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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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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7절-13절: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둘씩 둘씩 보내시며: 왜 둘씩 보내느냐? 혼자 보내면 유괴당하고 얻어맞아서냐? 하나씩 가면 외로워서? 이유는 복음의 증인이라는 점에서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예수님께서 보내실 때 보냄을 받은 사람이 인간인지라 혼자 보내다 보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혹 이단소리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증인이라는 의미에서 둘씩 보내는 것이다. 재판에 설 때도 둘 이상 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엉터리 재판에는 증인이 굉장히 많다. 진실 된 증인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되는 거지만 세상은 그렇지를 않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왜 둘씩 보낼까? 한 사람을 보내면서 만능의 능력을 줘서 보내면 될 텐데 왜 둘씩 보내실까? 증인 속에 함유하고 있는 뜻이 뭘까? 둘씩 보내는 것은 진리와 성령(영감)을 의미한다. 기생 라합의 집에 두 사람이 들어갔다. 복음이 들어갔다. 계시적으로 이면을 보면 진리와 영감이 들어간 것이다.


자기 속에 진리와 영감이 즉, 이치로써 말씀이 깨달아지는 그 감화성은, 자기 속에 옳은 지식이 박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복음의 증인이 들어간 거요, 성령님의 역사다. 그걸 짓밟으면 안 된다. 몰라서 짓밟아 버리고, 죽여 버리고, 가다가 내버리고 하면 자기 양심을 내버리는 거요, 복을 내버리고 가는 거다. 모르면 그는 형벌 받고 멸망 받을 사람으로 살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을 모르니 그렇다.


자기에게는 마음이 정신이 있는데 이건 눈에 안 보인다. 그러면 사람이 몸 살 골각 피부 이게 더 중요하냐, 정신 마음이 더 중요하냐? 정신 마음이 더 중요하다. 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건데 그걸 못 보고 있다.


우리 동네 교회의 전도지를 보니까 성경구절은 다 붙인다. ‘모든 인간은 멸망 받을 죄인이고, 천국이고’ 다 말을 하는데 말끝이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고난 풍파가 없이 행복하다고 한다. 이 행복이란 사업도 잘 되고 몸도 안 아프고 근심 걱정도 없다는 의미다. 이런 개념으로 성경구절을 붙여 놨다. 이건 성경구절을 붙였어도 사람의 정신을 땅에다 처박는 거다. 이게 마귀 짓이다. 그 교회의 간판을 보니까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고 했는데도 그렇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장로교회고 감리교회고 천주교이고 이방 종교인들이고간에 말할 것 없이 다 구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많은 교회 교인들은 교리를 가지고 내세우겠지만 교리를 가지고 내세우며 말하는 그들의 속에 들어있는 그 정신 사상 골수를 찔러 쪼갤 줄 알아야 한다.

말을 하는 자기 자신이 어떤 정신으로 그 말을 하는 것인지를 모른다면 속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이걸 모르면 감추인 것과 같고, 아는 것은 드러난 것과 같다.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려면 마음 정신 속에 들어있는 그걸 끄집어내야 한다. 그걸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다 그런 밝은 눈을 가져야 한다. 성령님에 감화된 진리지식을 가져야 한다.


‘네 믿음으로 네가 나았도다’ 라고 한 것처럼 옳은 진리이치를 자기가 갖고 있으면 자기 마음이 어디서 놀고 있는지 그 판단이 들어간다. 성령님은 자기의 신앙양심을 구분하고 분리를 한다. 자기 마음이 어디서 놀고 있는지, 자기 마음이 어디로 튕겨나가고 있는지, 자기 마음이 어디서 탈출하고 있는지? 그걸 얼른 붙잡아서 자기를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를 해야 한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 그런데 보통 이걸 전혀 모른다.


불교에서 아무리 공을 들여도 거기에는 자기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이치가 없다. 그래서 자꾸 ‘비우자. 비우자’ 한다. 사람 마음을 어떻게 비우느냐? 멍청이라면 혹 모르겠지만 산(生) 사람인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비우느냐? 멍청이라도 밥 먹을 생각도 있고 밥도 먹고 하는 건데.


‘둘씩 둘씩.’ 증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의 증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진리가 없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건 증인이 아니다. 주님이 둘씩 보냈다. 그러니 나중에 ‘너희 동네에 둘이 안 왔더냐?’ 하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이 들어가고 심판이 들어간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떻게 제어가 될까? ‘들어가지 말아라’ 하면 제어가 되는 거냐? 귀신이 들어가지 않을 사람으로 만들면 된다. 실력을 높이면 된다. 영적 영능의 실력을 높이면 된다. 성장되게 하고 장성되게 하면 된다. 모든 지혜지식성과 인격 면이 바르게 성장되고 장성이 되면 그 사람에게는 귀신이 장난칠 새가 없는 거다.


이런 사람은 설령 한 번 넘어져도 빨리 자기 성격 성질의 결함을 찾아서 고치고 회개가 될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도 자기 성격 성질을 못 고치면 귀신의 장난에 휘말리게 된다. 안 믿는 사람이 귀신이 들리면 겉으로 다 드러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귀신이 들리면 밖으로는 잘 안 나타난다.


‘또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가지지 말라.’ 그러니까 지팡이는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여행이냐? 다른 나라 여행을 말하는 거냐? 나그네로 사는 그게 여행이다. 출생에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기까지가 재세기간 동안의 여행이다.


그 여행을 하는 동안에 살면서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고, 이런 저런 사건 환경을 당하며, 이런 것도 보고 저런 것도 보며 눈으로 몸으로 부딪힐 그 때에 자기에게 지팡이가 있어야 된다.


그러면 지팡이는 자기를 위해 있는 거냐, 남을 위해 있는 거냐? 먼저는 자기를 위해 있는 것이다. 자기가 힘들 때 지팡이에 의지하고, 사나운 짐승이 오면 무기로도 사용하기도 하고, 그리고 정신적 신앙사상 면으로 들어가서 자기 속에 분명한 옳은 말씀의 지팡이가 있어야 한다. 자기를 가리켜서 ‘이럴 땐 이렇게 해야 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해야 되고’ 하는 지팡이가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길을 묻는 사람에게 가리키는 지팡이도 되니, 이럴 때 상대에게는 말씀의 지팡이가 된다. 진리이치로 가르치는 걸 말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지팡이가 없이 믿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가지라는 것은 왜 가지라 하는 거고, 가지지 말라는 것은 왜 가지지 말라는 것일까?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일반적으로 보면 ‘여행을 하는데 그런 것을 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느냐?’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행할 때에 양식도 가지지 말고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냐? 보내는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말씀을 하신 분이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책임 없이 그 말을 한다면 어떻게 사람이 사느냐? 그러니까 주님이 다 준비해 놨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 보면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도 만나고, 또 예수를 믿는 사람도 만나고, 또 예수는 안 믿지만 인간을 생각하는 사람도 만나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일지라도 ‘아이고, 애쓰십니다. 힘드시지요? 우리 집에 가서 점심 같이 먹읍시다’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다 주님의 준비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이 뭘 준비하고 뭘 준비하고, 언제 다 준비해 놓고 언제 전하느냐? 그러다가 죽을 때까지 늙어빠져서 주님의 일을 할 거냐? 아니다. 그냥 나가는 거다. 정말 옳은 진리이치라면 하나님 당신이 당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하고 있는 거다.


미련한 말이지만 나는 이 진리교훈을 만나기 전에도 ‘내가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길거리에 나 앉는 한이 있더라도, 거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 바로 믿고 가련다’ 했다. 그 동안에 시련도 고난도 훈련도 연단도 참 많았다. 오늘날까지도 시련 연단이다.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하는 말이 자기가 살아온 길이 어떻다고?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했다. 바로 왕이 들을 때 ‘나는 그런 고생을 안 했다’ 하겠으나 그러나 야곱의 그 말 속에는 야곱의 삶속에 하나님의 인도 보호 시련 연단이 있었으니 그것이 참 값지다는 것이다. 바로 왕은 견딜 수가 없는 거다.


‘준비를 하지 말아라. 아무 것도 가지지 말아라’ 한 것은 주님이 준비를 해 놓으셨다는 의미이다. 나라에서 ‘군대에 나오너라’ 하면 군대에 가는 사람이 쌀도 가지고 가고 돈도 가지고 가느냐? 입고 간 옷도 다 벗어놓고, 양식 구두 등 다 국민이 세금으로 마련해 준다. 주님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시는 거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자기 것을 자기가 다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이 준비를 하신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세상성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준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일꾼은 목숨을 거는 거다. 오늘 하루를 살다가 내일 죽더라도 목숨을 거는 거다. 그러니까 쌓아놓고 살아야 마음이 놓이는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는 ‘저거 어떻게 사나?’ 하게 된다.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무슨 신이냐? 복음의 신은 신어라. 무슨 말이냐? 전도하고 가르치려고 가는 그 발걸음이 복음의 신이다. 복음의 신을 벗어놓으면 복음전도는 안 되는 거다.


‘두 벌 옷도 입지 말아라.’ 그러면 이 말씀이 여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냐? 겨울에도 두 벌 옷을 입지 말아라? 추우면 여러 벌을 입어야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두 벌 옷을 가지고 번갈아 입고 벗고 즉, 사정과 형편에 따라 변장술을 쓰지 말고 오로지 진리본질만을 전하라는 것이다.


‘네 주머니에 두 가지 추를 가지지 말아라.’ 상황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두 가지 추를 쓰면 안 된다. 물건을 달 때 몇 가지 저울추를 쓰느냐? 배추 다는 저울과 고기 다는 저울이 같으냐, 다르냐? 같다. 같아야 한다. 저울은 뭘 달던 추는 같아야 한다.


저울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신조척도를 말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달 수 있는 하나님의 저울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 인조척도는 가지지 말라. 즉 인간이 만든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그 저울은 가지지 말아라.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나 어느 환경이나 어느 처소에 처해졌건 영원히 변질성이 없는 신조척도의 저울 하나다.


이 저울에 사람이 달리고, 품행이 달리고, 언행이 달리고, 신앙생활 하는 영적 면이 다 달린다. ‘날아다니는 사람처럼 저렇게 정함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예수 믿은 지가 10년은 되는 것 같은데 사람이 저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건 저울에 달리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언행심사 일상생활에도 규모가 잡혀야 한다.


10절: ‘거기에 유하라’ 하는 그곳은 천국복음을 받는 자의 집이다. 하나님께서 그 집에 복을 주시겠다는 의미의 말씀이다. 이런 곳에는 둘씩 복음을 들고 들어갔다.


구약성경에 보면 법궤를 가지고 들어간 집이 저주를 받았느냐, 복을 받았느냐? 복을 받아다. 그 집이 복을 받았다는 말이 막 퍼져나갔다. 다윗이 그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짐승(소)을 등용시켜서 그 법궤를 싣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소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법궤는 인간 너희들이 메는 거지 왜 짐승인 나에게 끌고 가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왜 짐승인 소에게 끌고 가라고 하느냐’ 하고 그 소가 펄쩍 뛰었다. 그래서 법궤가 넘어지려고 하니까 웃사가 얼른 받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러면 이게 누구의 잘못이냐? 법궤가 떨어지려는 걸 본다면 누군들 안 받겠느냐? 그러니 누구의 잘못이냐? 웃사냐, 소냐, 구루마냐, 다윗이냐? 다윗은 지도자이고 왕이니 첫째 잘못은 다윗이다. 법궤는 짐승이 아닌 제사장이 메어야 하는 거다.


나중에 이걸 회개하고 누가 와서 법궤를 가지고 가느냐? 제사장들이 메고 갔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가니까 다윗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추다가 바지가 벗겨졌다. 얼마나 기뻤으면 이랬을까? 법궤를 메고 올릴 때의 다윗의 그 감격을 생각해 봐라. 이건 말씀의 이치가 전해져 들어간 거고, 법궤가 자기 나라에 안치가 된 거고, 백성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이 들어가신 거다. 우리의 신앙은 그런 신앙을 보는 거다.


그런데 아무리 진리이치를 배웠어도 진리와는 따로 놀고 있고, 집에 들어가면 ‘돈 돈, 세상 제일’ 하고 있다면 여기에는 법궤가 없는 거다. 법궤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 집에 안 계신다. 하나님이 즉, 주님이 그 사람을 따라다니기는 하는데 그 사람에게는 능력을 행하지를 않는다.


자기 집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복음이 있느냐? 그 정신이 있느냐? 그 위주로 사느냐? 하나님께서는 그런 집에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고, 그런 집은 구원이 이른 집이라는 것이다. 이런 집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는 라인 안에 들어있고, 하나님의 생명권 라인 안에 들어있고, 아가페 통치 라인 안에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복을 다 받을 수 있는 집이다. 그 사랑을 다 받을 수 있는 집이다. 그러나 복음이 싫어서 ‘가시오’ 하면 그건 없다.


구약에 보면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과부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 과부와 아들과 둘만 있어서 그들이 남은 밀가루를 요리해서 먹고 죽으려고 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건데, 하나님께서는 과부가 겪는 3년 6개월의 흉년을 무사히 통과케 하려고 이 집에 선지자를 보내셔서 ‘너희들이 먹으려고 하는 마지막 식량을 다오’ 했다.


그래서 선지자에게 그들의 마지막 식량을 대접했는데, 그 마지막 식량을 선지자만 먹고 과부와 아들은 굶어죽었느냐? 아니다. 퍼내면 또 나오고 퍼내면 또 나온다. 다함이 없다.


그러면 이게 요술이고 마술이냐? 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선지자를 맞아들이는 집, 하나님의 종을 맞아들이는 집, 진리를 받아들이는 집, 말씀을 받아들이는 집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말씀에 세상적인 계산을 해서 ‘이렇게 예수 믿다가는 죽겠구나’ 하느냐? 참으로 어리석다. 정말 어리석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어디로 돌아다니며 바람을 피우고 다니느냐? 그러면 잘 살 것 같으냐? 남자고 여자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마음을 주고 정을 주고 시간을 뺏기는 거냐?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믿으면 사람이 처절해진다. 그러면 가정이 바로 서겠느냐? 안 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은 너로 인해서 천국복음이 전파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뤄나갈 집이라는 말이다. 이게 얼마나 귀하냐? 마치 구약 때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 그 가정이 축복을 받았듯이. 삭개오 가정도 그렇다.


선지자가 그곳에서 떠날 경우는 다른 곳으로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입장에서는 그곳에서 떠나기까지 그곳에 복음을 충분히 심어줘야 되겠다는 것도 들어있고, 복음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게 돼 있으니 떠나기 전까지 복음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수리사업이 워낙 잘 돼 있어서 극심하게 가물기 전에는 가뭄을 잘 모르는데 옛날에는 수도도 없고 가물 때는 우물도 말라버리니까 여러 날 가물다가 비가 올 때는 집안에 있는 빈 그릇을 있는 대로 전부 다 처마 밑에 갖다 놓는다. 그래서 큰 그릇이 있거나 그릇이 많은 집은 비가 올 때 받아놓은 물로 충분히 쓸 수가 있다. 그런 것처럼 복음이 있을 때 충분히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천국복음의 조건 때문에 오든지 가든지 해야지 자기의 육신생활 문제 때문에 오든지 가든지 하는 것은 바른 정신은 아니다.


목사가 어느 교회로 부임하러 갔는데 그 교회가 세상 인본주의 교회라면 새로 간 곳에서 이삿짐 풀지 말고 떠날 준비를 하라. 무슨 말이냐? 부임한 첫날부터 그 교회 교인들에게 진리본질을 정확히 구별 분별시켜 주고 나서 그 교회 교인들이 ‘우리교회에 계속 있어주십시오. 계속 가르쳐 주십시오’ 한다면 그곳에 계속 있을 수 있지만 교인들이 진리본질의 말씀은 안 받고 하는 말이 ‘목사가 맨 날 내 말하는 것 같고, 누가 목사님에게 나를 고자질한 것 같다’ 한다면 이건 떠나야 한다. 그런 것을 대비해야 한다.


그런 곳임에도 입에 풀칠이라도 해 보려고 머물고 있다면 마귀의 종이요, 그런 교인들 비위 맞춰주며 밥 먹고 살다가 죽는 신세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천국복음의 종은 그런 곳에 있지를 않는다. 그런 교회에 있지를 않는다. 그런데 그런 곳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머물고 있는 목사들이 정말 많다. 이건 하나님의 종이면서도 뭐가 중요한 줄도 모르고 있는 거다. 참 문제가 심각하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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