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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못된 사랑 (창 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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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사랑 (창 37:1-4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창세기 37:1-4)

성가대가 아주 훌륭하게 찬양을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찬양을 들려준 성가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우리가 지난주에 생각해보았듯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잘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좋은 것들을 사랑합니다. 못하거나 아름답지 않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또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아빠가 되면 자식을 사랑하길 원하고, 남편이 되면 아내를 사랑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하는 만큼 잘 되질 않습니다. 안 하려 하거나 원치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늘 사랑이 모자라고 모두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제가 이번 성경에 나타난 사랑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무척 낙심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예를 보면서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도 사랑을 할 줄 모르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해도 대상과 방법이 잘못되어 오히려 상처와 문제만 일으키고 불행을 조성하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모습입니다. 정말 인간이 연약하고 능력이 부족한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문 창세기 37장 1-4절의 야곱의 이야기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야곱은 슬하에 아들 12명, 딸 1명을 두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노년에 얻은 아들"로, 11번째 아들입니다. 그러니 요셉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편애였습니다. 자식들을 고루 사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다른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데 요셉만 특별히 더 사랑했고 밝은 채색옷까지 만들어 입혔으니 형제들 가운데서 눈에 가시일 수 수밖에요!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4절) 속상해합니다. 편애가 보입니다. 누구에게 안 보이겠습니까? 편애하는 표를 내지 않으려해도 아이들은 압니다. ‘아버지는 누구를 좋아하고 어머니는 누구를 좋아해.’ 

자녀가 셋이면 첫아이는 사랑을 저절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신기하고 좋습니다. 울어도, 웃어도, 걸어 다녀도 좋고, 자전거를 타도 신기하고, 학교에 들어가 ‘ㄱ’자 하나만 배워 와도 천재 같아요. 처음 낳은 아이니까 모든 것이 놀라와 무척 사랑합니다. 그런데 둘째가 태어납니다. 둘째도 웃습니다. 하지만 첫 아이 때 이미 다 본 겁니다. 배밀이를 해도 별로 신기하지 않아요. 부모는 의식을 못해도 저절로 첫째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부모가 첫째에게 하는 것을 봅니다. 본문에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안다’라는 뜻입니다. 말은 안 해도 속이 상하고 질투가 나고 미워요. 그래서 둘째는 어떻게 해서든, 말썽을 부려서라도 부모의 관심을 사려 합니다. ‘둘째 신드롬’입니다. 야곱이 그랬었습니다. 둘째는 사랑을 얻기 위해 결사적입니다. 몸부림을 쳐야 부모의 관심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막내는 또 다릅니다. 막내는 마지막 아이이기 때문에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재미있는지, 저절로 막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본문이 그 이야기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 미국 사람, 미국 교포, 한국 사람들에게서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어려서 부모의 편애 때문에 받은 상처가 어른이 된 지금도 고통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드러내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대화 속에서 그 상처가 나타납니다. 아마 지금도 제 말을 들으면서 ‘우리 부모님도 형만 좋아했지!’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제대로, 고르게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상처들입니다. 부모가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해서입니다. 

부모가 일부러 상처를 주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저도 세 아이를 키워보니까 첫째는 저절로 사랑하게 되더라고요. 둘째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은 안 해도 덜 사랑하는 것 같고, 막내는 막내니까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둘째가 어릴 때 자꾸 우는 겁니다. 첫째도 막내도 안 우는데, 둘째는 우리가 밖에 나가려고 하면 꼭 따라 가겠다고 울어요. 부모의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아, 우리가 울보를 낳았구나!’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는 걸 가만히 보니까 아빠의 잘못이에요. 아빠가 자기도 모르게 큰애와 막내를 편애하고 둘째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했습니다. 왜 저 아이만 그럴까? 관찰하다가 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옛날 야곱만 그랬던 게 아니더군요. 깨닫기를 잘했지요. 그냥 지나갔다면 지금 둘째와 나는 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빠는 언니, 동생만 사랑하고 나는 뭐예요?” 저는 그 아이가 속상해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사랑하고 싶지만 잘 모르고 연약하고 다 알지 못하니까 자녀들이 상처를 입고 서로 질투를 하게 됩니다. 첫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만 동생과의 관계가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언니와 매일 싸우니까 형제간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이래서 문제, 저래서 문제, 우리는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어서 모두 사랑의 갈증을 느낍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형들에게 곱게 굴면 좋았을 텐데, 형들이 밖에서 잘못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합니다. 요셉은 대단히 훌륭한 인물입니다. 제가 요셉을 너무 좋아해서 제 영어 이름을 조셉(Joseph)이라 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흠이 있었어요. 고자질하는 것입니다. 형들은 그렇잖아도 요셉이 미운데 아버지에게 고자질까지 하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나? “아비가 형제들보다 더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은 받았지만 형들에겐 미움을 받아 형제의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형들은 “언사가 불평하였더라”(4절)고 했습니다. “이 자식 한 번만 더 그러면 죽여버릴 거야!” 이런 식입니다. 이런 결과가 증오와 질투로 나타나는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사이의 사랑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니 가정에 얼마나 분란이 많았겠습니까? 형들은 결국 동생을 죽이려고 하다가 멀리 노예로 팔아넘겨 버리기 까지 했습니다. 

이런 불행이 왜 오는가?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잘해야 사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애굽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이 같이 사는데, 종족이 다르다고 외모가 다르다고 싫어하고 학대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옛날에 남의 나라에서 살지 않았느냐? 너희 가운데 있는 외국인들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훈련을 시켜야 이방인들을 사랑할까 말까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제가 학생 때는 우리나라에도 중국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중국 식당은 거의 다 중국 사람들이 운영했는데, 제가 미국에 간 이후에 그 사람들을 한국에서 다 쫓아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중국음식점에 갔더니 그 주인이 인천에서 왔다고 해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했더니 한국에서 쫓겨났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 오래 살았고 우리와 똑같이 생겼는데도 종족이 다르다고 싫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 사랑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명령을 통해서 순종하게 하고 배우고 훈련하고 습관을 들여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냥 두면 잘못된 사랑, 잘못된 대상, 잘못된 방법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을 일으키는 잘못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은 사랑했으나 이스마엘은 쫓아냈습니다. 그들 사이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4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서로를 향해 폭탄을 던지면서 전쟁을 하고 있겠습니까.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은 큰아들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을 사랑하니 엄마는 작은아들을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큰아들도 사랑하고 작은아들도 사랑하면, 엄마도 작은아들도 사랑하고 큰아들도 사랑하게 되어 얼마나 좋았겠어요. 왜 둘 밖에 없는 자식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가? 능력 부족입니다. 인간은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고작 짝사랑이나 편애를 해서 질투와 분노를 일으키고 상처를 주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해서 어느 자식 가슴에 한이 맺힌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자식 사랑도 그렇지만, 아내 사랑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 한 남자가 4명의 여자를 아내로 둡니까?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해서 둘이 합해 한 몸을 이루어 부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한 남지가 한 여자를 사랑하기도 힘든데 4명의 아내를 두다니요. 그 가정에 얼마나 전쟁이 많았습니까? 언니와 동생, 하녀들, 자식들의 싸움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본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증오와 갈등과 싸움을 불러오게 됩니다. 집안을 망칩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해서 언니 레아가 동생을 질투했습니다. 둘 사이에 경쟁심이 생겼습니다. 야곱은 아내 두 명을 얻는 대가로 14년 동안 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못 낳자 하녀 2명을 얻었고, 결국 아들 열둘, 딸 하나, 13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정에 사랑이 없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요새는 또 이상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거나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회에서 그 동성애 법이 토론 중입니다. 법무부가 초안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여러분, 법무부로 국회로 대통령에게로 이메일이나 편지, 전화를 꼭 보내십시오. “가정의 가치를 파괴하는 이런 제도는 안 됩니다!”라고 의사표현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법이 한국에서는 통과되지 않도록 반대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대상과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럽에서는 동성애 결혼법이 이미 다 통과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는 작년에 통과했습니다. 이제 한국이 시작을 합니다. 입법화한다고 작년에 내놓았다가 연기했는데 올해 다시 내놓고 있습니다. 세계적 추세라며 계속 내 놓을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서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본래 가정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영화나 심지어 TV에서도 동성애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사랑입니다. 인간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둘이면 반드시 편애하게 되어 있습니다. 르호보암은 아내가 18명, 첩이 60명입니다. 그중 마아가라고 하는 아내만 사랑해서 아내들 사이에 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삼손과 들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이용하는 가짜 사랑입니다. 한나의 남편도, 다윗도 잘못된 사랑의 경험이 있습니다. 모두 잘못된 사랑입니다. 성경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친척들이 나를 멀리한다”고 했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친척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멀리합니다. 친구도 배반을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남녀 간의 사랑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세겜이라는 자는 유대 나라에 갔다가 디나라는 여자를 보고는 사랑한다며 성폭행을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그 남자는 자기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여자를 성폭행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사고방식입니까. 이복형제끼리의 문제도 있습니다. 다윗의 자녀들 가운데 이복오빠가 이복여동생을 너무 사랑해서 상사병이 들었습니다. 결국 동생을 불러 욕을 보이고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욕하며 쫓아냈습니다. 욕정을 채운 것이지 이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인간의 사랑이란 이렇게 망가지고 저렇게 망가져 이런 문제 저런 문제들이 생깁니다. 수천년 동안 성경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잘못된 사랑을 합니다. 사울왕과 그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사랑입니까? 정략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위를 삼더니 죽이려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제대로 참된 사랑의 능력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외국 여자들을 아내로 두었습니다. 또 무가치한 것들을 사랑합니다. 

잘못된 사랑의 대상 가운데는 폭력이 있습니다. 시편 11편에 “어떤 사람은 폭력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사람을 때리고 못 살게 구는 것을 좋아하고 악한 말을 사랑합니다. 상스러운 말, 저주하기, 어리석음, 뇌물, 분쟁, 죽음마저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죽으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모릅니다. 분별없는 여자를 사랑하고, 가족을 멀리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가족을 오히려 고소하고 증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상처만 만드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이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에 굶주리고 목말라서 온 세계가 사랑을 찾아 부르짖습니다. 노래들이 사랑의 하소연들뿐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종종 빠집니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단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 전도하지 않습니다. 꼭 ‘할렐루야교회’ 교패를 보고 찾아갑니다. 문을 두드리고 교회 다닌다고 해도 기어코 성경공부하자고 몇 번씩 찾아와 결국 잘못된 신의 사랑을 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거짓선지자들을 통해서 미혹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도 사람도 자연도 제대로 사랑을 할 줄 몰라 사랑의 갈증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사랑하려면 하나님께로 와야 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로 와서 그분의 도움을 받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렘3:1)고 하셨으나 “그래도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과 실수로 인해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온 가족과 친척에게 한이 맺히게 했더라도 “그래도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수 있도록 재훈련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의 방법을 배워 우리도 하나님처럼 사랑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저절로 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방법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호세아의 아내가 밖에 나가 간음을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가서 간음한 네 아내를 데려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잘못된 사랑, 대상, 방법이 있었다면 이제라도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배워 우리 모두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하는 훈련을 받기 원합니다. 가족, 형제, 친척, 자매, 성도,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좀 더 참되게 사랑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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