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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살아야 하나 (눅 1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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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나 (눅 12:16-21)


한 친구가 그의 다정한 친구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 했는데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 오늘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시더군! 곧 예수님이 오시는데 이를 재림이라고 하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천국으로 가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의 형벌을 당한다네. 나는 그 사실을 믿지만 자네는 무신론자이니 믿지 않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예수님이 오시면 그때 자네가 나의 재산을 다 가지게. 이 집도, 내 땅도, 저 TV도, 은행에 예금되어 있는 돈도, 차도 전부 자네가 그냥 가져. 각서를 써 달라고 하면 지금 당장 써주지"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횡재를 한 친구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그날 밤 좋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각서까지 받아 놨으니 빨리 예수님이란 분이 왔으면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그 좋던 마음은 사라지고 친구가 자기의 모든 것을 한 점 아쉬움도 없이 선뜻 포기할 만큼 그 하늘나라가 그렇게도 좋은 곳 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지옥의 형벌을 당한다는 말이 사실처럼 믿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날을 고민하던 친구부부는 드디어 전화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이보게 친구, 나에게 자네의 전 재산을 주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방법을 알려주게. 우리 부부도 천국에 가고 싶네." 

예수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성경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믿는 것을 기점으로 입장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서로 다릅니까? 아니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에 어떻게 그 신분과 생활이 달라집니까? 예수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의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마음 한 가운데 좌정해 있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하나님께 무관심하고 때때로 하나님께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하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소속이 어디인 것을 드러내는 행동을 합니다. 

시골에서 살던 두 사람이 도시로 나가 많은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마을 어귀에서 한 노인이 징을 들고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징을 쳐 주는 사람이라네. 보아하니 당신들의 남은 인생은 사흘뿐인 것 같소이다. 사흘째 되는 날, 해가 지면 내가 징을 치며 나타날 것이고 징 소리를 듣는 순간에 당신들은 세상을 떠날 거요.”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에 두 사람이 기가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고생고생 하여 돈을 모아서 고향에 돌아왔는데, 사흘밖에 못 산다니...’ 두 사람이 크게 근심하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사람은 그동안 벌어 모은 돈을 세면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면서 생각했어요. ‘사흘 후에 죽을 텐데 이 많은 돈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신이 번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몽땅 불태워버렸고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 못하고 가만히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사흘째 되는 날에 노인이 찾아와서 징을 치자 징소리를 듣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혼자 된 나를 고향 어르신들이 보살펴 주셨지. 내 인생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는데, 사흘 동안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고향과 어르신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세상을 떠나야겠다.’ 

그러면서 마을에 다리를 놓고, 학교를 세우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사흘 동안 바쁘게 공사를 진행하느라 징을 든 노인이 하는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마을 사람들이 마을에 좋은 일을 하는 부자에게 고맙다고 잔치를 벌였는데 풍악 소리가 나고, 동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할 때에 노인이 나타났지만 몇 번이나 징을 쳤지만 아무도 징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러자 징을 친 노인이 발걸음을 돌려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출생과 죽음 사이에 사는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잘 사는 사람일까요?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 할 것이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 땅에서 제한된 내 인생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이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가장 소중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인간은 매일과 영원 사이의 정점에서 살고 있는데 인생은 숨 쉰 횟수로 인생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매료되고 무엇에 압도되고, 무엇을 위해서 살았느냐? 이것에 의해서 삶이 평가를 받습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습니다. “인생을 잘 사는 길은 인생보다 더 오래 지속될 어떤 것을 위해서 삶을 불사르는 것이다.” 여기서 인생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영생의 은총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죄인이 만날 수 있는 복음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봉사하는 시간이 하나님께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구구 팔팔 이삼사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의 뜻은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일만 앓고, 3일째 되는 날 하늘로 돌아가자 는 뜻이고 ‘일십 백 천 만” 이란 말의 뜻은 “하루 한 가지 이상 좋은 일을 하고, 하루에 열 번 이상 웃고, 하루에 백자 이상 글을 쓰고, 하루에 천자 이상 글을 읽고, 하루에 만보 이상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구 팔팔 이삼사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두 연대(태어난 시간과 죽음을 맞는 시간) 사이에서 살아온삶에 대해 평가를 받습니다. 지금도 초침이 째깍째깍 하고 소리를 내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과거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인생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잘 사는 삶으로 평가를 받으려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계셔야 마음에 영원을 감지하는 감각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야 영생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불사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자기 인생을 영생하는 곳에 열정적으로 투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투자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자랑할 것이 있는 인생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까? 하는 문제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어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지금 가고 있는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신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것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이 질문에 대답치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어리석은 인생을 살다가 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적으로는 누구나 선망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쪽으로는 어리석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소출은 무진장하였고 창고는 작아서 더 크게 지어야 할 판이었으며 그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라. 이제 충분이 쌓아 놓았으니 먹고 즐기자. 이제 이만큼 쌓았으니 죽을 때까지 편히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인생을 즐기자. 얼마나 부러운 사람이고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요! 돈 걱정 않고 살아 봤으면 하고 누구나 생각 하는 것인데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꿈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멋지게 부러워할 수 있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가절하 하신 것입니다. 왜 그리도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을 주님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한 마디로 내가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 몰랐다는 데 있었습니다. 현실만 보았지 나의 존재와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첫째, 오늘이 그의 종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0절에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시 말하면 오늘밤 네 영혼을 다시 불러 가겠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종말도 모르고 덤빈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종말이 반드시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무엇이나 종말이 반드시 있다는 진리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했습니니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고 그리고 그날을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불치병이 걸리거나 아주 연로하신 노인 보고는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으나 세상에는 그런 분만 가는 것이 아니기에 자기가 자기 죽을 날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건강해도 먼저가고 젊어서도 먼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평소에 그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평소에 준비 한 사람에게는 갑자기 죽음이 와도 그것은 갑자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전혀 준비 없이 세상 즐길 일만 생각하니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재산 많고 건강하게 오래 살 것으로 생각했고 마치 죽음이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다른 집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겠거니 했을 것입니다.


둘째, 그 부자가 그토록 힘들게 쌓아온 물질이 결국은 자신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본문20절에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고 비참한 일인가요? 지금 나의 것이라는 물질이 나에게 있다 해도 그 물질이 항상 나에게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언젠가 내 손을 떠날 날이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나에게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었고 이 순간에 나에게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며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갈 것입니다. 

증권을 하는 분이 오르고 내리는 등락에 피를 말리면서 20억이 7000만원 되었다고 절망합니다. 20억이 내 것인가요? 다 날아가 버리고 7000만원이 남았는데 그것도 내 것인가요! 갖고 있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전부 두고 떠나야 할 것을 실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소유는 하지만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통장지기, 창고지기, 노릇만 하다가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꽉 쥐고 감추고 쌓아놓아도 그것은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리석은 자야, 네 물질이 빠져나갈 텐데 넌 창고만 넓히면 되느냐는 것입니다.

전도서6장1절에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일백 명의 자식을 낳으면 무엇 하는가! 자식 같은 자식이 하나도 없고 다 자기들 살 궁리만 하는데, 또 천년을 살아도 무엇 하는가! 아무 낙이 없는데. 그러므로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적게 가지고 있어도 심령에 낙을 누리고 참 평안과 내세의 보장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로만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채우는 것은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인 것입니다. 영혼의 평안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세상 것만 가진 자를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았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부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6장19절-20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땅에만 쌓아두면 어리석은 자요, 하늘에 쌓아 두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땅에만 쌓아두려고 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중품은 맡기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두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깊이 잠든 부잣집에 강도가 들어 흉기를 들이대고 죽을래, 내 놓을래 하면 백번이고 목숨만 살려주면 다 내놓겠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귀한 물질을 주는가요! 물질보다 생명이 더 귀하기 때문이며 이 진리가 우리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도둑이 들어와도 가져 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인격, 선행, 믿음 이런 것은 도둑질 하지 못합니다. 세상 물질은 다 도둑맞고 사기 당하고 잃어버리고 흘려버리게 됩니다. 먹고 살고 입고 살고 거처할 집이 있고 사람답게 살만하면 이제 하늘에다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29절-30절에"하늘나라 창고에 저축하는 것은 영원한 상급과 이 세상에서도 백배의 복을 받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해외 여행하면서 보면 달러를 많이 바꾼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 신경 쓰느라고 관광도,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방해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경이 곤두서서 늘 불안해하는데 불과 몇 푼 가지고 온 사람은 태평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다 잃어도 몇 푼 안 되기 때문인데 어리석은 부자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많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는 많이 쌓아두고서도 하나님께는 인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자신의 명예, 권력, 체면을 위해서는 거침없이 쓰면서 교회에는 수전노같이 인색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남은 것이 있을 때 하나님 일 하시겠는가!  

여러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아시는가!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로 가면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 되는 것이 정답입니다. 은혜 받을 때 은혜 받고 기회 있을 때 하고 상급 받고 축복받는 일에 신경 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도 하시고 뺏어 가시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우리 인생에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 있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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