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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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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34절-37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자기의 주관성을 내세우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또 따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말은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계획이 따로 있는 것은 따르는 게 아니다. ‘따른다. 안 따른다’ 하는 건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것과 같이 들어간다. 믿는다는 것은 따르는 거다.


자기의 세상적인 이력이나 업적이나 존귀나 명예나 영광이나 부요나 권세나 권력이나 학력이나 인맥이나 어떤 육체적 조건이나 모든 세상에 속한 것을 배경으로 내세우면서, 또는 자기의 그런 것을 배경을 삼아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러면 믿기는 예수를 믿는 것 같으나 그 사람에게는 진리의 정신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자기가 예수님을 따르는 건지, 아닌지 하는 것은 정확한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을 때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지 세상 요소적인 것을 받으면 알 수가 없다. 진리가 분명할수록 자기가 예수님을 바로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가 얼마 안 가서 확연히 드러난다. 자기가 드러난다. 빛 앞에서 자기가 드러난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지혜지식성, 예수님의 도덕성, 예수님의 능력성 즉, 하나님의 신적인 것을 내가 가지는 것. 소원 목적성 취미성 의사성 등등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만 내가 가지는 것. 이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거기서 나오는 지혜를 쓰는 거라든지 이건 다 예수를 따르는 거다. 그런 것이 아니면 예수를 따르는 게 아니다.


자기가 아무리 종교계의 거두라고 해도 진리로 자체화 실상화 인격화 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제자 또는 주님의 종이 아니다. 그런 경우 사단 마귀의 이용물이 된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과 맞먹자 하게 된다.


진리를 많이 들은 것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진리이치를 배우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인격화 실상화 성품화로 되는 것과는 별개다. 진리를 못 들은 사람과 비교하면 옳은 이치를 많이 들은 사람이 유리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실상화 인격화 된 것이 들어가는 거지 진리를 많이 아는 게 들어가는 게 아니다. 따라서 진리를 많이도 알아야 하지만 그게 인격화 되면서 표면적으로 나와야 한다. 알면 써먹어야 한다. 써먹지 않으면 온전치 못하다. 우리교회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치적으로 알아야 한다. 주먹구구식으로는 안 된다.


진리로 인격화 되는 것은 없이 하나의 종교적 지식화 시켜서 활동화로 몰고 나가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아무 교회나 나간다는 말이 아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잡고서 따라가는 것. 좇는다는 말 속에는 자기 성품성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격화 자체화 실상화 되는 것이 들어있다. 사람은 옳은 것을 따라가면 옳은 사람으로 인격화 된다. 진리 인격화로 되는 것은 자기 성격과 성질도 성화 즉,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쳐 들어가는 것이 함축돼 들어가 있다.


35절: 인간의 존재가치는, 자기의 존재가치는 복음을 위하는 데서 나타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의 존재가치가 복음을 위하는 데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하신 대로 1차적으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2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천국에서 영능의 실력대로 영원히 누리는 것이 인간창조의 목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만들어지고 능력화 되면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만들어진 대로 그 천국을 누리도록 자기를 만들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또한 영과 육의 결합체로 지음을 받았다. 우리 인간의 영은 신령계에 속하고 육은 물질계에 속한다. 우리의 영은 자기에게 주격이고 육신은 영인성장 면에 있어서 소유격이 된다. 그런데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어느 쪽이 주격으로 되어있는지? 육이 주격으로 되어 있는지, 영이 주격으로 되어있는지에 따라서 자기의 장래문제 영원문제까지 다 연결이 된다.


영은 신령한 존재이니 신령한 존재는 신령한 양식을 먹어야 한다. 영의 양식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육의 양식은 물질 음식이다.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고(성장하고) 육신의 목숨은 물질 음식을 먹어야 산다. 육신이 물질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 목숨은 죽는다.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하나님의 온전한 속성으로 성장이 안 된다. 성장이 되지 않는 이것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


그리고 육신이 물질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육신이 힘을 쓰지 못하고 오각의 오감성과 희로애락성이 둔해지듯이 중생된 영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면 영적 면에서 감각성이 예민하지를 못하다. 사람이 둔하다 그 말이다. 성경에도 ‘육신의 몸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했듯이 영의 양식을 풍족히 먹는 사람은 속사람이 능력 있고 더 젊어진다. 즉 힘이 있다. 기독교 교훈에 이게 다 들어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출발을 하면서부터 그대로 들어간다. 그 기백 그 정신 그 질적인 신앙이 경험을 하면서 더욱 실력이 커지면서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는 가다가 넘어지고, 게을러서 두들겨 맞고, 또 일어나서 가다보면 또 두들겨 맞고, 그러면 짜증부리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느냐?


현재적으로 육에 속한 자기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성품이 이루어지는 구원을 따라가면, 말씀을 깨닫고 인격이 고상해지고 지혜로워지고 총명해지는 것이 다 구원인데 이 구원을 따라가면 자기의 육신은 의의 병기로 쓰여지고 성령님이 자기 몸을 의의 병기로 쓰시는 거다.


내 몸이 의의 병기로 쓰여지면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진다.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지는 걸 구원이 입어진다고 해도 된다. 그러나 마귀가 자기 몸을 쓰면 그건 악의 병기다. 그래서 일단 우리교회에 오면 뭔가가 입혀져야 한다. 하다못해 두루마기는 못 입을망정 속옷이라도 입고 죽어야 한다.


말씀의 이치에서 깨달으면 깨달은 그만큼 자기의 육신생활에서 지혜로 나타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생활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사람의 사는 정신이 얼마나 개척적이냐? 이런 사람은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고, 사회에서 일을 할 때도 전도를 염두에 두고 대화를 하고, 육신에 손해가 되지 않게 일을 한다. 이러면 몸도 건강하고 하루 세 끼 안 굶고 살게 될 테니 뭐가 부러우냐?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부요성이고 젊고 힘 있고 지혜로운 거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게 속에 잠재돼 있는 것이다.


육신에 속한 자기 이성이 임시성에 속한 세상이 좋아서 물질성을 따라가면 자기의 육신은 악의 병기로 쓰여져서 죄행이 된다. 일반사회에서는 사람을 해코자 하는 걸 죄행이라고 하지만 나의 이성과 몸이 악의 병기로 쓰여지는 게 죄행이다. 이렇게 되면 생명적인 삶이 안 되고 그 삶 자체가 사망적이다. 하나님께 인정이 안 되고 죽어나간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들이 남 때문에 안 된다고 남을 탓하게 된다. 서로가 그렇게 돌아가면 다 같이 망하는 거다. 일반 이치적으로 봐도 서로가 남 탓하면 다 망한다.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즉,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살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뭘 잃느냐?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닮아야 할 텐데 세월 속에 살면서 그걸 사망계로 다 잃어버린다. 공치는 인생이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잃으면.’ ‘잃으면’ 하는 이게 죽는다는 말인가?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잘 이용 사용하면 구원하리라. 뭘 구원?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이 잘 입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품이 잘 입어지면 그 사람의 육신의 목숨은 죽어버리는 것이냐? 육신의 생명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신앙 믿음 쪽으로 말을 하면 육신의 것은 그냥 따라붙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깊은 뜻을 모르면 ‘복음을 위하여 즉, 주님을 위하여 살면 육신의 목숨이 산다. 죽는다’ 하는 쪽으로 붙이게 된다.


아무리 영 주격으로 나간다고 해도 육의 생명은 언젠가는 죽는 거고, 또 하나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젊어서 데리고 가실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는 말씀 속에는 그런 것까지 다 포함이 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육신의 생명이 빨리 죽으면 ‘죄를 지어서 그렇다’ 하는 건 자기 해석이다.


‘누구든지’란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잃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리라’ 하는 것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구원이 아니면 잃는 것으로 돼 있으니 네가 인간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들어야 할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적당히 예수 믿으면 적당히 되는 거냐? ‘적당히 믿으면 된다’ 하고 생각하는 그게 영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말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라는 말인데, 이 말씀 속에는 자기 앞에 ‘구원이냐 사망이냐, 자기를 잃느냐 자기를 영생으로 살리느냐’ 하는 것이 놓여 있는데 자기를 생명적으로 구원하고 영생으로 살리는 것은 아무 교회나 분위기 따라서 나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인정정실을 따라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가능하다는 뜻이 들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치 않는다면 전부는 헛 사는 것이고, 예수를 세상성으로 믿었다면 그 사람은 자기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었어야 하는 그 면에서 다 잃은 사람이 된다. 이건 실력이 있어야 할 자기가 그 많은 세월동안에 그 실력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학교를 수 년 수 십 년을 다녔어도 공부의 실력이 없으면 안다고 하는 그 실력 면은 다 잃은 것과 같다.


예수를 믿을 바에야 성장이 되고 영능의 실력자가 돼야지 옳은 이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흐리멍텅하게 있다가 바보 비슷하게 돼서 전도도 못하고 성경도 안 보고 말씀을 못 알아듣고 하면 믿은 효력이 어디 있느냐?


그래서 이 이치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내가 하는 설교하는 중에는 그 내용이 일반 도덕성 비슷한 말을 하는 때도 있다. 그래도 그 속에는 말씀의 이치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왜 귀한 설교단상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한다. 그러면 일반 도덕성을 말한다고 하며 그걸 비난하는 사람이 일반 도덕성적으로 바로 사는 사람이냐? 못 산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한다. 사람이 모르면 용감하고 겁이 없다. 알고 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자칭 사명자다. 이런 사람은 겁이 없다.


36절-37절: 이 세상에 자기 목숨하고 바꿀 것이 있느냐? 없다. 자기 목숨과 바꿀 것은 없다고 하자. 그러면 이 세상에 자기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느냐? 없다.


성도의 몸은 주님이 당신의 피로 사신 주님의 몸이요, 천국에 속한 몸이요, 하나님 아버지처럼 자라야 할 몸이다. 이런 성도의 몸인데 누가 예수님께 성도 자기를 세상에 있는 물질하고 바꾸자고 그런다면 예수님이 바꾸겠느냐? 안 바꾼다. 주님이 나를 세상에 내어주고 나를 세상 것과 바꾸는 것을 봤느냐?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 주님이 돈을 받고 그 사람을 세상에 팔아먹은 적이 있느냐?


예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이 지구를 만들었느냐, 지구를 위해서 자기를 만들었느냐? 사람을 위해서 지구를 만들었다. 이 물질세계를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것이냐, 인간을 위해서 물질세계를 만든 것이냐? 인간을 위해서 물질세계를 만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되어 오심이 인간 자기를 위해서 오신 것이냐, 짐승을 위해서 오신 것이냐? 자기를 위해서 오셨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여길지라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을 해야 옳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다. 그런데 이 목숨을 세상에 있는 고층빌딩과 바꾸자고 하면 바꿀 수 있느냐? 안 바꾼다. 그러면 사람의 목숨을 차하고 바꾸자고 하면 바꿀 수 있느냐? 안 바꾼다. 돈하고는? 안 바꾼다. 그런데 자기의 목숨이 아닌 남의 목숨 즉, 아내의 목숨을 돈과 바꾸는 사람이 있느냐? 있기도 하다. 아내 명의로 보험에 들고 아내를 죽이는 거. 또 자식이 부모의 목숨을 돈과 바꾸는 자도 있다. 보험금을 노리고 부모를 죽이는 자가 있다. 돈 욕심 때문에 곤경에 빠져 죽는 집안 식구도 많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돈과 사람을 바꾸는 거다.


믿는 사람이 부모 처와 자식, 그리고 이웃을 물질적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고 대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사람을 돈하고 바꾸는 거다. 이런 사람은 돈 몇 푼 때문에 그만 예수님을 돈과 바꾼다. 이건 자기 구원을 돈과 바꾸는 것이다. 자기의 미래, 자기의 존귀 영광성을 돈과 바꾸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된다.


어느 교회에 나가던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면 사람을 세상과 바꾸고, 돈하고 형제들을 바꾸고 한다. 이치를 모르면 그렇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성분성에 의해서 상황만 바뀌면 그런 짓이 그냥 나오는 거다. 혹 자기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에 의해 그렇게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미련해서 고통을 당하고 죽는구나.


사람이 죽으면 그 고통이 누구에게로 이어져 오느냐? 다 자기에게로 이어져 온다. 가룟유다가 돈 몇 푼에 욕심이 생겨서 자기를 지으시고, 자기를 구원하시고, 자기를 영원히 존영자로 만들어줄 예수를 팔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구나.


지금도 자기의 육신의 목숨 연명 때문에 진리를 세상에 팔면서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참 많다. 이게 다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한 내용에 들어가는 거다. 그냥 내용만 읽으면 모른다. 그러나 내용을 파헤쳐서 보면 이런 성분 이런 성분이 다 나온다. 팔아먹고 바꿔먹는 방법만 달라서 그렇지 말하자면 예수님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그 말이다. ‘무엇보다 무엇이 중요하냐’ 하는 판단을 못 내리고 있다면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되신 주님과는 그 무엇과도 못 바꾼다. 그런데 지금도 자기 육신의 목숨 연명 때문에 진리를 세상정신에 팔고 있다. 목사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거짓목사다.


마: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 가지 큰 시험을 가지고 나온 것은 우리 인간이 이 세 가지를 다 예수님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세 가지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에 넘어가면 두 가지에는 안 넘어간다가 아니라 다 넘어간다. 세 가지 중에 하나에만 넘어가도 다 넘어간 거다. 하나에 넘어가면 이제 둘을 이길 수 없다. 세 가지 속에는 세상 오만 죄가 다 들어있다.


성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과 직결이 되어 있는 것인데 마귀가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와서 바꾸자고 하면 얼른 바꾼다. 떡과 자기 목숨과 바꾸고, 예배당과 자기 목숨과 바꾸고, 세상 명예 영광과 자기 목숨과 바꾸고. 이게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의 현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선택하고 십자가에서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우리를 마귀에게 내어주지 않는구나. ‘내가 죽으면 죽었지 너희를 안 내놓는다’ 이게 십자가의 정신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안 내어준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비싸다는 말이냐? 돈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과 논할 것은 온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 목숨과 논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만큼 하나님 다음 가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주님의 속도 모르고 쉽게 바꿔치기 한다. 예배시간에 은혜도 안 받고 집에 누가 왔다고 하면 가서 만나는 건 바꿔치는 것이다. ‘무엇이 무엇보다 더 중하다’ 하는 게 너의 언행심사로 표현이 되어 나온다. 네 말이 너를 증명을 한다.


예수님을 존귀히 여기면, 구원을 존귀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그 자기를 올리게 돼 있다. 그런데 누가 구원을 가지고 있는 자기를 낮추고 있느냐? 진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진 사람을 낮춘다면 낮추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재앙에 걸린다. 그러니 진리를 가진 나를 하나님 당신이 책임을 지고 있으니 겁낼 것 없다. 그런데 예수 믿는 내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누구를 의지하고 있으며 벌벌 떨고 있느냐?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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