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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 궁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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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35절-37절: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뭇 사람을 섬기려면 뭇 사람의 머리가 되면 섬길 수 있는 거냐?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뭇 사람을 섬길 수가 있다. 이건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해석을 할 수가 없다.


뭘 어떻게 하는 게 섬기는 거냐? 세상 일반적 섬김이 기독교의 섬김과 같으냐? 쉽게 말하면 일반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과,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을 섬기는 것과 같으냐?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왔느냐, 섬김을 받으려고 왔느냐? 섬기는 자로. 그러면 주님이 누구의 일에 누구를 섬기느냐? 주님이 인간 되어 오심은 누구의 것을 주려고 왔느냐? 하나님 것. 이치를 잘 따져라. 이치를 못 따지면 거짓된 사람, 거짓된 신앙, 거짓된 종이 된다. 이단자가 된다. 거짓 종이나 이단자가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느냐? 해석상 틀어지면 거짓 종이 돼버린다.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의 것을 주시려고, 나와 잘 통하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무슨 이상한 모습으로 왔다면 내가 어떻게 그 분께 가까이 갈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인간 되어 오심은 인간 나에게 하늘의 것을 주려고 오셨는데 이 분이 우리를 섬김은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을 주는 그 섬김이냐, 하나님의 것을 주시는 면으로 섬김이냐? 하나님의 것을 주시는 면에서 섬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예수님을 따르며 사랑한다면 그 분의 말씀을 잘 영접하는 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예수님의 속성을 성품을 예수님의 실상을 닮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이 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잘 입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이 하나님의 성품을 잘 입어야 내가 어딜 가도 나에게서 하나님의 속성이 나오고 성격이나 성질이나 지혜나 지식이나 신적인 도덕성이 나오게 되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에서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느냐?


예수님께서 배고프고 굶고 하는 일반 가난한 자들을 섬기러 오셨느냐?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을 갖고 와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당신의 백성들의 영적인 면을 고치고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키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육신의 병이 안 들었으면 영적인 면에 부족하고 비뚤어지고 꼬부라지고 생각이 넓지 못한 그걸 자기가 아느냐, 모르느냐?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영접하고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온전해지는 것이다. 성경이 기록된 것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성령님의 감화로 기록됐다고 하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 믿는 자기는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예수님처럼 100% 온전은 안 된다. 그러면 안 되니 그냥 내버려두느냐? 아니다. 힘쓰고 애써서 예수님처럼 온전해지라고 존재와 사건과 환경을 몰아붙이는 거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그렇다.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믿으려면 생각이 똑바로 박혀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건 인간 자기가 하나님의 속 성품을 닮는 게 영광이다. 그래야 그 자가 어디에 가도 언행심사가 예수님의 냄새가 나고 향기가 나는 거다. 그게 안 나오면 그게 무슨 영광이냐?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자꾸 돈을 가지고 일을 어떻게 크게 만들면 그걸 영광이라고 하고 있다. 이 세상 것은 어떻게 만들었다고 해도 다 불에 타진다. 이처럼 불에 타지는 것은 영광이 아니다. 그런데 돈을 가지고 영광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것을 우리에게 줄 때 우리의 모든 이해타산 평가가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예수 믿으면서 세상의 이해타산 평가를 내리고 있다면, 자기의 소원 목적을 그렇게 내리고 있다면 이건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과 성품이 바꾸어지는 거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면 사람이 바뀌어야지, 생각이 바뀌어야지, 소원 목적이 바뀌어야지. 그런데 백날 믿어도 안 믿는 사람과 속성이 소원 목적이 똑같다면 이게 어떻게 예수를 믿은 거냐? 세례를 어떻게 받은 거냐?


세례가 무엇이냐? ‘세상 소원 목적으로 갖던 것을 하나님의 소원 목적으로, 천국의 소원 목적을 살겠습니다’ 하는 의식이다. 세례의 의식 속에 그 정신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의를 내 속에 이루어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이게 없이 예수를 믿고 있다면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의식세례를 받았어도 정신 사상 마음 소원 목적 등 모든 것이 거듭난 게 없다.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지만 기도를 어떻게 하겠느냐? 자기의 세상적인 목적을 이뤄달라고 자꾸 기도를 하게 된다. 그게 무슨 기도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주리라’ 라고 했는데 덤으로 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기도를 하고 있으니 이게 어떻게 사람이 바꿔진 것이고, 이게 어떻게 옳은 기도냐? 이건 이방인들의 기도다. 안 믿는 사람들의 기도다. 중들이 하는 기도고 점쟁이들이 하는 기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불쌍한 거지를 찾아서 밥 먹여주려고 다녔느냐? 뭐라고 했느냐? 예수님이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먹인 것이 거지에게 떡을 먹이는 거냐? 그 후에 바다를 건너가시니 육지로 해서 먼저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뭐라고 하셨느냐?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고 날 찾는 게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르니까 또 날 찾아왔느냐’ 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예수님의 일이라 그 말이냐?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더라. 하늘나라 말씀을 전하시더라’ 라고 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무리 어렵고 배가 고파도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는 하나도 구하지 않았다. 우물가에 가서 물을 먹었느냐? 안 먹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이 끝이 되며.’ 뭇 사람의 끝이 뭐냐? 줄 설 때 맨 뒤에 가서 서라는 거냐? 자기가 배웠던 못 배웠던 사람은 영육 결합체로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에 있다. 그 인격과 성품이 어느 것을 받아 가졌느냐? 유교 것이냐? 불교 것이냐? 이방사상이냐?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졌느냐? 아무 것도 안 배웠으면 세상 물욕심만 가득 들어있다. 물욕심마저 없다면 이건 바보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참 많다. 아무리 학박사라도 일반적으로 교도소에 들어가기도 한다. 사람이 남은 속인다 할지라도 어떻게 자기 양심을 속이느냐? 얼마나 괴로울까?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많이 배웠던 못 배웠던, 많이 가졌던 적게 가졌던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 세상요소를 가지고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게 뭇 사람의 끝이 되는 거다. 집사든 장로든 목사든 세상 요소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자기 처지를 알고 자기 스스로 내려가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운동 천국복음의 구원운동에 수종들면 그 자는 커진다. 속성적으로 커지고, 영능의 실력적으로 커지고, 도덕성적으로 커지고, 영적 기능 지능 면에서 커진다. 머리가 된다. 섬기려 할 때는 바로 그런 일에 섬겨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예수님처럼 닮아갈 수 있는 곳이 네가 클 곳이니 그곳에서 네가 낮아져서 섬겨라. 거기서 섬기면 네가 커진다. 그런 곳에 성령님의 역사가 들어가는데 안 커지겠느냐? 속성적으로 커지고, 영적 기능 지능 면으로 커진다. 사람의 속사람이 커진다.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다 만든 분인데 하나님이 돈이 궁하시냐? 하나님께서 나의 물질을 안 써주시면 자기 마음이 안 기쁘다. 자기 것을 써주시니 기쁨이 들어간다. 은혜를 주시려니까 나의 것을 써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대접도 ‘내가 당신에게 은혜를 받자오니 나로 이것을 하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 아닌 말로 식당에 가더라도 주인이 손님에게 ‘물 드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그것도 안 묻고 주인이 제 마음대로 갖다 놓을 수 있느냐? 섬기려면 상대의 의사를 묻는다.


자기가 커지는 방법은 뭇 사람의 끝이 되라. 끝이 된다는 것은 세상 요소적인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없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더라’ 라고 했으니 그 일에 수종들면 천국의 일이 잘 되게 하는 일에 수종드는 것이니 그 잘됨이 나에게 들어가는 거다. 내가 영능의 실력적으로 천국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보면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목사 중에 누가 제일 크냐?’ 그런 말이나 하고, ‘어느 건물이 제일 크냐?’ 그런 말이나 한다. 우리 주님이 그런 걸 알고 싶어 하시느냐? ‘너는 그런 거 자랑 하지 말고 나처럼 닮아라’ 예수님은 그걸 원하신다.


자기가 커질 수 있는 곳이 어디냐? 신비주의? 사회주의? 구복주의? 그런 데서 섬기면 그런 식으로 자란다. 그게 천국복음이냐? 거기는 주님이 안 계신다. 성령님의 역사는 없다. 거룩한 성령님은 그런 비진리적인 곳에서는 역사를 안 하신다. 성령님의 역사는 성격이나 성질이나 성분 면에서 이질이면 그곳에서는 역사를 안 한다. 악령이 역사한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시요, 성령님 존재 자체가 영을 분별 구별하는 분이신데 사람의 생각과 정신을 왜 구별을 못하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이 뜻을 좀 더 쉽게 풀이를 하면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 예수님을 우리 인간 나에게 보내주셨고, 나는 이 예수님으로부터 천국복음의 교훈을 듣고 예수님처럼 그 속성 그 성품 그 능력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속성은 전부 천국의 것이다. 세상 것은 없다. 예수님의 그 속성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 사람은 키가 작은 어린아이처럼 낮아진 것과 같다.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면에서 아무 것도 모르면 모른다는 그 면이 낮아진 처지다. 무엇이든 잘 알면 남이 자꾸 추켜올리고 올라간다. 모르면 내려간다. 내려가는 수준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자신을 시인을 하느냐? 안 한다. 시인을 안 하는 것은 높이 오르고자 한다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는 것은 실력 것 올라가야 하는 건데 실력이 없는데도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명령도 하고 뭘 하려고 고 있으니 그런다고 해서 올라가지느냐?


인간 너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하나님의 지혜지식, 하나님의 선 사랑 거룩 진실, 하나님의 의와 주권 이런 것이 자기에게 없음을 시인하라. 예수 믿고 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이다. 교회의 교훈은 이걸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이 없는, 예수님의 것, 하늘의 것이 아닌 세상 것을 주는 교회가 있다. 이게 거짓 교회요 거짓 종이다.


바로 믿고자 하면 간판을 보지 말고 말씀을 듣고 구별을 하라. 사람이 뭘 배우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구별도 하고 분별도 하고 연구도 하고 이해타산도 따지며 손해를 안 볼 자로 살아라. 예수를 믿으려면 영원히 손해를 안 볼 자로 믿어라.


‘자신을 시인하고.’ 아무 것도 모르면 모르는 그 자는 낮아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자신임을 알고 자신을 낮추고 순종을 한다면 그는 어린아이를 영접한 셈이니 즉, 정신자세 마음자세가 배우고 깨닫는 어린아이처럼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았듯이 그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마음에 품으신다는 것이다. 이러면 그 다음에 구원의 실상이 자기 속에서 자라나게 된다.


구원의 실상이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되어진 것. 즉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자라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로, 하나님 다음에 너인데 네가 그 자리를 바로 찾아 들어갔구나.


창조의 순서가 ‘하나님-->인간-->물질’로 하나님 다음에 인간 자기인데, 오늘날 교회가 물질 밑으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일을 크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 하늘나라에는 더 좋은 게 많은데 그런 물질적인 게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인간이라면 자기 양심을 자기가 속일 수가 없다. 더더군다나 예수를 믿으면 자기 속에 무엇이 어느 정도 들었는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웬만하면 스스로 안다. 이처럼 자기를 안다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배우고 깨닫고자 하는 자세가 된 것이니 그 사람은 이제는 힘쓰는 만큼 자라나게 된다.


예수님의 인격 성품 이건 하나님의 것이니 내가 이 예수님을 닮으면 나는 하나님의 것으로 자라나게 되니 이렇게 되면 너를 인간으로 만든 원인 동기 목적 면에 딱 들어맞는 것이다.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안 믿는 사람은 순서를 말하자면 하나님은 없고 ‘물질-->인간’이다. 그러니까 늘 물질 밑에서 사는 거다. 물질을 하나님처럼 여기며 사는 거다. ‘그 물질이 있어야 내 행복이 되고 내 평안이 되고 그 물질이 내 앞길을 열어준다’ 하며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를 믿어도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물질-->인간 자기-->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종. 주님은 자기의 종’의 순서로 산다.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지고 ‘큰 예배당을 짓겠습니다. 부자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하며 늘 물질이 위로 가서 있다. 그래서 ‘그걸 이뤄지게 해 주옵소서. 그 일을 이루는데 내가 사명감을 맡았으니 하나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한다. 이건 신념적 신앙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없고 어떤 사역이 목적적으로 들어있는 이건 세상 속화된 신앙이요, 인본주이 신앙이요, 그게 비진리이고, 그런 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예수이름으로 예수를 위한다고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이치적으로 신앙의 질이 성분적으로 바로 꽂혀 들어가는 것은 안 믿는다. 이런 사람은 옳은 진리이치를 들으면 양심에서 뭔가 판단이 나는 것 같은데 자기의 사역목적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그걸 도로 밟아버린다. 이것이 성령 훼방 죄다.


성령 훼방 죄는 안 믿는 사람이 짓는 게 아니다. 이치적으로 말을 하면 ‘네 더러운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자’ 하는데 안 벗고 안 입으려고 한다. 입어야 사람이 바꿔져 들어갈 텐데 인격과 성품의 의의 옷을 안 입으려고 한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나가는 사람은 교회헌금을 가지고 자꾸 세상의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들어간다. 그런 사람을 위해 교회헌금을 쓰고, 목욕도 시켜주고, 그걸 아름다운 행위라고 한다. 속성은 안 되어 있는데 행동 활동으로 나타난 그것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보는 아름다운 것처럼 말을 한다.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게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다. 일반사람들보다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119 대원들이다. 이건 예수를 안 믿어도 일반적으로 참 좋은 일을 하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알아주고 천국의 상을 주느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고 있고, 성경을 일반적인 눈으로 해석을 하는 거다. 이렇게 되니 인간은 영과 육의 결합체인데 교인들의 영적 면은 깡그리 망하는 거다. 예수님이 ‘내가 한 말은 영이니라’ 하니까 다 도망을 갔다.


어린아이는 자라는 특성이 있다. 신체가 자라고, 그 다음에는 배우고 듣고 익히고 아는 면에서 자라고. 여기서 배우는 면에서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아는 면도 잘못된다. 가치판단 평가성 이해타산이 완전히 잘못된다. 이게 무서운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즉, 교훈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교훈에 대해서 구별을 하느냐? 안 한다. 사단 마귀가 구별을 못하게 한다. 즉 목사님들의 메시지 속에 흑과 백이, 사망과 생명이 갈라지지를 않는다 그 말이다. 메시지 자체가 구별이 없다 그 말이다.


‘복음의 빛’ 하면 모든 면에서 분별이 되는 거다. 빛은 밝히는 거다. 형체 모양 색깔을 다 밝힌다. 교훈으로 그렇게 들어가게 해서 자기로 하여금 선택을 바로 하게 해서 바로 믿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아는 면에서 가치판단 평가성 이해타산 전부는 잘못돼진다.


거짓된 이방종교적 지식은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목적관에서 볼 때 완전히 잘못돼 있다. 사람이 정신면에서 잘못되면 부모의 한탄이 된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에게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사람이 영원히 망한다.


배우고 깨닫는 면에서 ‘나는 다 안다. 더 배울 것이 없다’ 하는 자는 아는 면에서 어른이 돼 있기 때문에 어른이 된 자는 못 자란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부족하다.  나는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하면 이 사람은 아이다. 아이처럼 자랄 가능성이 있다.


‘나는 배울 것이 없다. 나는 다 안다’ 하는 사람은 아무리 어른이라도 평생 살아도 그 속에 알고 자라나는 성질이 없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리 어른이라도 그 속에 아이처럼 자람성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온전하게 자라는 자람성이 없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교훈을 영접하지 못한 자다. 백날 믿어도 예수님이 교훈을 영접하지 못했다. 천국복음을 못 만난 사람이다.


종교적 문화행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예수님을 전하고 믿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일에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니 인간창조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는 것은 없다. 너에게는 너를 존재케 한 제세기간의 삶의 목적이 있는데 너는 그 면은 없다. 이런 사람은 출생목적도 없어지고, 재세기간 동안에 나그네 생활한 그게 다 없어진다. 그러니까 무목적적인 사람이 된다. 고작 해봐야 밥 먹고 누린 것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자람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치의 말씀의 깨달음과, 종교적인 행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공부를 해서 아는 것과, 일을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학생들 입장에서 학생의 신분은 배우고 깨닫고 알아야 할 시기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자기가 세상을 뜰 때까지 하나님의 성품으로 채워 넣느니 만큼 자기를 다스리고, 자기 주위를 다스려 나가고, 머리가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뜻을 영접한 자는 예수님의 성품으로 자라고, 따라서 하나님의 온전한 실상적 성품과 인격으로 자란다.


진리와 생명으로 자체화 된 영능의 실력은 뭇 사람의 끝이 되어서 뭇 사람을 섬긴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도를 여러 성도들과 천군천사들 앞에서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한 가운데 세우시고 존귀케 해 주실 것이다. 35절-37절에서 말씀하신 방법 말고 첫째가 되는 다른 방법이 있느냐? 없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했는데, 어린아이를 분석해 보면 본문의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보이는 어린아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뜻을 알게 해 주려니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다. 뭐가 어린아이냐? 자라는 것. 어린아이는 자람성이 특징이다. 어른에게까지 자라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는 순종을 말한다고 한다. 그것보다는 어린아이라 하면 자라는 특성을 염두에 두고 깨달아라. 어른은 더는 자라지 않고 꼬부라진다. ‘나는 어른이다’ 하면 이 사람은 자랄 게 없다. 예수 믿으면서 ‘나는 다 알아’ 하면 이 사람은 자랄 게 없다. 왜? 어른이 다 돼 있으니까. ‘나는 어른이다’ 하는 사람 속에는  성령님이 역사가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와 같다. 자라나야 할 우리다. 누구처럼? 예수님으로 자라야 한다. 예수님의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자라야 한다. 그래서 듣고 배우고 깨닫고 기도하고 실천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게 하나님의 영광이다. ‘네가 누굴 닮았느냐?’ 할 때 ‘아버지처럼 닮았습니다’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 사람은 어디를 가도 말에서 행동에서 예수냄새를 남기고. ‘아, 예수를 믿으려면 저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하게 된다. 속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그러니까 그 정신 그 뜻을 자기가 영접하면, 그 마음을 자기 마음에 심으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다. 자기 속에서 예수님으로 자란다 그 말이다. 속사람이 예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의 속성으로 자란다는 그 말이다. 이런 사람은 도덕성이 반듯해지고, 어디에 가서 실없는 소리를 안 하고,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 냄새를 풍기게 된다. 이게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예수를 영접한 거냐? 아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의 속성이 텅텅 비어 있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잘 익은 곡식처럼 예수님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자기 속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언행심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나를 영접함이요’ 라고 한 다음에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누구까지 영접한 거냐? 하나님까지 들어가 있다.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한 그 정신 즉, 예수님처럼 자라게 해 주는 그런 곳에서 수종을 들어야 자기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어디에 보면 제자들보고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다. 이게 지옥 간다는 말이냐? 지옥 간다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는 이단자가 되는 거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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