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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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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47절-50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눈은 보라는 눈이다. 눈으로 보고 잘 판단하고 구별을 하라. 눈으로 보고 판단 구별을 할 때는 손해를 보려는 게 아니라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가게에서 뭐든지 살 때는 눈으로 보고, 그래도 미심쩍으면 손으로 만져도 보고 묻기도 한다. 손해를 안 보려고 그런다.


뭘 사려면 눈으로 보고 판단 구별을 한다. 임시성에서 가견적인 눈에 보이는 것도 판단 구별을 제대로 못하면 속는다. 손해를 많이 본다. 하물며 예수를 믿는 것도 바른 선택을 해야 하고, 영원히 사는 쪽으로 선택을 해야 하고, 눈으로 보고 천국을 천국만큼 세상을 세상만큼 알아야 한다.


눈으로 보는 천국은 성경 속에 들어있다. 성경 속에 신령한 천국을 묻어두었다. 세상을 세상만큼, 천국을 천국만큼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성경에 다 기록해 놨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기가 어느 쪽을 보는 눈을 가지고 가치판단 선택하며 사느냐? 어느 쪽을 더 가치가 있다고 보며 사느냐? 그에 따른 결과는 자기에게 영생이 아니면 불쏘시개로 다가온다.


48절: 구더기가 죽지 않고, 그러면서 불도 꺼지지 않는다면 이 불이 무슨 불일까? 이 말은 구더기가 계속 먹고 살 수 있는 먹을거리가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런 불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구더기들의 생태를 보면 생명이 죽은 시체가 썩는 곳에 잘 산다. 그리고 시체가 썩어갈수록 구더기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다. 죽은 시체의 콧구멍으로 입으로 귓구멍으로 눈으로 구더기가 들락날락한다. 그러나 산 자에게는 구더기가 쓸지를 않는다. 영의 눈으로 보면 신앙생명이 살아있는 자에게는 표현하여 자기를 해치는 벌레가 쓸지를 않는다. 좀 더 표현을 한다면 신앙생명이 살아있는 자에게는 벌레 같은 사람이 안 붙는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을 생각해 보면 바로 왕과 같은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게 되면, 애굽성을 세상성을 가지게 되면 열 가지 재앙은 다 온다. 예수 믿는 사람이 현재적으로 바로 왕과 같은 가치판단 정신 사상 평가 소원을 가지면 열 가지 재앙을 받는다.


이 열 가지 재앙에는 갖가지 재앙이 다 있다. 먹을 수도 없고, 아무리 목이 말라도 먹어도 안 되고, 이라든지 개구리라든지 여러 가지가 붙는다. 그 때는 짐승으로 표현을 하는 거지만 지금으로 보면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이 달라붙는다.


자석은 붙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 붙기 때문에 붙는 성질을 가진 못을 자석에 문지르면 그 쇠도 자석의 성질을 가져서 그 쇠를 다른 쇠에 대면 자석처럼 그 쇠를 당긴다. 질이 같으면 다른 것을 감염해서 다른 것도 자꾸 끌어당기는 것이다. 교훈의 세계도 이치적으로 보면 그렇다. 사회 전반을 봐도 이치적으로 보면 그렇다.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말은 고난과 고통의 연속성을 말한다. 신앙생명이 죽은 자에게 모든 근심 걱정거리가 구더기처럼 눈으로도 들어오고 귀로도 들어오는 것이니 얼마나 고통이냐?


49절: 이 말씀을 보면 ‘사람마다’ 그랬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다 자기를 빼놓고 하신 말씀은 아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다 썩어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들어야 한다.


‘사람마다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을 뿌리는 썩어 들어가니까 썩지 말라고 소금을 치는 거다. 소금은 방부제 역할도 하지만 쇠가 소금에 닿으면 소금이 그 강한 쇠를 녹인다. 더 썩지 말라고 소금을 치고, 또 맛을 내느라고 소금을 뿌리고.


우리가 입맛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러나 수박을 먹다가 참외를 먹으면 달지만 약간 짠 느낌도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여름에 목마르지 말라고 그렇게 하셨다. 요즘은 몸에 잘 흡수되는 이온음료도 있다고 한다.


소금은 뿌리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데, 얼마나 썩었고 맛이 없는 사람인지 사람마다 소금 치듯 함을 받을 때에 말하자면 썩어 들어가던 부분이 얼마나 쓰리고 아플까? 그런 것처럼 자기 마음 가운데 진리로써 뿌려질 때 자기 속에서 느껴지는 게 있는 거다. 그게 다 자기에게 오는 자극인데, 그런데 직접 지적을 안 하면 잘 모른다. 또 지적을 하면 꼬부라진다.


어떤 약을 먹으면 안 아프던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게 명현반응? 그런 게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속에 자극적으로 들리는 게 없느냐? 자극이 있다는 건 썩고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고 있다면 그건 썩은 거다. 회개해야 한다.


자기에게 썩는 곳이 있다면 이치적으로 보면 더 썩지 못하게 소금을 뿌리는 것이 좋다. 그런데 말씀 속에 자기 심령을 뼈와 골수를 찔러 들어가는 것이 없다면 그 말씀이 소금일까? 다 각자 자기 성격 성질이 있고 취미가 있는 건데 어떻게 다 좋게 해주겠느냐? 천국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세계인데 사람마다 다 좋게 해준다면 어떻게 단일성이 되겠느냐?


50절을 보면 소금은 무엇에 쓰는 것인가? 썩어서는 안 될 곳에 썩지 말라고 소금을 쳐야 하고, 음식의 간을 맞출 때 소금을 친다. 설탕을 치는 곳에도 소금이 약간 들어가야 제 맛이 나기도 한다. 그런 것처럼 인간이 썩는 것을 방지하거나 인간의 참 성품의 맛을 내게 하는 데는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진리이치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을 두고 화목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이방 세상 사람들은 타락된 속성은 버리지 못하고 물질만 가지고 자기의 맛을 내려고 한다. 그 안에는 소금은 없다. 하나님의 속성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나 마음이 없다. 예수 믿는 자 중에도 소금이 없는 자가 참 많다. ‘이 사람도 좋다. 저 사람도 좋다’ 하면 그 사람은 소금이 없는 사람이다. 복음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물질을 쓰는 것도 복음의 정신이 없이 쓰는 사람, 복음의 정신이 없이 버는 사람, 이건 안 된다. 복음의 정신이 없이 세상살이 살림살이 이거 안 된다. 이러면 나중에 소금의 맛을 내야 하는 사건이 온다. 물질만 가지고 자기 맛을 내려고 하는 것은 안 된다.


사람의 진정한 맛은 사람의 속맛이다. 정신 마음. 성경구절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열매의 맛. 사람의 맛은 모양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 마음바탕에서 나온다. ‘사람의 마음의 씀씀이가 속맛이 물질성으로 돌아간 건지, 자기의 어떤 목적이 있는 건지’ 이게 다 들어있다.


사람의 성품인 속이 썩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 너와 나의 화목은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다. 부모가 자식을 야단치고 책망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맞추라는 건지, 아니면 부모 자기의 기준에 맞추라는 건지? 성경에 ‘주 안에서’ 라는 말이 많이 있다. 주님이 기준이다. 부모공경도, 자녀교육도 말씀 안에서.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단일성으로 맞추고, 또 다른 사람도 전하는 면에서 그렇게 맞추게 하고, 상대방도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고, 나도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고 이래야 하나님 앞에 화목이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가는 화목이다. 이게 진정한 화목이다.


부모와 싸우고 형제와 싸우고 제자와 싸우고 하는데 먼저 기준을 하나님부터 세워라. 그렇게 세우려면 모든 물질적 이해타산 인정정실을 다 끊어야 세워진다. 이런 거 저런 거 끌고 오면 의사단일이 안 되고 편견이 돼버린다. 거짓은 갈수록 자꾸 확대가 된다. 이걸 두드려 물질이나 인정정실로 막으려면 열 마디 하던 것이 백 마디가 필요하다. 자꾸 힘들어진다.


소자를 실족케 한 것도 가르치는 자가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가는 교훈이 아니었고, 손의 사역이 범죄케 된 것도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의 일이 아니었고, 보는 눈도 역시 영생을 보지 못하고 생명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보는 범죄의 길로 갔기 때문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 소원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과,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 종교적인 사업적인 면으로 보는 것과, 여기는 일 크게 하자는 게 들어있는데 둘 다 세상성이다. 이건 범죄다. 목적이 사람에게 들어있는 게 아니고 물질에 들어있으니까 그게 범죄의 길이다. 죄짓는 길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서 의사단일성으로 되지 않은 것은 전부는 범죄요 고통이요 멸망이다. 그러니까 소원 목적이 그 쪽으로 돌아갔으면 휘지 말고 결단을 내리고 찍어라. 일하지 말고 밥 먹지 말고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정신을 네가 찍어버려라. 그래야 네가 산다.


일반 이치적으로도 병원에서 피가 통하지 않아서 발쪽에 썩어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그 발을 찍어야 한다. 파상풍으로 균이 들어가면 처음에는 발가락이라서 별 거 아닌 걸로 생각했는데 조금 있으니 발등으로 썩어 들어가고, 고집을 피우면서 병원에 안 가다가 다리까지 올라가서 죽는 사람도 있다. 찍어야 산다. 균만 들어가도 찍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그런 것만도 못한 거냐? 자기 일생의 전체성이 앞으로도 그런 일을 당할 경우가 많을 텐데.


균이나 감기 바이러스 등 눈에 안 보이는 것일수록 중요한 것이므로 더 실감을 해야 할 텐데 오히려 더 실감을 못한다. 그것보다 더 들어가서 영적 눈을 가지고 보아야만이 아는 사람의 정신이 죽어가고 있고 썩는 이걸 보지 못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건 믿음이 없다고 봐야 한다.


성경은 자기 머리가 생각하는 사고방식 소원 목적이 썩는 것으로 들어가 있는 건지, 사는 것으로 들어가 있는 건지를 가르쳐 주는데 왜 모르느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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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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