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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의 능력과 현실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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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주현 후 셋째 주일, 2016년 1월24일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서른 살에 출가해서 3년 가까이 유랑 랍비로 살다가 서른세 살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운명은 누가 봐도 불행한 겁니다. 불행한 정도가 아니라 저주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에 이르는 예수님의 운명을 실제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초월적인 능력이 있고,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 모든 걸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당신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삶과 실존이 거칠었습니다(눅49:58).

 

사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고향사람들에게서조차 배척을 받았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똑같이 그 사실을 보도합니다. 막 6: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그 지혜와 능력에 다 놀랐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막 6: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으면 예수님을 인정하고 존경해야 할 텐데, 더 나아가서 자기 고향 출신이 위대한 랍비가 되었다고 자랑했어야 할 텐데 오히려 무시하고 배척한 겁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에 대해서 복음서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예수님의 가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런 이유로 예수를 배척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들이 예수를 낭떠러지에 끌고 가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전체 운명을 배경에 놓고 봐야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극력하게 배척한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사람들이 기도드리는 장소인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거나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는 거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화를 내다가, 급기야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작당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 사상, 생각, 그의 설교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겁니다.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도 예수님의 말씀 선포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만 말하는 반면에 다행스럽게도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인 눅 4:14-21절입니다.

 

세계 변혁

예수님은 요단 광야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뒤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마귀에게서 세 가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 유혹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능력과 권력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해결한 예수님은 짧은 광야 생활을 접고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왔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요즘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가듯이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회당 예배의 전통에 따라서 예수님이 대표로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섰고, 회당 책임자가 이사야의 글이 기록된 양피지를 건네주자 예수님은 사 61:1절 이하를 읽으셨습니다. 눅 4:18,19절이 전하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은혜 받을만한 내용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유대인들이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는 이사야의 글이라는 사실도 역시 중요합니다. 이 문장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소명을 가리킵니다. 소명의 내용이 다섯 가지로 나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2)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 3)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될 것을 선포하는 것, 4)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 5)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에 나오는 ‘은혜의 해’는 희년 전통입니다. 희년 전통에 따르면 살다가 형편이 어려워져서 남의 집 종으로 팔렸던 사람은 50년 되는 해에 해방되어야 합니다. 팔렸던 땅도 50년이 되는 해에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왜곡된 세상 질서를 바로 잡는 일입니다. 희년 전통의 뿌리는 안식일입니다. 모든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안식일 전통이 발전해서 희년 전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다섯 가지 항목을 민중들이 다시 각성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소명에 관한 말씀을 읽었다는 것은 이사야의 소명을 당신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러한 소명과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본문에 거론된 다섯 가지 항목을 관통하는 열쇠 말은 세상 변혁입니다. 그런 변혁이 어떤 건지를 알려면 여기에 열거된 이들이 누군지를 봐야합니다. 가난한 사람, 포로로 잡힌 사람, 시각 장애인, 하층민, 그리고 종들입니다. 이들은 별로 기쁜 소식을 들어보지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헬조선’이라는 요즘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런 삶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세상 구조가 변혁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그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전통이 바로 세상 변혁입니다. 이런 전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수년 전 스위스 의회에서는 CEO와 말단 직원의 연봉 차이에 상한선을 두는 법안이 다루어졌다고 합니다. 작은 문제처럼 보이지만 빈익빈부익부 현상에 저항하는 세상 변혁의 목소리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의 소명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가 인류 역사에서 세상 변혁을 꿈꾸고 외치고 투쟁했던 수많은 선지자, 혁명가, 사상가들 중의 하나라는 말일까요?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설교는, 그리고 예수님이 평소에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는 세상 변혁과 혁명을 외친 이들의 주장과 비슷합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회복되는 변화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로 시작되는 마 5장의 ‘팔복’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런 이들과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은 다음에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란 사람들이 어떤 말씀이 계속될지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4:21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이 성서의 말씀’은 세상 변혁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이자 꿈입니다. 그리고 지난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혁명가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꿈이 인류 역사에서 실현되었을까요? 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서로 다를 겁니다. 이제는 종이나 노예가 없고, 여성의 인권도 많이 향상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되었으니 당연히 세상이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현대 직장인들은 다 옛날의 종이나 다를 게 없으니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 문제로 축소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각자가 해방과 자유를 향해서 나가고 있을까요? 개인에 따라서 다를 겁니다. 10년 전에 비해서 삶의 조건도 달라졌고, 정신적으로도 크게 자랐고, 신앙적으로 성장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반면에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나 개인이나 달라진 거는 있으나 그게 너무 미미해서 근본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은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비해서 요즘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학교를 다닙니다. 그렇지만 요즘 아이들이 제가 겪었던 어린 시절 아이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아이들은 학습에 대한 부담에 더 예속되어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는 유신시대였습니다. 살벌하던 그 시대와 비교하면 오늘은 자유를 만끽하는 듯이 보이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이 40년 전 젊은이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경제와 문화와 정치적인 면에서의 변혁과 진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사야처럼 세상 변혁의 꿈을 잃지 말아야 하고, 구체적인 투쟁과 실천도 치열하게 전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식으로 세상과 개인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중도를 지키는 게 최선일까요? 세상 변혁을 위한 행동에 너무 앞서 가지 말고, 그렇다고 그런 세상 변혁 운동과는 담을 쌓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요령껏 살아가면 기독교인으로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일까요? 특히 인간 삶의 왜곡이 더 심해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까요. ‘이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이, 즉 하나님 나라가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황당한 발언으로 들립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뭔가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전하는 나사렛 회당에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늘 주변으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그런 소문을 듣고 걱정해서 예수님을 집으로 데리고 갈 생각도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이 말씀이 헛소리라고 한다면 그 헛소리에 귀를 기울인 우리도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사실 초기 기독교인도 세상으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적이 많았습니다. 로마의 교양인들로부터는 ‘당신들은 무식한 무신론자들이야.’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로마 헬라 신화가 가리키듯이 여러 신들을 더불어서 섬겨야 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만을 그리스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들은 이미 눈치 챘을 겁니다. 이사야로부터 시작된 세상 변혁의 희망이 예수님에게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오늘’ 여기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발언입니다. 모세, 엘리야, 세례요한도 감히 내뱉지 못했던 발언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들리는 발언이니, 신성모독자로 몰릴 수도 있는 발언입니다. 이 발언이 빌미가 되어 나사렛 고향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했고, 훗날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에 의해 십자가 처형으로 내몰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이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옳은 겁니까, 옳다면 근거가 무엇입니까? 아니면 사이비 교주에게서나 나올만한 발언을 하신 겁니까?

 

종말론적 사건

‘오늘 이미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이 발언은 종말론적인 차원에 속합니다. 지금 당장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건 아닙니다. 감옥에 갇힌 자가 당장 풀려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억울한 일이 당장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멋진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또 다른 이유로 다시 가난해지고, 눈이 멀고, 종살이에 떨어집니다.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모든 문제가 극복되는 일은 종말에서만 가능합니다.

 

여기서 종말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개인들에게는 나이가 있습니다. 일정한 나이가 들면 우리는 다 사라집니다. 지구에도 나이가 있어서 언젠가 나이가 다 들면 사라집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 즉 종말이 있습니다. 그 종말은 하나님의 고유한 심판입니다. 그 종말이 오면 그 이전의 모든 악한 구조가 더 이상 행패를 부리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은 죽으면 돈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모든 비인간적 구조로부터 해방됩니다. 갑부였다 해서 죽으면 돈으로 큰소리를 칠 수 없으며, 가난했다 해서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억압구조가 해체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그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사건이라면 종말에 가서 일어난다고 말해야지 예수님은 왜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것일까요? 종말과 현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종말인 죽음도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먼 미래로만 여긴 채 지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과연 상관이 없을까요? 여기 결혼한 남녀가 있다고 합시다. 5년 전으로 돌아가면 그 당시에 5년 후의 이 결혼은 순전히 미래 사건입니다. 5년이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일들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종말과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와 있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과정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말장난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종말에 가 계신 분으로서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궁극적인 미래일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미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과 운명이 그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한 질서에, 이사야가 극복되기를 간절히 희망한 삶의 어두운 세력에게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악한 질서를 거부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종말의 능력과 종말의 빛을 실제적으로 이 현실에서 앞당겨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안목이자 영적인 능력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영적인 안목과 능력으로 로마 제국의 험한 세월을 버텨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신앙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영적으로 궁핍한, 그리고 교양이 넘쳐 보이지만 비열하고 나태한 이 세상의 삶을 버텨내야 하며, 충분히 버텨낼 수 있습니다. 성령이 도와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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