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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중에 누가 뵈뵈인가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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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에 누가 뵈뵈인가
롬16:1-2

바울에게 있어 로마 교회는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파격하고 싶은 모든 것의 총합이 로마였기 때문입니다. 터키의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한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를 향했던 것은 아테네라는 당시의 주류 시스템이 갖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에 도착한 바울은 아테네를 바라보며 분노하면서 대중이 눈 뜰 것을 호소했습니다(행17:16). 그러나 바울의 삶과 사상이 지향하는 마지막은 로마였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지만, 바울이 지닌 변혁 사상의 최종적인 도착지이기 때문에 로마서에 사상의 진수를 펼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로마서의 맨 마지막 장인 16장에서는 당시 세계 권력의 중심이었던 로마교회에 자기의 사상과 방향성을 대신할 최측근 28명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그 중에 가장 맨 앞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뵈뵈]라는 여인입니다.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다수의 여인들을 예수운동 혹은 바울사상의 진성그룹으로 로마 교회에 천거한다는 거, 그런 중에서도 [뵈뵈]라는 여인을 수석대표로 보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로마는 아테네나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라는 도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도시입니다. 지중해 세계의 모든 권력, 사상, 종교, 정치체제가 구동되는 곳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의 종로쯤에 해당되는 교회에 바울이 사람을 천거하는데 그의 여러 제자 그룹 중에 있던 어떤 남자도 아니고 여자 [뵈뵈]를 천거하고 있는 겁니다.

이 뵈뵈라는 여인은 지금의 그리스 고린도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겐그리아라는 항구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참 아름다운 동네였습니다. 서기 1세기에 고린도는 동서를 잇는 무역의 교통요지라서 수많은 상인들과 그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상업이 발달했던 도시였습니다. 뱃사람들을 상대하는 몸을 파는 여자도 무수히 많았던, 지금도 고린도운하가 있어서 유럽의 위아래를 잇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고린도 겐그리아의 뵈뵈를 들으며 오늘 설교를 생각했습니다. 로마교회에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대표인물로 뵈뵈를 추천하는 바울의 심정도 생각했습니다. 나도 이런 사람이 있는가, 내 사상과 신앙을 어떤 도시의 누구에게 대표로 내 세울 그런 인물이, 여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롬16장에 28명의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저 안부를 전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뵈뵈만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추천을 하고 있습니다. 경력에서나 능력에서, 그리고 로마교회의 이미지에 있어서 바울이 가장 자신 있게 천거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여러 힘든 일들이 있지만 그 중에 사람을 천거하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중매를 서는 일도 그렇지만, 교회에 목사를 소개 하는 일, 건물을 짓거나 수리를 할 때 그 적임자를 추천하는 일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자신을 대신할 사람, 그것도 여자를 자신의 대리자로 천거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뵈뵈를 로마교회에 그의 수석대표로 천거하고 있는지 봅시다. 그녀는 앞서 말씀드린 고린도에서 멀지 않은 겐그리아라는 항구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디아노콘’이라고 했는데 이는 디모데전서에서는 감독 밑의 집사와 같은 뜻이지만 마가복음에선 예수의 제자를 일컬을 때 이 용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거의 ‘예수의 제자’라는 개념으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바울의 제자였던 겁니다. 제자라 할 만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냥 따라다니면서 믿는 사람정도가 아닙니다. 여자였지만 예수의 제자였고 바울의 제자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녀가 하는 일은 ‘프로스타티스’라 했는데 이는 사람들의 생계나 삶의 가치 등을 책임지는 가장과 같은 일을 할 때 쓰는 언어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의 안팎살림과 구성원의 생계까지도 뵈뵈라는 여인의 삶의 범주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의 지도자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아니, 당시의 지도자는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뵈뵈를 가장 신뢰하는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보았던 게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 당시에 여자는 그저 집안에만 존재하는, 집 안에서만 그의 삶의 거처와 존재가치를 결정했습니다. 디모데전서가 그걸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울도 이런 사회적 솬습과 윤리에 갈등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갈등은 윤리적인 갈등이었다기보다는 선교적, 하나님 나라 운동의 현실에 대한 갈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갈등의 사회상황 가운데서도 뵈뵈라는 여자는 이런 사회적인 폐습을 거스르며 우주와 세계의 변혁을 소망하는 예수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뵈뵈 이후 수 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요즘 여자들은 뭘 위해 사나요? 다는 아니겠지만 일반적인 사회현상으로 볼 때 여자들의 삶이란 자기 몸뚱이 하나 상표삼아 잘 먹고 잘사는 일에 존재의 가치를 두고 있다고 봐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미 2천 년 전에 완고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들의 성적 도구이며 노동인력의 대상으로만 취급되던 세상에서 그것과는 딴판으로 살았던 여자가 바로 뵈뵈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이 가부장적인 사회의 틀을 깨고, 여성성을 넘어서는 인간으로 발돋움 할 때 얼마나 많이 고통을 당하고 방해를 받았을 것인가는 불 보듯 뻔합니다. 물론 남자만이 그의 장벽은 아니었을 겁니다.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뒤틀린 모성의 미학은 여성의 가장 가혹한 적이 여자 자신이었을 겁니다. 뵈뵈의 삶은 이런 편견과 금기 그리고 억제와 자기모순의 장벽을 극복해야 했을 겁니다. 어머니와 딸, 여성과 다른 여성의 히스테리적인 갈등과 증오 그래서 예수도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에게 가족과의 단절의 칼을 던져 주었던 것이 아닙니까?

가부장적 체제의 규칙에 순응하면서, 일탈조차도 그 체계의 더욱 견고함을 위해 기여하는 고위층 여인네들의 꿈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화려한 고소비를 취미 삼는 삶 말입니다. 그러가 하면 자신의 육체를 상품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적극적인 생산자가 되어버린 여자, 곧 주체로 등장한 미인 대회 같은 여인네들, 그러나 결국은 가부장적 성 억압의 질서 속에 짓눌린 남자들의 관음증 해방을 위해 봉사할 뿐인 섹시한 여성 육체들의 꿈이 있습니다. 고위층의 권력을 가진 남자의 아내가 아닌 여자들이 두 번째 대안으로 꾸는 꿈입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이런 꿈을 존재의 희망으로 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뵈뵈의 꿈이 있습니다. 그녀의 꿈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꿈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더 광활한 삶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세 가지 꿈을 꾸는 세 부류의 사람을 봅니다. 물론 우리가 꿔야 하는 꿈이 뭔지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중에 누가, 남자나 여자나 누가 과연 뵈뵈 같은 꿈을 꾸고 있을까요? 그 사람이 바로 성암교회의 지도자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어디고 천거할만한 사람입니다. 목사로써 말씀으로 한 해 농사를 지었는데, 바울이 신뢰했던 뵈뵈처럼, 허목사가 제자라 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그리스의 고린도 겐그리아 항구에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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