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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년의 복음

  • 신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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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5강) 희년의 복음 
본문 : 눅4:14-21  
2012-06-17

 

<본문>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5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설교>

 

◉ 믿음의 삶 ◉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에 갈릴리에 돌아가셔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라신 곳인 나사렛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의 글을 받아들고 한 곳을 펴서 읽으셨는데 그 말씀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 61:1,2절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예수님은 선지자의 예언을 읽음으로써 예수님이 곧 선지자가 예언한 일을 이루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답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의롭다 칭함 받으며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이같이 답할 것입니다. 또한 이 같은 사실을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현재의 삶에서 누리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믿음의 삶에서 무엇을 누렸을까요? 기쁨이라고 할 수도 있고 행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사도들이 누렸던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처럼 사도들은 진리로 인하여 자유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옥에 그냥 갇힌 것이 아니라 매를 많이 맞은 후에 발에는 차꼬까지 채워진 상태였습니다. 육신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송했다는 것은 환경과 형편에 매이지 않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또한 바울은 육신적으로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될 만한 모든 조건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방해가 되는 육신의 조건들을 모두 잃어버려도 괜찮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 또한 자기의 육신에 매이지 않고,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줄 세상 것에 매이지 않은 자유입니다.

 

 사람들에게 붙들려 공회에 끌려 온 스데반 집사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 역시 자기 목숨에 매이지 않은 강한 자유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대 기독교의 실상은 자유를 갈급해하면서 나를 자유케 하는 복음의 능력을 원하기보다는 철저하게 마귀에게 종속된 채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꺼냈던 것들을 얻기 위해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힘이 자신을 자유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약할수록 강한 자에게 종속되어 그의 눈치를 보며 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힘이 있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매이지도 않으며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힘만 있다면 직장이 싫을 때 당장 그만 두어도 되고,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비굴해질 필요가 없으니 자유자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힘이라는 것에 붙들려 있는 것이고 이 힘이 곧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던 조건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분으로 말합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이 마치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돕기 위해 오신 분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소외 계층을 돕기 위해 일하신 사회운동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회적 약자를 돕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오셨고 그들을 돕기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구원은 사회적 약자들의 몫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눈이 멀지 않고 눌린 자가 아니라고 해서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는 사회적 기준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가난한 자에 대해 생각해 보면, 가난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그 삶이 황폐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돈이지만 예수님은 복음을 전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복음이 해결책이 되는 가난이라는 뜻이 됩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벗어나게 되는 가난이라면 그것은 말씀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에서 벗어나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말씀의 기갈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돈 없는 형편만 생각하고 돈에 갈급해 할 뿐이지 말씀이 없는 기갈의 상태는 알지 못하고 때문에 말씀에 대해 갈급해 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으로 부요하다 할 수 있습니까? 말씀으로 부요하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자주 듣고 성경 공부에도 열심히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부요하다면 세상의 부요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재물에 자기 인생을 맡기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 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하는 부자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에 대해 부요하기보다는 재물의 부요에 더 갈급해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말씀이 없어서 말씀에 부요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부요에 갈급해하고 마음을 뺏긴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부요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난을 아는 신자는 자연히 복음을 갈급해하는 심령으로 말씀 앞에 나오게 되는 것이며, 말씀으로 부요한 신자가 세상에 대해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포로 된 자도 전쟁에서 패배하여 승리자에게 붙들린 상태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죄에 결박되어 끌려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결박되어 끌려가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말합니다. 즉 신자는 더 이상 죄에 결박되어 사망으로 끌려가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란 것입니다.

 

 세상은 죄에 결박되어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실상에 대해 전혀 무지합니다. 도덕과 윤리와 양심으로 죄를 이기고 물리치며 선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죄에 강력하게 결박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망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죄에 결박되어 끌려가는 실상에 대해 눈이 뜨인다면 예수님이 해방자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눈 먼 자도 신체적 소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 눈이 먼 것입니다. 신자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다면 보이는 세계에서 자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영적인 세계에서 보게 되는 것들이 더 가치 있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 살아가는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고,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신앙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눌린 자는 당시 노예와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노예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누르고 있는 주인의 뜻과 생각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싫은 것도 해야 합니다. 자기의 주체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삶이 그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형편에 의해 눌린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 복음은 자유다 ◉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는 오늘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자유하지 못하고 뭔가에 붙들려 끌려가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처럼 자유하지 못하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붙들리고 보지 못하고 눌려 살아가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자유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유케 하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자유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관심에서 멀어질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보면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자유가 은혜의 해에 일어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해에 일어날 자유하게 되는 사건은 ‘희년’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25장에 등장하는 희년은 안식일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즉 50년이 되는 해를 말합니다. 희년이 되면 종들이 해방되고 가난 때문에 팔았던 땅도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각기 수에 따라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을 때의 상태의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희년의 규례대로 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희년의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아래서는 종도 자유를 얻습니다. 즉 종과 상전의 관계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도 부요하게 됩니다. 복음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때문에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신자가 부요한 자로 주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결박하여 구속하고 억지로라도 실천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년의 복음은 말 그대로 자유입니다. 법에 매이지 않은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법에 매었다면 누가 선한 일을 많이 행했으며 누가 봉사를 많이 했는지 따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해야 하고 봉사를 해야 하는 굴레 아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은 어떤 법칙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된 사람을 구원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는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자유보다는 예전의 습성대로 뭔가에 붙들려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문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짐을 지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쉼을 얻게 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희년의 복음은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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