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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족보

  • 신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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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제목 : (13강) 예수님의 족보 
본문 : 눅3:23-38  
2012-06-03
 

 <본문>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 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 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 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 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 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 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 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 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설교>

 

◉ 마태의 족보와 누가의 족보 ◉


오늘 우리는 아주 따분하고도 까다로운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족보인데 이 족보는 아무리 봐도 별로 은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인간의 족보처럼 사람의 이름만 계속 나열되고 있기에 따분할 뿐이고 이처럼 사람의 이름만 나열되고 있는 그 속에 무슨 은혜가 있겠는가 생각되니 흥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누가가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따분할 것 같은 예수님의 족보에도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까다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은혜 될 것이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족보 또한 우리에게 복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느 부분 하나도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오늘 본문 누가복음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마태가 말하는 족보와 비교하여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나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가 서로 족보를 언급하며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또한 마태의 족보는 보편적인 족보 형식인 하향식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향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양식의 족보는 누구의 후손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남으로써 예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노선을 따라 오신 분이며 다윗 자손으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임을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연결되고 다윗은 솔로몬과 유대의 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족보는 전혀 다릅니다. 일단 마태는 생략하고 있는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의 족보를 보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혈통을 따라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도 마태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 이후부터 그 노선이 마태복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마태는 다윗 이후 솔로몬으로 이어지지만 누가는 ‘나단 위는 다윗’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이 아니라 단지 다윗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는 나단과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하 5:14절을 보면 나단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한 아들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지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다윗 사이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이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족보가 서로 다른 또 하나는 마태의 족보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마 1:16)라는 내용을 보면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 23절에서는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함으로써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헬리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요셉의 아버지가 둘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족보에 대한 이야기가 따분하기도 하지만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 시작은 예수님 끝은 하나님 ◉


그러면 누가의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백성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절)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족보를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신 아들이심을 증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죄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계신 분이 죄인의 몸으로 오시고 스스로 대속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를 하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본문의 족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위대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의 족보가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연결된 이 족보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걸쳐져 있습니다. 본문의 족보에서만 77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거론된 이름들은 거의 생소합니다. 그 이름이 본문의 족보에만 등장하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의 계통을 제쳐 버리고 이름만 있을 뿐 그 행적이 언급되지 않은 나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랑할 만한 화려한 족보가 아니라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한 가문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화려한 영웅의 세계가 아닙니다. 세상은 영웅적 인물이 많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예수님의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생명의 가문은 그처럼 화려하고 자랑스러운 영웅적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고 천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을 뿐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에게로 연결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벌레 보다 못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가문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는 죽은 자인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은 자라는 우리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죽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족보에 기록된 이름들 ◉


누가의 족보에는 왕도 있고 이름 밖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이 족보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업적을 높이고 자랑하며 자신의 이름이 부각되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된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족보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처럼 누가의 족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생각하면 누가가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한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헬리를 요셉의 장인으로 말하기도 하고, 마태가 요셉의 아버지로 말한 야곱의 동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헬리를 요셉의 장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가가 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기 때문에 족보에서도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헬리를 야곱의 동생으로 말한 사람은 형 야곱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유대 혼인법에 의해 동생 헬리가 형수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는데 율법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으로 말한 것이고, 실제적으로는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기 때문에 누가는 헬리는 요셉의 아버지로 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그것은 족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헬리라는 사람 역시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족보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 끝이 하나님으로 끝나는 위대한 족보에 도무지 기록될 가치가 없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심으로 죽음에 갇혀 있던 우리가 해방되어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죄인으로 죽음에 갇힌 나를 예수님이 붙들어 구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그 같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자기 이름의 높아짐이나 영광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추구할 것은 오직 나처럼 비천한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 신자를 복이 있다고 하는 이유 ◉

 

롬 5:17,18절을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범죄자인 그도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있습니다. 아담만이 아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들이 사망의 종으로 있던 이름들입니다. 그 이름들이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족보에서 예수님을 삭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끝은 비록 하나님이라고 해도 시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난다면 그 결과는 심판입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고 해도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고 살았다고 해도 역시 심판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에 갇힌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족보는 예수님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의와 용서로 시작하기 때문에 족보에 기록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의와 용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자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선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복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인생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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