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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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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14절-24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18절: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왜 잡히느냐? 완전 노출이구나. 귀신에게 잡힐 수밖에 없는 노출된 사람이구나. 선악과 따먹은 모든 인류 인간 인생은 귀신이나 사단이나 마귀나 모든 악령류들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을 보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 집에 우환이 닥치면 주로 어디로 가느냐? 무당 점쟁이한테 간다. 그러니까 무당 점쟁이에게 간다는 것은 무당 점쟁이에게 가기 전에 정신 사상적으로 그 마음이 그런 것에 노출이 돼 있었던 것이다. 무당 점쟁이에게 갈 수밖에 없는 질로 노출이 돼 있는 거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구별을 잘 못하는 건지, 그런 것에 노출이 돼서 귀신들린 사람들이나 무당이나 점쟁이의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이게 앞으로 예수 믿으면서 어떻게 될까? 그리고 구별을 못하는 사람들은 사단 마귀 악령류에 들린 목사들에게 쉽게 먹혀들어갈 수 있게 노출이 돼 있다. 그거 어디 되겠느냐?


그런 사기꾼들에게 유혹 미혹이 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정신이 물질성으로 돼 있다. 부요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시험에 걸릴 수 있도록 노출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시험에 든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시험에 걸리게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시험에 든 사람은 이미 악령류들에게 끌려들어갈 수 있게 노출이 돼 있는 것이다. 악령류는 사람을 동원시켜서 역사를 하고, 성령님도 사람을 동원시켜서 역사를 한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이룰구원을 안 하고 있으면, 이룰구원이란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닮고자 하는 소원 목적이나 모든 행위를 말하는데 이 이룰구원을 안 하고 있으면 안 하는 모든 인간은 죄 아래 눌려있다고 보는 거다.


이치적으로 말을 하면 인간은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로 살아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지를 않고 ‘하나님-->물질-->인간’의 순서로 살고 있다면 이건 하나님과 안 통한다. 현재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물질이라는 사상에 다 눌려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하나님은 없고 물질을 자기 머리 위에 놓고 이 물질 밑에 자기가 있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부귀 존귀영광으로 살고자 하는 세상에 있는 것으로 눌려져 있다.


순서적으로 하나님 다음에 인간 자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학박사라도 하나님은 없고 물질 다음에 인간 자기가 들어있다면 이건 타락이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볼 때 사람의 소원 목적이 물질로 들어가 있다면 그 사람은 타락이다. 타락된 사람의 말은 절대로 믿지도 말고 약속을 하지 말아라. 너는 이용된다. 그걸 알아라.


예수를 믿는 사람임에도 물질이 목적적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은 이룰구원 면에서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물질성이 끼어있으면 인격적으로 안 통하고, 이건 벌써 사람관계가 끊어진 거다. 일반 이치적으로도 그렇다. 여기에서 부모형제 처와 자식 동기간에도 세상 법정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인데도 자기가 어리석어서 다 빼앗기는 경우가 많다. 몰라서 빼앗기는 경우도 많고. 그런데 정말 하나님 앞에 신앙이 바로 선 사람이라면 물질이 손해가 나더라도 진리입장으로 자기가 바로만 들어간다면 그에게는 보상이 다 들어간다. 이건 약속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사람을 위해서 쓰는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위해서 주었다가 뺏었다가, 물질이 자기 주위에 빙빙 돌게 했다가, 안겨줬다 빼어갔다 한다. 우리로 이런 시련 연단을 통해서 사람을 만드는 거다. 마음이 정신이 소원 목적이 하나님 앞에 온전으로 잘 만들어지도록 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 사는 것은 물질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들어가 있다.


성경에 ‘해와 달아 머물러라’ 한 것이 있는데 누굴 위해서 그걸 지었느냐? 우리 성도를 위해서다. 당신의 온전을 닮는 자를 위해서다. 하나님을 닮게 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아니까 사람을 리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세상공부를 많이 했어도 남을 매장시키고 자기 쪽으로 욕심이 들어가 있다. 이거는 인격적으로 사람이 아니다.


모든 성경은 계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성도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자로 만들어 주려는 것인데 성경의 병든 자나 귀신들린 자나 등용된 인물들을 남의 일처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록들을 통해 죄 아래 놓여있는 자기 자신이 악령류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음을 못 보고 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나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나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나 산에서나 들에서나 길을 갈 때나 집에서나 어디서든지 그 아이가 귀신에게 붙들리기만 하면 귀신이 그 아이를 넘어뜨리는데, 그 현상이 거품을 흘리게 하고, 미친개가 거품을 흘린다. 이를 갈고, 앙심을 품은 자가 이를 간다. 파리하여 간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얼굴색이 변한다.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되니 그걸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지겠느냐? 이건 평상시의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구나.


그렇게 한 뒤에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그걸 보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울까? 사람을 놀라게 만드니 이제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를 않는다.


이것은 귀신에게 완전히 노출이 된 상태인데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언제 그런 현상이 나오느냐 하면 사건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제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그만 속에 있는 것이 막 드러난다. 이게 발작이다. 귀신이 들려서 간질 하는 사람을 등용시켜서 오늘날 자기의 성격 성질 성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는 어디에 노출이 되어 있는 것 같으냐? 반드시 어딘가에 노출성이 있다. 없는 게 아니다. 지금 몰라서 그렇지 자기가 원치 않는 사건이 환경적으로 주어지면 그만 노출이 딱 된다. 평소에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자기 속에 늘 격동성이 들어있어서 어떤 환경이 주어지면 자기 속에 있던 그 격동성에 의해서 밖으로 튀어나온다. 인간에게는 그런 게 다 들어있다. 그거 고쳐야 한다. 자기의 노출성이 환경적으로 어디에서 쉽게 노출이 되느냐? 자기가 자기를 가만 생각해 봐라.


‘선생의 제자들은 능히 못하더이다.’ 왜 제자들은 못 쫓아냈을까? 믿음이 없어서? 아홉 제자들은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고쳐보자고 한 것이다.


그러면 ‘믿음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누구의 인정으로 되는 거냐? 사람의 말에 있는 것이냐, 주님의 인정에 있는 것이냐? 주님이다.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한다. 못 한다’ 하는 건 시험을 쳐보면 실력이 나온다. 점수를 왜 매기느냐? 선생의 인정이 들어간다.


제자들은 귀신들린 자를 놓고 무엇이라고 기도했을까? 아홉 제자가 땀이 나서 옷이 젖도록까지 ‘벙어리 귀신아 나가라.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며 얼마나 큰소리로 통성기도를 하며 힘을 썼을까? 그래도 귀신이 안 나가니까 혹시 ‘화장실 갖다 온다’ 하면서 도망을 가지는 않았는지?


왜 못 고쳤을까? 문제는 그곳에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거다. 그 때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신 후였으니까 주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물론 사람 예수님, 성육신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지만 그렇게만 보지 말고 지금 그 장면에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은 ‘무엇이 없으니 이게 안 되는구나’ 하는 게 있는 거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라고 했다. 이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는 수준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영리하고 똑똑해도 그 수준밖에 안 된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했다. 그러면 베드로의 이 고백이 베드로의 원래 신앙에서 나온 말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베드로의 입을 열어서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해서 나온 거냐? 후자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그 본질의 사상은 간단히 말하면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아니면 안 나오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라야 그 교훈이 나온다 그 말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할 때 그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에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사람 되어 오셔서는 무엇을 하셨는지? 그것을 보고 듣고 만지고 한 그게 증인이다. 그 신앙으로 본질화 된 그 인격, 신앙의 수준이 그렇게 된 자에게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하늘 창고 문을 딸 수 있는, 하나님의 보화를 열 수 있는, 성경에서 보화를 캐낼 수 있는 주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 권을 주겠다. 그러니까 주님이 성경으로 열어주지 않으면 안 열린다.


‘열쇠를 주겠으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면 풀린다.’ 이건 절대권이다. 누구에게?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성령으로 통해서 본질의 신앙을 갖고 있는 그 자에게 그 권을 주신다.


베드로는 지금으로 말하면 성도요 목사요 종이다.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은 그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고, 그게 교회의 일이요, 그게 오늘날 교회 목사님들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가 뭘 하고 있느냐? 질적으로 세상을 구하고 있고, 종교적 사역으로 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디 나왔고, 목사고 박사고 능력 있고’ 하고 있다. 그건 아니다.


성경을 본질로 봐라.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님이 황금열쇠를 교황에게 준 거냐? 계시를 모르면 그런 장난이 생긴다. 그러니까 교황을 신처럼 섬기게 된다. 예수 믿는 기독교 안에 이게 맹점이다.


아마 그 때 당시 돈에 욕심을 내는 가룟유다가 속으로 그랬을 것이다. ‘저 아이를 고치기만 하면 헌금이 많이 들어오겠지’ 했을 것이다. 어쨌든 서기관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아홉 제자들에게 얼마나 공박을 했을까?


아이의 아버지가 아홉 제자들에게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조금만 기다리면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실 것이다’ 했다면 무안을 안 당했을 텐데 그들은 그러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아홉 제자들의 행동을 볼 때 ‘그들이 왜 예수님과 같이 산으로 같이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그 마음이 보인다.


아홉 제자들은 ‘주님이 세 제자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으니까, 그리고 그 전에도 우리가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없는 틈에 우리끼리 귀신을 내쫓자’ 했을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그런 심리가 있다. 요즘 사기꾼 목사에게 걸렸다면 ‘돈 얼마 내면 내가 고쳐드리리다’ 하고 흥정이 나올 수가 있다. 인간 세상에는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19절-20절: ‘믿음이 없는 세대여’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왜 못 고쳤느냐’ 그 말씀이 아니라 ‘왜 높은 산으로 안 따라왔느냐’ 하는 것이다.


말에는 은밀한 뜻이 있을 수 있다. 말은 이렇게 하는데 뜻은 딴 데 있구나. 엘리야가 엘리사를 보고 ‘여리고에 머물러라. 벧엘에 머물러라. 길갈에 머물러라’ 할 때 엘리야가 진짜 머무르라고 하는 의미냐, 그 말씀 안에는 ‘나를 따라 오너라’ 하는 그게 들어 있느냐? 따라오라는 것이다. 그 말씀에서 그 소리가 들리느냐?


또 다윗이 피신을 하면서 열 후궁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라’ 하는 게 따라오라는 거냐, 머물라는 거냐? 따라오라는 거다. 그걸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의 귀로는 들리지 않으나 영의 감각성이라야 들을 수 있는 것, 그 은밀한 소리를 들어라.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배가 고파도 가야 한다. 가다가 넘어져도, 십자가에 달려 죽어도 가야 한다’ 하는 그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조건을 견주어 봐서 조건이 좋으면 그 쪽으로 가는 마음들이 있다. 거의가 속고 있다. 조건을 보고 따라가는 것.


지금 제자들에게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쳐주는 그게 급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따라가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부지런히 보고 듣고 깨달아야 할 것이었다. 말하자면 날개도 안 났는데 날려고 하면 되겠느냐? 젖 먹는 것부터 배우고, 그 다음에 기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에 앉고 서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에 걷는 것 뛰는 것 높이 나는 것 사냥하는 것을 배우고, 사람은 단계가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본질을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안다고 한다면 전부는 거짓말이다. 안 된다. 일이 안 된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사람이 안 된다.


오늘날 인간창조의 목적인 온전한 구원의 목적도 모른 채 병자 고치고 귀신 쫓겠다고 하는 패역한 족속들이 많다. 이런 자들이 얼마나 잘 보이는지 눈을 감고도 보인다. 아주 발에 밟힌다. 그렇게 하는 본인 자신들도 귀신이 들렸구나.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어디로? 주님 앞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 앞에, 구원 앞에 데려오라. 데려오니까 더 발작을 한다. 왜 발작을 할까? 그러니까 발작을 한다는 것은 귀신이 안 나가겠다고 하는 건지, 나가겠다고 하는 건지? 발작을 하니까 사람들도 의아하게 쳐다보게 된다.


예수님 앞에서 귀신이 안 나가려는 그 순간의 상태가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게 한다. 이게 귀신의 마지막 발악이다. 이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심히 걱정스런 장면이다. 그러니 아이의 아버지가 얼마나 눈앞이 캄캄할까?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 앞에는 속일 수가 없다. 못 속인다.


21절-23절: ‘언제부터 귀신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녔느냐?’ ‘어릴 때부터였습니다. 귀신이 아이에게 들어가기만 하면 불이 보이면 불에 뛰어 들어가고, 물이 보이면 물에 풍덩 뛰어 들어가고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니 항상 손을 잡고 다녀야 한다.


이 아이가 10세 안팎으로 추축이 되는데, 여기에서 어린아이를 등용시키는 것은 나이가 어른이라도 그 믿음의 수준이 낮으면 그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참 위태롭다. 그런 사람은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다녀야 하듯이 항상 마음을 써야 한다. 마음을 못 놓는다.


창조의 목적으로 보면 자식에게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라고 했는데 아이가 귀신에게 노출된 것을 보면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성경을 안 가르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정서적으로 잘 잡아줘야 하는데 그냥 뒀다는 말도 된다.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를 정서적으로 키우지 못하고 자기 새끼만 귀여운 줄 알고 오냐 오냐 해서 공동의식이나 이웃을 생각하는 면을 바로 잡지 못하면 커서는 어떻게 될까?


청년들의 언행심사를 가만 보면 그건 나오는 거다. ‘아, 부모들이 어떻게 간섭을 하고 있구나’ 이게 나오게 돼 있다. 우리는 어린아기가 하는 걸 보고 그 부모를 보는 거다. 어린아이 때부터 잡지 못하면 크면 클수록 부모 눈에 피눈물을 뺀다. 사회적으로도 봐라.


이를테면 자기 자식이 잘못했는데도 남의 자식만 미워하고 자기 자식 편만 들고,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을 때리면 잘한다는 식으로 보고 웃고 있고 말릴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식이 조금 얻어맞으면 자기 자식을 때린 그 아이를 때리며 욕을 하고,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을 왈칵 밀어 넘어뜨리거나 남의 아이의 볼을 물거나 할켜서 피가 나도 약값을 주는 일도 없고, 피가 나는 아이의 엄마가 한 마디 하면 ‘애들이 노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자기 애가 남의 애에게 물려서 오면 자식교육 잘못 시켰다고 노발대발 하며 이웃 간에 원수가 되고. 문제의 발단은 자기 자식 귀한 줄만 알아서 야단도 안 치고 키워서 생긴 것인데도 그러고 있다.


자기 것은 감추고 남의 것을 빼앗아 노는 아이, 쌍스런 욕도 잘하고, 성질이 났다 하면 자기 머리를 벽에 들이박고, 악을 쓰고 울고, 책상 위에 있는 거 다 팽개치고, 밥 먹을 때 자기 밥그릇 작다고 숫가락 내던지고, 늘 다른 아이들과 싸워서 얼굴에는 항상 상처가 머물 날이 없고, 심통이 두 볼에 더덕더덕 붙었고. 아이가 그렇게만 큰다면 그 아이의 장래가 훌륭할 것이라고 장담이 되겠느냐? 귀신이 잡아채가기 쉽겠느냐, 곱게 곱게 잘 자라겠느냐?


자식 교육 이전에 부모부터 하나님 말씀이 실천돼야 되겠고, 사회 이웃 부모들이 아이들의 본이 돼야 되겠고, 특별히 교회 인도자들은 구원에 대한 교육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간질병자를 보면 길을 가다가 간질병이 오면 그 자리에 넘어져서 이게 흙밭인지 돌밭인지도 모르고 구르고, 검은 눈동자는 사라지고 양쪽 눈동자가 하얗게 되고, 입에서는 거품이 나오고, 손도 몸도 비틀어져서 버둥거리고, 그 때마다 깎이고 찢기고 해서 피가 계속 나오고 하지 본문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이나 불속에 뛰어드는 것은 못 봤다. 그리고 성경에 보니까 귀신만 들면 그런다고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령’의 원문글씨를 보면 성령도 귀신도 같은 글씨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귀신이 성령인체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성령인지 귀신인지 잘 분별하라고 지금 귀신들린 아이의 짓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이 귀신의 사역인지 성령의 사역인지 구별 분별하라고 간질 하는 아이를 등용시키는 거다. 그러니까 성령이 아닌 귀신들의 장난이 교회 안에 많구나.


계:에서도 교회를 귀신의 집이라고 한다. 음녀, 큰 성 바벨론, 귀신의 집이라. 성령의 눈을 가지고 보면, 진리이치의 눈을 가지고 신앙의 성격 성질 성분적으로 본질을 기준해서 보면 이건 나타나는 거다. 교회들의 운동이 어떤 영의 힘을 얻어서 그 운동이 나오는 건지 이게 나온다. 성경이 아니면 모른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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