것을 그냥 설익은 것을 마구 먹어놓으니 배탈이 나요. 잘 익혀 먹어라 해도 영 듣지를 않아요. 돼지고기는 설익혀 먹으면 안됩니다. 돼지고기 회는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락없이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고기는 날것으로 먹기도 하고, 좀 설익어도 탈이 안 난단 말입니다. 돼지고기는 잘 익혀 먹어야 돼요. 그래서 잘 익혀 먹으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영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옛날의 똑똑한 추장들이 마지막에는 '돼지고기를 먹으면 신이 노한다'라고 해버렸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컨대 피를 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 당시 사냥을 하니까 피 먹다가 다친 사람이 많습니다. 그 짐승이 병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더구나 사람이 때려죽이니까 죽을 때에 발악을 해서 피에 독소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요새도 피 좋다고 먹다가들 크게 해를 보는 사람 많지요.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위생상의 이유에서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집단적 습관에서 하나의 관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문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먹어 보다보니 돼지는 위험하고 소는 안전하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구나, 이것은 깨끗하고 저건 더럽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는 새김질을 한다, 새김질하는 짐승은 깨끗하다, 새김질하지 않고 통으로 삼키는 놈은 나쁘다……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생각해 오는 사이에 관념이 되고, 이것은 문화화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념을 하나님께서 이용하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가진 자기네의 문화, 사람이 가진 인간적 관념을 하나님께서 이용하십니다. 고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 스스로 먼저 생각하기를 소는 깨끗하고 돼지는 더럽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내게 제물을 가져올 때는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가져오고 더럽다고 하는 것은 가져오지 말라-----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색깔도 그렇습니다.

 색깔도 이런 색깔은 나쁘고 저런 색깔은 좋다고 누가 말할 수 있어요? 오늘 우리 성가대에서도 하얗게 입었습니다. 하얀 것 좋아요.

깨끗하고 좋아요. 그러나 이렇듯 우리는 하얗게 입는 것을 좋아하지만 다른 어떤 나라 문화에서는 하얗게 입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에서 가운을 입는데 까만 것을 입어요. 까만 색을 좋게 생각해서 우리는 장례식 같은 데서는 까만 옷을 주로 입으며, 정 못하겠으면 까만 넥타이라도 매는 것입니다. 이렇듯 까만 색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태국에서는 까만 색은 상복입니다. 상복에만 까만 색을 써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까만 옷은 입지 않아요. 파란 것을 입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꼭 죄수복을 입은 것 같아요. 목사가 그런 옷을 입습니다. 이것은 풍습입니다. 우리가 요새는 아무 생각 없이 빨간 옷도 입고 교회에 나옵니다마는 지금부터 30년 전만 해도 빨간 것을 입고 나오는 것 아무도 좋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울긋불긋하게 입는 것, 꼭 무당 옷자락 같은 것은 거의 금물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네의 관념이지요. 점잖은 자리에 나갈 때에 그렇게 울긋불긋한 것 입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화입니다. 우리의 느낌이 그렇습니다. 이미 그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는 오늘의 우리의 문화 패턴 속에서는 가장 적절한 것이 뭡니까? 쉽게 말해서 오늘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 면 여러분은 무슨 옷을 입겠습니까? 그렇다면 교회에 나올 때에도 그렇게 입고와야 합니다. 점잖은 어른 만나러 갈 때에 그렇게 입는 다면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는 그보다 더 좋게 입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 보니까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는 넥타이 매 고 점잖게 다니다가 주일날은 교회에 넥타이 풀고 나옵디다. 하도 이상해서 제가 딱 손을 붙들고 "회장님, 넥타이 매시는 게 좋겠는데요?" 했더니 "안식일입니다" 해요. 그래서 "풀어버리세요." 그러고 말았어요. 왜요? 안식일에 좀 편하고 싶다, 이것입니다. 일리가 없지는 않다 싶어요. 그러나 꼭 알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분으로 새벽기도회에 나올 때에 꼭 넥타이를 매는 분이 있어요. 그분의 마음은 왜 그렇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가는데 노타이 바람에 절름거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도 이렇게 나가면서 하나님 앞에 내 이럴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인가봐요. 여기서는 제가 굳이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그르다 하지 않겠습니다. 생각대로 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문화적 개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색은 점잖은 색이고 저런 색은 거룩한 것이고, 하는 것이 다 우리의 관념인 것입니다. 또 날마다 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어떤 문화적 패턴 속에 살고 있어요.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시간이 가면서 규례화하고, 좀더 나아가서는 교리화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교리화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가진 문화적 개념을 더 우월하게 생각합니다. 우월감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의 문화는 나쁘고 천하고 내가 가진 것은 고상하다 합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옳고 이것은 이것대로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갑니다 마는 아프리카 같은 데서는 새로 나온 사람 하나가 있으면 그 사람 놓고 30분 동안 춤을 춥니다. 왜요? 그들은 춤추는 게 그들의 문화이니까요. 당연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것입니다. 그렇다 고해서 우리가 오늘 춤을 추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출 필요도 없어요. 춘다고 나쁘고 안 춘다고 이단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컨대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속되다 거룩하다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십니다. '네가 가진 편견을 버려라' 하십니다.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더러운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십니다. 창조의 원리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딤전 4:4). 속된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만지느냐, 누가 상대하느냐 입니다. 사람이 중요해요. 거룩한 자에게는 다 거룩해요. 보십시오. 똑같은 기구라도 교회에서 쓰이면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의 예사 화분이지만 교회에 쓰이는 화분은 거룩한 것입니다. 여느 피아노이지만 성전에서 쓰이는 피아노는 다릅니다. 저 시장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고 쓰이니 거룩해지는 것이지요. 피아노 자체에 거룩하고 천하고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또한 스스로 속된 것은 없습니다(롬 14:14). 그리고 만물이 다 정(淨)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자에게는 악합니다(롬 14:20). 사람의 마음가짐이 문제인 것입니다. 또 로마서 14장 23절에 보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합니다. 언제나 믿음으로 행하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면"-----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자기 편견에 매여 있어요. 그는 신학체계에 있어서 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과 같은 계시를 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안디옥에서 이방사람하고 같이 식사하다가 유대 사람이 들어오니까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질책을 당하지 않습니까? 신학적으로 완전히 정리가 돼 있지 못 했기 때문이죠.

 모름지기 우리는 이방의 문화에 대하여 합당한 것을 우리가 고 용해서 이용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문화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문제에 확실한 신학적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없이 출발하게 되면 흔들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문화적 요소와 복음적 요소가 혼돈하게 되고 문화를 교리화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참 조심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을 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확실한 신학적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을 네가 너의 편견을 가지고 속되다 하지 말라, 곧 이방사람에게 복음 전할 때에 꺼림칙한 생각으로 하지 말라, 저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원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라-----그런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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