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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도 화목합니다 (잠 16:6-7, 롬 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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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시게 하면 원수와도 화목합니다 (잠 16:6-7, 롬 5:9-10)


‘앞으로 생태는 동태로 하고 삼치는 꽁치로 구입할 것’. ‘교회는 나갈 수 없음. 불필요한 시간과 경비만 낭비할 필요가 없음. 앞으로 계속 교회에 나갈 때는 현관문 잠그고 절대 열어 주지 않을 것임. 각오할 것’. ‘두부는 비싸니 많이 넣어서 두부찌개 식으로 하지 말고 각종 찌개에 3-4점씩만 양념으로 사용할 것(국산 2개=2700원)’. ‘앞으로 오후 4시 이후 귀가 시는 절대로 현관을 차단할 것이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어느 할아버지가 부인에게 말을 하는 대신 메모지에 적어 보낸 쪽지 글들입니다. 이들 부부는 6년이 넘게 이런 식으로 메모지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해 오다 결국 지난 주간에 이혼 판결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80세이고, 부인은 76세인데 2008년 8월에 “깻잎 반찬이 상에 오르지 않았다”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폭행한 게 발단이 되어 메모지 생활은 끝나고 이혼 소송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쯤 되면 부부가 아니라 원수라고 하겠지요? 
  
어느 부인이 도저히 자신의 남편을 사랑할 수 없다고 목사님을 찾아와 면담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먼저 ‘남편이니까 남편으로 사랑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이 부인은 이미 이혼을 작정하고 있어서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다시 ‘친척으로 사랑하세요’라고 했지만 다시 ‘아니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으로 사랑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이웃으로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웬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부인, 다행히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원수 사랑이 가능합니까? 사랑하면 이미 원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라도 처음 아기가 태어나서 보면 전혀 예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닦아주고, 젖을 물리고, 안아주는 가운데 사랑하게 되고 절대로 버릴 수 없는 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쁘지 않지만 사랑을 베풀게 되면 사랑스런 존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서 한 단계 더 올라가면 화목하게 됩니다. 사랑의 결과가 화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서 원수된 것을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이며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6에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거룩함의 핵심으로 간주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20세기 그리스 정교회 수사인 스타레츠 실루안(Staretz Silouan)은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면 평안이 찾아온다. 원수를 사랑하면 자신 안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거한다고 확신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원수를 위한 최고의 사랑이 기도입니다. 원수를 위한 기도는 성경에 익숙한 주제입니다. 
  
원수를 위한 기도는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에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셔서 원수와 화목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스데반도 사도행전 7:60에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져 돌을 던졌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그 중에 사울이 후에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항상 원수에 대하여 좋은 말만 했다고 합니다. 어느 사람이 대통령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원수는 없애 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링컨은 웃으면서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버리는 걸요”라고 하였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목하게 함이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는 것입니다.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싸늘히 식은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로마서 5:10d-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사람 사이의 화목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리고 사람과도 화목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화목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첫째, 악에서 떠나는 것이 화목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잠언 16:6에는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합니다. 죄악이 속하여지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 화목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이 죄에서 멀어지게 되고, 악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 화목의 조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을 가지고 있는 동안 화목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라고 하는 말의 ‘떠나게 된다’는 히브리어는 ‘수르’로서 ‘떠나다’ 라는 의미 외에 ‘쫓아버리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악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 뿐만 아니라 철저히 악을 쫓아버려 멀리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악은 물러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쫓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3에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에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4:7에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합니다. 성경은 한 결 같이 악은 적극적으로 물리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는 단호하셨습니다. 마귀를 야단치시고 심하게 꾸짖고 내어 쫓으셨습니다. 마귀에게 “물러가라”, “나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악은 물러갑니다. 악한 존재가 얼마나 간사한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내어 쫓지 않으면 악은 물러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절대 화해나 용서 등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악한 마귀는 절대 화해하고, 화목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마귀에게는 이런 단어조차 없습니다. 마귀는 항상 화해하기보다 틈이 벌어지게 하고 다투게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절대로 악을 조장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욥기 34:10에는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라고 하여 성경이 이를 증명합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에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우구스티누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악에 대한 불감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기도와 스승 암브로시우스의 지도로 완전히 악에서 떠났습니다. 그가 악에서 떠났을 때에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였고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오래전 동창생은 험상 굳게 생겨서 항상 폭력 조직의 영입대상 1호였습니다. 실제로 이 친구는 폭력 조직에 가담하여 얼마 동안의 활동을 했습니다. 그 후에 개과천선하여 그 조직에서 탈퇴하려고 하자 조직원들이 얼마나 때렸는지 입안이 문자 그대로 누더기같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고통을 감수하고 조직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오래 전 일이기에 그래도 맞고 나왔지 요즘 같으면 죽어서 나왔을지 모릅니다. 악에서 떠난다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악에서 떠난 다음 하나님도 믿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조세형이란 이름을 아십니까? 그는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되어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지냈습니다. 어릴 때부터 좋지 못한데 손을 대어 20여 차례 소년원을 드나들었습니다. 80년대에는 ‘대도’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대단한 도둑이 되었습니다. 하룻밤에 수십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와 현찰을 훔치는가 하면 중앙정보부장의 집에도 들어갔다고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가 회심하여 98년에는 선교회를 조직하고 전도사가 되었고, 99년에는 어느 경비업체의 고문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일본에 가서 간증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일본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다시 구속되었습니다. 대도가 이번에는 좀도둑이 되어 다시 구속된 것입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김태촌이란 조폭 두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조직폭력의 두목으로 활동하다 어느 목사님의 도움으로 회심하여 신학공부까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회심하게 되었다고 간증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이권을 위해 협박을 하다가 공갈혐의로 다시 구속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악이 선보다 훨씬 힘이 셉니다.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 사람들은 선에서 악으로 돌아가기가 훨씬 쉽습니다. 악에서 떠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 화목입니다. 
  
필립 얀시는 “기분 좋은 일이면 죄악인 게 틀림없다”고 하였습니다. 악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해롭기 때문에 금지되었습니다. 악은 기분 좋은 일이고 재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악에서 떠나기 힘들고, 떠나기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금지합니다. 
  
악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입니다. 악을 떠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없으면 사람과 화목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싫어하시므로 악을 떠나지 않으면 화목이 없습니다. 
  
욥기 28:28에는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고 합니다. 잠언 16:6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합니다. 악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악은 결코 멀리 있지 않고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자연히 악은 떠납니다. 
  
소돔에 살던 롯은 악한 도시를 떠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천사의 지시로 떠납니다. 소돔을 떠나는 이것만이 살 길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미련하여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악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악한 도시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았던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오래 전 부르던 복음성가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처럼 세상으로, 악으로 뒤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악에서 떠나 주님께로 돌아왔던 인물들도 많습니다. 마태는 세리의 자리를 박차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잔해하던 율법주의자에서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발아래 옥합을 깨트린 여인은 창녀의 삶에서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악을 끊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멀리 볼 것 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둘째,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화목합니다. 

잠언 16:7에는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행위는 믿음에서 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쌓은 선에서 선이 나오고, 쌓은 악에서 악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악이 없는 하나님은 악을 행하실 수 없으며, 선이 없는 사탄은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내면의 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여인의 사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 여인이 부정한 여인인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원망하고 여인도 나무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선포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행위가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이 아닌 믿음이 구원합니다. 그녀의 사랑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성품유형이 행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밤에 물위를 걸어오실 때 예수님인 것을 알고 배에서 물에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귀를 칼로 잘랐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바르게 못 박히셨는데 자신도 똑같이 할 수 없다고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아마 이런 베드로의 행위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원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믿음은 행위 위에 구축되어서는 안 되지만 행위는 반드시 믿음 위에 구축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위를 정당화하고 행위는 믿음을 증거합니다. 행위를 떠난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간디는 “신념이 행동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블롱델은 “어떤 사람이 믿는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으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믿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부모가 딸의 남자 친구를 몹시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하고, 말끝마다 욕을 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습니다. “얘, 그 사람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구나”. 부모의 말에 딸은 “엄마,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면 왜 사회봉사를 500시간이나 하고 있겠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선행으로 포장된 봉사나 행위가 많습니다. 억지로 하는 선행도 있습니다. 혼자 착한 척하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꾸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위선적 행위는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는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순수성을 가진 행위여야 합니다. 
  
옛말에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은 글대로 읽고 나는 나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식이 삶이 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죽은 것입니다. 지식과 신앙이 있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의장국이 되어 지난 주간에 G20 회의가 잘 끝났습니다. 한국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지고 국격이 격상된 줄로 압니다. 어느 외국 전문가가 쓴 글을 보니 한국은 이미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대국이 되어 G20 의장국이 되었는데 정작 한국인들만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 사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의 지식수준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지식수준은 세계 최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지식사회로 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앙수준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교회와 교인들을 보세요. 대단한 신앙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신앙사회로 살지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지식,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영어권 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말하는 대로 행해야 한다’(Walk our talk)라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진정한 교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익한 말이 아니라 행동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대로 해야 참 이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에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순교로 잃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 안재선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목사님은 두 아들을 잃고 감사 봉헌을 하였습니다. “두 아들을 순교자로 주심 감사합니다. 1만 원정”. 지금도 애양원에 가면 그 봉헌 봉투가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1만 원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그 당시에 일반인 봉급이 한 달에 80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큰 아들 동인을 미국에 유학을 시키려고 준비하여 모아둔 돈을 전부 봉헌하였습니다. 이제 아들이 없으니 유학 보낼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인 안재선은 손재선으로 개명하여 손목사님이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는 48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못 다한 일을 한다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안경선 목사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사랑이나 용서는 머리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행위로 나타나야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9:1에는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온전하여 복이 있는 자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휴 레오나드는 “우리는 말다툼을 하지도, 싸우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원한을 쌓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장벽을 쌓는 일은 능숙하지만 다리를 놓는 일은 언제나 서툽니다. 우리의 화목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후에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맙시다.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읍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인종분리정책이 한참이던 남아공화국에서 30여 년 동안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넬슨 만델라는 “어떻게 억압한 사람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원한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도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각국이 전쟁 중입니다. 환율전쟁이 한참입니다. 인종전쟁이 한참입니다. 종교전쟁이 한참입니다. 도처에 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 주위의 갈등과 전쟁을 믿음으로 화목하게 하는 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원수와 화목하게 하는 제물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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