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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를 사랑으로 돌리시려고 ...

  • 서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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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성경말씀: 말라기 4장 4절-6절

설교제목: 저주를 사랑으로 돌리시려고 ...


옛날 어느 대장간에 아버지와 외동 아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 외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지만 손버릇이 나빴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빵집을 지나가다가 맛있는 빵 냄새에 끌려 빵집 앞으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아들은 돈이 없어서 침만 꿀꺽 삼키는데 마침 주인이 자리를 비운 것을 보고 아들은 얼른 빵을 하나 집어 들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빵집 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습니다. 얼마 못가서 아들은 잡혔습니다. “네 이놈, 네 집이 어디냐? 가자! 요즘 자주 빵이 없어진다고 했더니 바로 네 놈 짓이었구나! 가자!” 이렇게 아들을 대장장이 아버지에게 끌고 온 빵집 주인은 큰소리를 칩니다. “당신 아들이 내 빵을 훔쳐 먹었으니 그동안 잃어버린 빵 값을 모두 물어내요!” “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빵 값을 모두 물어 주고 나서 아들을 조용히 부릅니다. “아들아!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다시는 도둑질 하지 말거라” 이렇게 신신 당부를 합니다. 그러나 이 후에도 아들은 손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도둑질하다가 붙들려 와서 아버지가 다 물어주고 또 물어주는 일이 계속됩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아들을 부릅니다. “다시 도둑질을 하면 손을 쓰지 못하게 할테니 제발 나쁜 짓을 하지 말거라!” 경고를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이 순대 집을 지나는데 맛있는 순대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아들은 배가 고팠지만 그냥 지나치려는데 맛있는 순대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눈치를 보다가 순대를 슬쩍 훔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얼마 못가서 주인에게 붙들렸고 다시 아버지 앞에 끌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순대 값을 모두 물어주고 난 후에 아들을 부릅니다. “아들아! 다시 도둑질하면 손을 못 쓰게 한다고 했지! 그 손 이리 내거라” “안돼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는 화덕에서 벌겋게 달구어진 커다란 못을 꺼냈습니다. “더 이상은 안 돼. 그 도둑질하는 나쁜 손을 이리내.”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강제로 펴서 작업대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아들의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살이 타는 소리가 납니다. 아들이 깜짝 놀라서 자기 손을 보니까 자기 손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손에는 벌겋게 달구어진 커다란 못이 박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용히 얘기를 합니다. “아들아! 이 아버지가 네 대신 벌을 받았으니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거라. 알았니!”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아버지의 손에는 커다란 못이 박힌 채 피가 뚝! 뚝! 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구약 성경의 마지막 부분으로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다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한 책입니다. 포로에서 해방 되어 고국에 돌아온 백성들에게 말라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요?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고생하게 내버려 두고서 사랑한다구요? 어떻게 사랑하셨는데요? 증거를 대 보세요?이렇게 따지고 대듭니다. 그러면서 예배드리는 것조차 귀찮아합니다. 점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담한 심정으로 오늘 본문을 끝으로 더 이상 400년간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구약의 문이 그렇게 닫혔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진정한 참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문 4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여기서 모세에게 명한 법은 크게 말하면 모세 오경을 말하는 것이고, 좁게 말하면 십계명을 말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최소한의 지켜야 할 것을 명령하신 법입니다. 십계명은 누구를 위한 법이었을까요? 누구를 위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이 십계명은 사람을 법에 얽매게 해서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십계명을 기록한 출애굽기 20장 6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구약의 문이 닫히는 이 시점에서도 이 율법을 기억하라고 하셨을까요? 이 율법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계약이 아직 유효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버렸을지라도 아직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이라도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입니다.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마지막 책의 문이 거의 닫히는 이 시점에서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그 말씀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비록 백성들이 범죄 하였을지라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만나게 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힘든 때 일수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 보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며, 형통의 비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5절에서 6절 전반부를 다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그날을 말합니다. 심판하시기 전에 심판을 피할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하여 엘리야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누구일까요? 엘리야는 열왕기 상 18장에 보면 이방 신인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 선지자였습니다. 다시 그 선지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병거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선지자를 다시 보내시겠다는 것은 좀 이상하죠?

이 엘리야가 신약성경에 보면 다시 오긴 왔는데 누구였을까요? 마태복음 11장 14절에 보면 세례요한을 말합니다. 엘리야 즉, 세례요한의 역할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보면 ‘슈브’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돌이키다.’ ‘돌아가다.’ ‘회개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죄악으로 가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길에서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에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3장 9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외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찍혀서 불에 던진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불에 던져질 패역한 백성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돌아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마지막 종말의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하나님 아닌 물질과 명예를 더 섬기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하나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세상의 만족을 쫒지는 않으셨는지요?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에 있지 않으신지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만족했다면 지금이라도 그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돌이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6절 후반부를 다 함께 읽겠습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저주로 그 땅을 치신다고 하십니다. 이 ‘저주’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구약성경의 마지막 단어인데 ‘헤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헤렘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 갈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여호수아에게 하신 명령으로 그 곳에 살던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실 때 쓰인 단어입니다. 헤렘이라는 의미는 그 곳에 살던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모든 짐승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이고 그곳에서 쓰이던 가재도구까지 몽땅 불태우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은 다 전멸시키고 물건이라는 것은 다 못 쓰게 불태우는 무시무시한 심판을 말합니다.

헤렘의 두 번째 의미는 ‘저주할 목적으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흠 없는 제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야할 죄인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헤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인 세례요한이 와서 마음을 돌이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쾌락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만족하는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 올 리가 없습니다.


(핵심)

이제 패역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400년간 참고 참으셨던 그 무시무시한 심판이 이제 시작 됩니다. 패역한 백성들에게 내려야할 심판의 칼날, 하나님께서 뽑아 드신 그 심판의 도구는 무엇이었을까요? 패역한 백성, 죽어 마땅한 백성들에게 내려진 무시무시한 심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질 심판의 도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이 땅에 오셔서 죄악으로 가득한 인간들, 회개하지도 않고 뻔뻔스러운 인간들을 저주하고 모조리 쓸어 버리셔야 마땅합니다. 생명이라는 생명은 깡그리 죽이셔야 합니다.


이제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저주를 행하셨나요? 무시무시한 심판이 시작되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저주로 우리를 쓸어버리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마땅히 저주받아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예수님을 저주의 제물로 죽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상을 섬긴 것은 우리였고, 하나님을 떠난 것도 우리였고, 돌아서지 않은 것도 우리였고, 하나님을 버린 것도 우리였습니다. 마땅히 죽어할 자들은 우리들인데 그런 우리를 죽이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고통스런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왜, 죄인인 우리를 죽이시지 않았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를 저주로 쓸어버리시지 않으시고 왜 예수님을 죽이셔야 했을까요? 왜요? 왜 우리를 저주로 심판하시지 않았을까요? 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차마 우리를 죽이시지 못하셨습니다. 차라리, 차라리 자기 아들을 죽이실망정 우리를 너무너무,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차마 우리를 죽일 수가 없으셨습니다. 죽을 죄를 많이 지었지만, 더럽지만, 때가 많이 묻었지만, 그럴지라도 더럽다고 하지 않으시고, 때 묻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죄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확증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차마 너희를 죽일 수가 없구나!’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렇게 흠 없는 예수님께서 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죽지 않고 오늘 거룩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잘나서도 아니고 우리 죄가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간 심판과 저주를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헤렘’하실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저주의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악에 빠진 자녀들이 먼저 돌아 서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돌아서서 그 자녀들의 죄를 씻어 주시고, 안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로 돌아섰으니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돌아갑시다. 이제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이처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실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겠습니다. 죄로 인하여 마땅히 죽어야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 밖에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죽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사랑을 마음속에 깊이 명심하고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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