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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혹에서 분명한 비전으로 (합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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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에서 분명한 비전으로 (합 2:1-4)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한국에 와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 계셨답니다. 새벽 기도회도 나가지 않는데도 교인들은 날로 많아져 수천명의 교인들이 나왔답니다. 이 목사님은 미국에서 골프를 즐겼는데 일주일면 한 번 정도는 꼭 골프를 쳐야 속이 풀렸답니다. 그런데 4주 동안 비가 계속 오는 것입니다. 몸이 근질근질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행이 주일날 날씨가 맑게 개었답니다. 그래서 부목사에게 설교를 맡기고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먼 골프장에 갔답니다. 

베드로가 천국에서 이 광경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했답니다. “예수님 목사가 저절 수가 있습니까? 저것을 가만히 놓아둡니까?” “어떻게 저런 목사에게 교인을 수천명씩 맡깁니까?” 예수님이 빙그레 웃고만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골프장에 도착한 그 목사가 골프를 치는데 홀 인원을 한 것입니다. 평생 한번 할까 말까 한다는 홀인원을 했으니 목사는 좋아 벌떡벌떡 뛰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베드로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니, 예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벌을 주어야지 저 목사가 어디가 이쁘다고 홀인원까지 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야 저 목사 주일날 교회 비우고 골프장 가서 홀인원 했으니 누구에게 자랑하겠느냐? 자랑하고 싶어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행하고 부정한 사람들이 더 잘 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편법이나 불법을 쓰지 않고 영업을 하는 우리 회사는 잘 안되고 오히려 온갖 편법과 불법을 쓰면서 영업하는 경쟁사는 잘 되는 모습을 보며 의혹을 갖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잘 된다면서요 왜 악한 사람이 잘 됩니까?”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시더니 공평하지 않네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시더니 공의롭지 않네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의혹을 갖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의혹보다는 분명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가 바로 그런 의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박국이 가지고 있는 의혹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왜 악인들을 징계하지 않으시는가?”라는 의혹입니다(1:2-4). 

1장 4절을 보십시오.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정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을 때는 우리나라처럼 남북이 분열되었을 때입니다. 남쪽 나라 왕은 여호야김 왕이었습니다. 그는 포악한 왕이었습니다. 1:2-4에 보면 그 때는 강포(권력 있는 자의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학대) 간악, 패역(압박과 착취로 오는 수고와 곤고), 겁탈(파괴, 약탈, 살해) 등이 있을 때였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①애굽 왕의 호의를 얻으려고 많은 은과 금을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애굽에 바침으로 권력을 유지(왕하23:35 구약605)하였습니다.

② 왕하24:4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③자신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하여 궁전을 크게 짖고 이일을 위하여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였고 백성들을 압박하여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렘22:13, 14, 17 구약1085)
 
④(렘36:20, 23 구약1112)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를 화로에 던져 불태웠습니다.
 
⑤선지자 예레미야와 서기관 바룩을 잡아 없이 하려한 자였습니다.(렘36:26) 

렘 22:17에 의하면 한마디로 "네 눈과 마음은 탐람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할뿐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왕과 권력자들은 잘 먹고 잘 산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어느 때까지 입니까?” “어찌하여 이런 험한 꼴을 봅니까?”라고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남유다의 죄악을 결코 묵과하시지 않을 것이며 때가 되면 이방 민족 바벨론을(6)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남유다의 죄악을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1:5-11), 얼마나 후련한 답변입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답변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의혹은 더 깊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있어서 악한 세력이 사용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벨론을 통한 남유다의 심판은 원수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삼하 7 : 8-16)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왜 하필이면 남유다보다 더 패역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족속인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를 심판하시는가? '라는 것입니다.(1:12-17). 
그리고는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 나라가 언제 쳐들어 오는가 보기위해 성루에 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자신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말씀하십니다. 

2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합 2:2)”

오늘 이 말씀이 세상을 보며 의혹에 사로잡힌 우리 성도님과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의혹만 제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부분 영어 성경 번역을 보면 이 묵시는 the vision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 비전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남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잠시 바벨론을 들어 사용하실 뿐 바벨론도 결국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받아 반드시 멸망할 것이고 결국 의인의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2:1-20) 억울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화있을 진저(9,12,15,19)라고 선포합니다. 그런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억울함을 당합니다. 불의한 일을 당합니다. 그럴 때 “어찌하여, 어느때까지”라는 의혹만 제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찬 세상에 대한 비전을 품는 것입니다. 분명하고도 확실한 비전을 품는 것입니다. 막연한 비전이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판에 명백히 기록한 비전을 품는 것입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는 비전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혹을 가지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찬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의혹을 회의만 가져다 주지만 비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 채 이끌어 가는 힘이 있습니다. 

“20대를 변화시키는 30일 플랜”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연구소는 어느 사회에서나 65세 이상의 정년 퇴직자들이 3: 10: 60: 27이라는 비율로 경제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3%는 최고의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10%는 퇴직 전과 별 차이 없는 경제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60%는 간신히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고, 27%는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났을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3%는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목표를 글로 적어 놓고 수시로 꺼내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0%는 목표는 있었으되 글로 적고 수치로 꺼내 읽는 습관은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60%는 목표가 수시로 바뀐 사람들이었고, 27%는 목표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슷한 조사 결과가 예일 대학교에서도 있었습니다. 예일 대학교는 1953년도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은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종이를 갖고 있습니까?” 3%의 학생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97%의 학생이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20년 뒤인 1973년도에 1953년도 졸업생들의 경제력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3%가 나머지 97%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삶의 부조리, 불합리 때문에 고민하는 성도님 계십니까? 가정에 대하여, 직장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의혹만 품지 말고 구체적인 비전을 기록하고 미래를 꿈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회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비전을 품은 대안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의혹보다는 분명한 비전을 품었다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언제나 정의로운 사회가 옵니까? 언제 좋은 세상이 옵니까? 언제 선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 옵니까? 언제 악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까?라고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 보았지만 그런 세상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의혹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살면서 그런 의혹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바벨론을 통하여 유다를 징계한다고 하니 그날에 대한 의혹을 더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잘 못해도 내 아들을 남이 야단치는 모습을 보는 부모가 좋을 리가 없스니다. 이런 하박국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다시 말씀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합 2:3)”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때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하여 의혹을 품고 회의하며 방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거짓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더디게 보일 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징계 받을 세상, 물이 다가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세상, 좋은 세상, 공의가 실현되는 세상,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신천신지가 이루어질 세상을 더디 온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에 근거하여 분명한 비전, 기록된 비전, 구체적인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기다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이제 지구촌은 '강자'와 '약자' 대신 '빠른 자'와 '느린 자'로 구분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빠른 자는 승리하고, 느린 자는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속도전의 시대라는 말입니다. 냉장고도 '급속 냉각'을 해야 합니다. 인스턴트 음식도 몇 분 안에 완성되어야 합니다. 선거도 마감시간과 동시에 발표되는 출구조사를 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결과가 나오는데 그 많은 돈을 들여 출구조사를 합니다. 그 돈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해 구제하면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2, 3초를 참지 못해 '닫힘'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웹페이지가 로딩되는 1, 2초를 기다리지 못해 '뒤로' 버튼을 클릭합니다. 연애도 번개팅을 해야 합니다. 자판기 커피를 눌러 놓고도 못 기다립니다. 컵 나오는 곳에 손 넣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다 튀는 커피에 손을 데이기도 합니다. 복권도 즉석 복권을 사야 합니다. 사탕도 깨물어 먹어야 합니다. 그러다 이빨 부러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스크림 핥아먹다가 벌떡증이 나 못 견디어 베어 먹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입에 왕창 먹어야 시원합니다. 버스를 탈 때도 도로까지 내려가야 하고 택시 탈 때도 도로로 뛰어 내려가 문고리를 잡고 외쳐야 합니다. 차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조금만 늦어도 빵빵 거립니다. 

오랜 전에 장년 20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봉사할 때가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친구 목사님이 올라오셔서 전철 있는 곳으로 태워드리기 위해 서현역에 내려주고 4거리에서 좌회전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차 한 대가 빵빵 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지 않아 빵빵거리던 방방 거리던 신경 쓰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차가 우측으로 틀어 제 옆으로 지나가면서 창문을 열고 욕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집에 가서 애보라고 했는지 길에 자리 펴고 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창문을 열고 욕하는 얼굴을 보니 당시 제가 섬기던 교회 성가대원이었습니다. 

스피드 시대에 기다림은 지루함과 초조로 다가옵니다. 어리석음으로 매도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치기하고, 끼어들며, 갓길로 가고, 중앙선 침범하는 자가 현실 적응을 잘하며 융통성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자연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기다리지 못하면 비전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빠른 것도 필요하지만 인생은 기다림이 중요합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성숙도 기다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려면 50년 100년 기다려야 합니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이 땅에 태어나려면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약속에 근거하고 믿음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비전을 품고 기다림에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비전을 품었지만 기다리지 못하여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줄 것을 약속했지만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첩으로 맞이하여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인류에게 비극을 던져 주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예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때를 기다리지 못해 실패했습니다. 모세도 때를 기다리지 못해 살인자가 되어 실패했습니다. 야곱도 기다리지 못하여 수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간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전략품을 훔치다가 실패했습니다. 기다리면 전략품을 취할 때가 오는데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비전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며 비전을 가지면 기다림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비오기까지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10년을 기다렸고, 사울이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이 되기까지 무려 7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비전을 품고 17년을 기다렸습니다.
눈이 그리우면 겨울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7)"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 30:18)"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애 3:25)" 

기다리는 자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기다리면 비전이 이루어져 웃음의 날이 옵니다. 기다리면 인생 역전의 날이 옵니다. 기다리면 9회 말 홈런을 치는 날이 옵니다. 아무리 내 앞이 캄캄하고 지금의 상황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기다리면 밝히 보이는 날이 옵니다. 


3. 우리는 의혹보다는 분명한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다하면서 의혹을 품고 못 견디어 하는 하박국 선지자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불의한 시대에 의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와 의인을 댓구로 놓고 말씀합니다. 그의 마음은 불의한 자, 정직하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교만과 믿음을 댓구로 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정직하지 못한 악인은 그 교만으로 인하여 망할 것이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갈대인의 악한 자들은 망할 것을 말씀하고 유다 남은 자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의인된 자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7-38)” 

불의한 권력 로마의 압제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가야 했고, 화형을 당해야 했고, 칼에 찔려야 했고,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런 불의한 세상에서도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복된 삶을 살게 되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할 것을 말씀합니다. 비전을 품은 자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사람이 자신의 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하나님께의 약속에 근거한 비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불의한 세상이라도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에무나”라고 합니다. 이 “에무나”가 가지고 있는 뜻은 ‘견고하다, 강하게 버티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49번 나오는 말인데 모든 영역성경에는 신실함이란 의미로 Faithful, Faithfulness, Faithfully, truthful 이란 말로 번역되었고, 믿음이란 말로 번역된 곳은 오늘 하박국2:4절뿐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 비전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는 로마서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롬1:17, 갈3:11). 인간의 본질은 악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3절의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가 반드시 오실 것이요 그는 결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겠습니까? 히브리서 10장 36-38절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오실 이가 누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마3:11 요1:15,27,30 3:31 행1:25)

율법이나 도덕은 이 세상의 악을 절대로 고치지 못합니다. 율법이나 도덕으로는 죽어다 깨어나도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해답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교만하고 거짓된 악으로 가득찬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답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심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어도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실현이 지체되는 듯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의인이 고통을 당하며 억압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잠간일 뿐이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의인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악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단12:1-3). 그는 이제 태도가 달라집니다. “어찌하여” “어느때까지”라고 의혹을 품고 탄식한 사람이지만, “없을지라도 ”라고 감사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합3:17-18절에서 하나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힘이 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를 결국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에 힘든 세상에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신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생깁니다. 이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죽일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어떤 부조리한 세상일지라도 좋은 세상,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짜 믿음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는 이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는 그 날이 분명히 올 것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행사에는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나는 믿는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유대인 600만명이 무참하게 죽음 당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작사 작곡되어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간단한 가사를 계속 반복하여 부르는 찬송입니다. 

자신의 동료들이,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 딸이, 형제들이 가스실에 끌려갑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은 이 찬송 뒤에 한 절을 더 넣어서 불렀답니다.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한 외과의사는 절대로 그 마지막 가사를 부르지 않았답니다. 그는 확실히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단정히 행하고 죽음을 앞둔 시간이지만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가면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믿음으로 섰답니다. 그는 마침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오게 되었답니다. 나오면서 그는 마지막 절을 고쳐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너무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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