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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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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1절-9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1절: ‘무리’라고 할 때는 그 무리 속에는 개체 개별적으로 다양한 소원과 목적이 있기 마련이고, 각자 저질적인 여러 가지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믿는 우리도 하나님의 의사단일, 주님의 진리이치 쪽으로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 소원 목적을 맞추지 못하면 하나의 무리에 불과하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무리로 모인 교회가 많고, 무리의 집단체가 참 많다. 뭘 보면 알 수 있느냐? 교인들이 구하는 것이 전부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고 있으니 바로 너의 입으로 네 수준이 무리 중에 하나라고 하는 것을 증명을 하고 있구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하나님의 성격 성질 성분으로 단일이어야 한다. 천국은 하나님의 것으로 단일의 세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으로 단일이 아닌 것은 그 천국에 못 들어간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된 것이 교회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니 교회의 모든 말씀이나 명령이나 권고나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 전부는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교회는 자타의 구원목적으로 주님의 그 뜻대로 손발이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하나의 무리화로 된 교회는 질적으로 보면 교회가 아니다.


무리 속에는 세상생각 물질적인 생각 즉, 옛사람 부패성적이고 육적이고 마귀적이고 마귀가 역사할 수 있는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춰야 한다.


자기 몸도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므로 주님의 것인데 자기 몸인 줄로만 알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생각을 못하고 자기 생각을 가지고 안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대로 제 멋대로 산다면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들어가서 물질적 이해타산으로 들어가 있는 장사꾼을 다 둘러엎고 쫓아냈듯이 그 자를 가만 두지 않으신다. 믿는 자기의 육신의 몸은 성령님을 모셔야 할 텐데 세상이 들어있으면 이 사람은 늘 물질적 이해타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자를 가만 두지 않는다. 어떤 매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교회의 가르침이 무리들이 듣기 좋은 대로 가르치면 좋겠느냐? 무리들이 소원 목적하는 대로 가르치면 좋겠느냐?


오늘날 교회들이 구하는 게 자기의 소원 목적대로 구하고 있다. 이건 무리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례대로 가르친다. 그러면 무엇이 전례대로냐? 예배순서 전례대로냐? 예수님께서는 천국으로부터 오셨으니 천국 길 생명 길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가는 이게 전례이다. 무엇을 가지고 비유적으로 가르치시던 천국 길을 향하게 가르치고, 정신이 천국 쪽으로 하나님의 뜻 쪽으로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전례대로 가르침이다. 주님의 모든 언행심사가 다 그렇다.


그러나 세상 거짓된 인도자들은 자기의 전례대로 가르치고 있으니, 의례히 세상적인 자기 피알이요, 건물을 짓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 모이게 하는 것도 그렇고 거의가 자기 피알을 위해서 하고 있다. 그래서 목사 명함 속에 ‘무슨 무슨 장’이니 하는 그런 게 상당히 많다. 예수님은 어디 어디를 거쳤느냐? 예수님이 노회장도 해먹고 그랬느냐?


2절: 예수님께 시험을 걸려고 나타난 자들은 바리새교인들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마귀가 바리새인들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성경을 가지고 나타났다. 마귀가 에덴동산에서도 하와에게 시험을 걸었다. 그런데 그 때는 마귀가 하와를 이겼다. 그래서 이 마귀가 또 이길 줄 알고 이번에는 성경을 안다고 하는 바리새교인들을 부추겨서 예수님께 시험을 걸었다.


이 바리새교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물었느냐?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게 옳습니까?’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이 바리새교인들이 남자들인데 남편으로서 인간으로서 그게 합당한 물음이냐?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안다면 이것이 하나님께 물을 말이냐?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면 용감해진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건방지다.


우리가 깨닫고 보면 창조 때부터 부부로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보기 싫든 좋든 처음에 하나님께서 부부로 짝지어 주신 것이다. 그러면 뭘 하라고 부부로 짝지어 주신 것이냐?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아내를 버린다는 말이냐?


갈수록 세상이 불바다로 달려가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동성연애를 법으로 허용을 한다. 그리고 1, 2년 살아보고 싫으면 헤어지고 한다. 그러니까 호적에 부부라는 걸 올리기 전에 미리 살아보고. 이걸 생각을 해봐라. 이게 하나님 앞에 어찌 되는 거냐?


창조 시로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따라서 ‘남자, 여자’ 하는 건 변할 수가 없다. 이 남자와 여자가 합쳐서 생명과도 먹고 일반과도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지배하고 통치하고 땅에 편만하라는 말씀은 천국을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실력을 이뤄나갈 수 있게 하려는 축복의 말씀이다. 이것도 비유다. 성경 속에 들어있는 것 전부는 비유다. 그런데 그 속에 변할 수 없는 뜻을 집어넣었다. 우리는 그 변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한다.


아담 하와는 아내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줘서 같이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렇더라도 아담은 하와를 버리지 않았고, 아무리 살기가 힘들어도 각자 담당한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비록 타락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두 부부에 대한 창조의 목적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부를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느냐? 오늘날 이방인들이 갖는 그런 소원 목적이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부부라는 결합 속에는 창세 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 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맞들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들어있다. 그게 교회다. 부부로서 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맞들어야 한다. 이게 원칙이다. 안 그러면 자꾸 해이해진다. 안 믿는 사람과 같은 레벨로 떨어지고 만다.


부부는 교회로서 구원의 목적대로 살아야 할 설계가 들어있다. 부부에게는 이뤄야 할 구원설계가 들어있다. 성도 즉, 교회는 주님과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적 의사단일의 결합이 들어있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천국의 누림의 극치가 들어있다. 그래서 남녀 모두는 부부를 중심하여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어 세상 끝 날까지 구원역사가 흘러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와서 묻는 자는 자기는 똑똑하다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는 것이지만 사실은 부부의 이 원칙을 모르고 묻는 것이다.


부부를 왜 만들었느냐? 부부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준 것이다. ‘부부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라. 그러면 너희들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속성이 들어간다.’ 부부가 그렇게 살면 어떤 상황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편하려고만 한다면 이미 문제가 들어있다.


여자가 돈을 잘 쓰고 돌아다니면 가정파괴라는 것이 전제가 돼 있다. 또 여자입장에서 남자를 볼 때 남자가 아무 여자에게나 잘 해주면 이건 좋을 가능성이 들어 있느냐, 안 좋을 가능성이 들어 있느냐? 안 좋을 가능성이 들어있다. 진리이치가 들어가서 자기 마음을 잘 조절해야 한다.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쪽으로 끊어지면 안 된다.


2절: 바리새인들의 이 말 속에는 어떤 계략이 숨겨져 있는 물음이다. 이것을 모르고 단순히 ‘버리는 것이 옳다. 버리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대답을 하게 되면 그들의 시험에 걸려든다.


3절-8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다 아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경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하신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명했느냐?’ 모세는 하나님의 대언자이다. 그들의 대답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했다’고 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아내가 버려지는 거냐? 첫째는 아내에게 수치스런 일이 있을 때다. 신24:1-2절에 보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라고 했다.


그리고 3-4절에 보면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수치스런 일이 있을 때는 아내를 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뜻은 모른다고 해도 문자적으로도 이걸 생각해 봐라.


두 번째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딴 데 시집을 안 갔을 경우에는 또 데려올 수 있다(사:54:6). 세 번째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버림받은 이 아내가 재혼을 했을 경우에는 다시 데려올 수가 없다. 네 번째는 마5:31-32에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지 말라. 버리게 되면 여자로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고, 또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면 역시 남자도 간음이다’ 라고 했다. 연고가 없어도 그렇다.


다섯 번째는 눅16:18에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은 간음이 된다고 했다. 앞뒤로 보면 상황이 다르다. 여섯 번째는 고전7:15에 보면 불신 배우자의 요구에 의한 이혼은 된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평을 원한다고 했다. 한 쪽이 믿으면 그 한 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줄을 누가 아느냐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일부러 그렇게 만들려고 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된 상태라면 화평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줄 누가 아느냐’ 하는 것은 노력은 하되 있는 그대로 기다리라는 것이다.


본문 5절로 보면 왜 이혼증서를 쓰라고 한 것이라고 하느냐? 그것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혼증서를 기록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여자가 악하다는 말이냐, 남자가 악하다는 말이냐? 남자다. 남자가 악하다는 말인데, 그 완악한 증서를 아내였던 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게 증거다. 말하자면 아무 연고 없이 버렸으니까 하나님 앞에 내보일 참이다.


6절로 보면 창조 시로부터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한 몸이라는 뜻이다. 서로 힘이 되는 거다. 갈비뼈가 부러지면 힘을 못 쓴다. 생체적으로 말하면 남자의 창자를 갈비뼈가 보호를 한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시집장가를 가면 일단 부모를 떠나야 한다. 왜 부모를 떠나라는 말이냐? 여기에도 뜻이 있다. 한 몸은 한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니 나그네 생활을 하며 소원도 목적도 모든 생사고락을 살아있는 동안에 부부가 같이 한다.


9절로 보면 부모를 떠나라는 말에서 얼른 생각이 드는 것이 부모의 간섭을 받지 말라는 것이고, 또한 이제 부부는 모든 면에 마음을 같이 하여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했으면 부모를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로 나가서 잘 살아라 그 말이다. 그런 면에서 둘이서 개척을 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야 그 부부도 살아가면서 후에 부모가 되어서 그 정신이 자식에게 들어가는 거다.


이걸 영적으로 보면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사단일성으로 생명 길로 걸어가면서 구원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육적인 것에 기대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기댄다거나 육적인 그 지도를 받게 되면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단 시집장가를 갔으면 예수 믿는 일에 줄달음을 쳐야 좋은 건데 왜 시부모 집의 제사니 뭐니 그런 것에 간섭을 받느냐?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크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너는 쪼그랑망태기가 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누적되어 들어간다. 너를 만드신 창조자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어기지 말라.


그동안 말씀의 뜻을 명확히 모르고 살았고, 부모가 해 오던 육적인 그런 걸 지키는 것이 옳은 줄 알았고, 그런 부모의 말이 다인 줄 알았는데 말씀을 중심해서 옳은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왜 망할 짓을 하겠느냐? 왜 하나님의 진노를 쌓겠느냐 그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바로 살겠다는 거기에는 삶의 개척정신이 들어있고, 하나님 앞에 사람이 반듯하게 놓여진다. 그렇지 않고 육적인 것이 들어있으면 자꾸 부모의 잘못된 간섭을 받게 되고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이건 주 안에서 부모공경이 아니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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