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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므온의 찬송

  • 신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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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8강) 시므온의 찬송
본문 : 눅2:21-39  
2012-04-29

 

<본문>


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설교>

 

◉ 정결예식 ◉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법, 즉 유대인의 율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되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이 예식은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출 13:2)는 규례에 따라 아기 예수를 주께 드리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는 출산한 여인을 부정한 자로 규정하면서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어린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한 사람은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으라는 규례대로 마리아의 정결예식을 위한 것입니다(레 12:1-8). 이처럼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게 된 것은 유대인의 규례를 성실히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나중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유대인이 지키는 규례 문제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장로들과 같은 사람들과 빈번히 충돌을 했습니다. 안식일 문제나 음식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등 여러 가지의 문제로 인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규례를 따르지 않는 자로 비춰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대인의 규례에 매이지 않으셨고 오히려 유대인의 규례대로 따르는 자신들을 정결한 자로 여기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결의식과는 상관없는 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누가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으로 가서 정결예식을 드리는 것을 언급하고 있느냐는 것이 의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모세의 법을 따르기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큼 굳이 그 같은 내용을 기록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의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므온이 정결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오게 된 아기 예수를 만나고 예수님에 대한 그의 고백과 찬양을 통해서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본질과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유대인과 시므온의 메시아 ◉

 

  25절에 보면 시므온에 대해 말하기를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오실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은 유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의식입니다. 때문에 단지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해서 의롭고 경건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계신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하며 성령이 그 위에 계신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시는 메시아를 기다렸다면 그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대개의 유대인이 소망하고 기다리는 메시아와는 다른 메시아였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이 기대하며 기다렸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해방자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다윗 왕국의 영광이 재건될 것을 꿈꿨습니다. 때문에 지금은 비록 로마의 속국이 되어서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지만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메시아가 오셔서 그동안의 모든 고통에서 건져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유대인이 이 같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같은 사실은 시므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지만 그가 기다린 위로는 이스라엘의 영광의 회복과 함께 이스라엘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짐으로 누리는 위로가 아니라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지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한 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기다린 것과 유대교의 전통적 메시아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기다린 것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은 틀림없이 자신들을 현재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즉 그들의 기다림의 목표는 지상천국이었지만 시므온은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기에 그가 목표한 것은 이 세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그 위에 함께 한 시므온의 기다림이라면 오늘날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 목표를 두지 않고 세상의 것을 절대화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으로 들어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위해 예수를 데리고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시므온의 구원관 ◉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절)라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신다는 것은 평안히 죽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남으로 주의 구원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죽음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시므온은 이 구원을 만민 앞에 예비한 것으로 말하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찬송합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전통적인 구원관과 다른 것입니다.

 

 말한 대로 유대인에게는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또한 선민인 자신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뿐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메시아 역시 선민인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것이지 이방인을 위한 메시아는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의 입에서 고백되는 메시아의 구원은 유대인을 넘어선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며, 메시아 또한 이방인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시므온의 놀라운 구원관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찾은 것은 그들 역시 유대인으로써 예수님을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잉태되어 오신 분으로 여겼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마리아의 찬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4-55절을 보면 마리아의 찬송에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로 여기며 기뻐하였지만 아브라함과 그 자손, 즉 유대인을 위한 구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율법을 가졌다는 차별을 넘어선 만인 앞에 예비된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므온이 이 같은 구원을 단지 갓난아이에 지나지 않은 예수에게서 보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하지만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아기 예수에게서 참된 구원을 보게 된 것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또한 예수님에게서 참된 구원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평안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곧 성령의 감동임을 말해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시므온은 이 같은 구원의 세계를 기다렸기에 예수님을 만남으로 평안히 죽을 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위로는 세상을 향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시므온이 세상을 향하고 세상을 목표로 한 구원을 원하며 그것을 위로로 기다렸다면 아기 예수를 구주로 알아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설령 알아보았다고 해도 평안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므온의 평안은 아기 예수를 만남으로 그의 마음이 주의 구원으로 가득 채워졌음을 의미합니다. 남들은 세상을 목표로 하며 살기에 오직 세상의 것으로만 그 마음이 채워질 수 있지만, 시므온은 이방인까지 어둠에서 구출하시는 빛으로 오신 구주를 기다렸기에 주를 만남으로 그 마음이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시므온의 평안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그리스도에게서 어떤 구원과 위로를 기다립니까? 혹 유대인과 같은 구원과 위로를 기다린다면 아무리 예수를 말하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예수님으로 인한 평안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위로 받고자 하는, 세상을 향하고 목표로 한 마음이기에 우리를 어둠에서 건지신 예수님의 구원으로는 평안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의 세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시므온과 유대인의 다른 점은 유대인은 자신들이 원하는 구원의 세계를 기다렸지만 시므온은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이루실 구원의 세계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둠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남이 평안이 된 것입니다.

 

 가령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자신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자기 세계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으로는 예수를 만난다고 해도 시므온과 같은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의 빛으로 예수님으로 자신의 기다림이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가 주는 평안과도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채우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다림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채우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이 곧 채워짐이고 충만입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를 만난 것만으로도 평안히 죽을 수 있다는 고백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 시므온의 예수 ◉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는지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34-35절)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에게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주가 되는 분입니다. 또한 비방을 받게 되는 표적이 되시는 분이고 칼이 되어서 우리 마음을 찌르듯 하여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만남이 평안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평안은 내가 원하는 나의 세상을 마음에 두고 있는 상태에서는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세계가 우리의 소망이 되고 기다림이 되어야 예수님으로 인해 경험할 수 있는 평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이 한 사람 또 있습니다. 그가 안나라고 하는 과부 선지자입니다. 이 사람은 남편과 결혼하여 겨우 7년 살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84세가 될 때까지 혼자 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같은 인생이 불쌍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부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에 대하여 말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안나 역시도 예수님에 대해 알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불쌍하게 보이나 전혀 불쌍하지 않는 것이 안나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시므온은 평안을 안나는 감사함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대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어떤 축복을 경험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원하는 어떤 세상을 마음에 두고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기대한다면 우린 예수님에게서 평안과 감사라는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은 이방의 빛, 어둠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뤄주신 세계입니다. 이 세계가 자신의 어둠을 알고 그리스도의 속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충만이며 이 충만으로 인해서 평안과 감사가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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