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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배에서 섬김으로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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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에서 섬김으로 (마 20:20-28)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돈 많은 분이 질병에 걸렸답니다. 병원에서 고칠 수 없는 질병에 걸린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면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질병을 고치려 교회에 나가게 되었답니다. 목사님께 말했답니다. “목사님, 제 질병이 치료되어 생명이 연장된다면 제가 교회를 건축하겠습니다.” 개척교회 목사님은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기도를 하였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질병이 깨끗이 나은 것입니다. 약속대로 땅을 사고 교회를 건축했답니다. 교인은 많아졌고 그분은 그 교회 장로가 되었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을 교인들에게 자랑했답니다. 땅을 사고 교회를 건축한 분이 장로님이라고 새로 오는 사람에게 소개했답니다. 사람들이 장로님을 잘 섬겨 주었답니다. 무엇을 하든 앞세워 주고, 식당에서 식사할 때도 따로 장로님 방에 차려 주었답니다. 교회에서 왕처럼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큰 교회 목사님은 제국의 황제처럼 대접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연세가 들어 돌아가셨답니다. 천국에 간 것입니다. 천국식당에 가서 앉아있는데, 30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와서 뭘 드시겠냐고 물어보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참다못한 장로님은 지나가 버리는 한 종업원을 억지로 붙잡고 따졌답니다. "왜 물도 갖다 주지도 앉고 뭘 드시겠냐고도 물어보지도 않는 거요? 천국 서비스가 뭐 이래요? 천국이 우리 교회보다 못하네요?" 

종업원이 하는 말, "장로님, 여기는 셀프서비스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장로님이 다시 질문했답니다. "그러면 왜 저기 있는 사람들은 셀프서비스가 아니고, 종업원들이 서비스를 직접 하는 거요?" "아 저분들 말입니까? 저 분들은 집사님들과 평신도들입니다. 저분들께서는 지상에서 서비스를 항상 남에게 베풀고 남을 잘 섬겼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종업원의 이 말에 장로님은 황제처럼 대접을 받았던 목사님을 생각하며 다시 물었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어디에 있소? 보이지를 않는데..." 

종업원이 말했답니다. "아 그 목사님이요? 지금 막 배달 나가셨어요." 

사람들은 섬김 받기를 좋아합니다. 이룬 성과와 업적으로 끝없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출세하는 것도 섬김을 받으려고, 지방 자치단체 장이나 의원이 되는 것도 섬김을 받으려고, 교회를 건축하고 부흥시키는 것도 섬김을 받으려고, 사업을 크게 하는 것도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섬김받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 때 유행어였던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이 함께 쓴 '승자독식사회’에 의하면 사람들은 몇 달러 혹은 몇 십 달러를 더 내는 한이 있더라도 최고 가수 음반을 구입하지 보통 이상의 재능을 보이는 가수 음반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최고로 예쁘고 잘생기고 재능 있는 연예인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됩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만 모든 관심이 집중됩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 동메달도 대단한 것인데 금메달 못 땄다고 눈물을 흘립니다. 기업도 그 분야에서 최고만 알아주고 책도 베스트셀러만, 심지어는 교회마저 최고의 교회만 찾고 있습니다. 결국 왜 그렇습니까? 그 최고의 자리가 최고로 섬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자 독식 사회가 행복합니까? 95%는 루저가 되고 5%로만 살맛나는 세상이 아릅답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음을 삶으로, 죄악의 문화를 의로운 문화로, 노예의 삶의 자유의 삶으로, 불행한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우리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복된 세상으로 변화시키길 원하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인생의 목적을 섬김에 두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여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켜 지상에 메시아 왕국을 건설되면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고 싶어 했습니다. 권력을 잡고 싶었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청탁을 하였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 아들 최고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머니 마음입니다. 이분은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의 이모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 사촌간입니다. 부자입니다.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선주로 많은 직원을 둔 사람입니다. 집이 두 채나 있습니다. 시골에도 있고 예루살렘에도 있습니다. 이층집입니다. 제자들이 모여 기도한 집입니다. 120명 정도가 모인 다락방이 있는 큰 집 부자집니다. 최고의 가정을 지향하는 집이었습니다.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날따라 절을 하며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상하여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우의정 좌의정으로 삼아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청만은 아니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직접 간구하였습니다(막10:35) 이것을 지켜본 제자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24절에 보니 열두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들도 똑같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목적이 우의정 좌의정에 있었다는 속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 결혼한 목적, 정치하는 목적, 교회 다니는 목적, 사업을 하는 목적, 정치를 하는 목적, 공부 열심히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바로 섬김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결론적인 말씀을 보십시오. 28절에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7)” 

밑줄을 그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비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섬김을 받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을 섬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섬김의 비전, 섬김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세상을 품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 우리를 유혹합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최고가 되라고 말합니다. 섬김받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한 번 사는 세상인데 멋지게 권력과 돈을 쥐고 섬김받으며 살아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고 사는 삶이 훨씬 가치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 됨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나라의 특징입니다(25).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 원리를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나 섬기는 것보다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최고가 되기를 원하고 최고를 좋아합니다. 자신을 대접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쾌하게 생각합니까? 교회의 직분을 서열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목사 시절 여름 성경학교를 앞두고 교사 헌신 예배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가장 먼저 된 장로님을 순서에 넣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육위원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위원에 들어있는 장로님들로 순서를 짰습니다. 예배가 다 끝나고 사무실에 내려와 노발대발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이 교회를 움직이고 누가 교회를 이끌어 가느냐?”는 것입니다. 개척 맴버이고 수석장로인데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것입니다. 알아서 섬겨 달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라고 말했듯이 인간은 정치적이며 그 밑바닥에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다. 니체는 "이 의지가 존재의 가장 심오한 본질이며 삶의 근본 충동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모든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 즉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인간의 본성은 바로 우월함에 대한 열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권력을 차지하고 하는 사람의 욕구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좋은 세상 행복한 세상은 섬김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사람이세상이 왜 이렇게 힘들고 살기가 복잡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원리가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농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섬기는 비전을 가지고 일하면 됩니다. 

우리 정치가 왜 이렇게 낙후되어 있습니까? 섬김의 정치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정치도 섬김의 정치로 거듭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섬김은 섬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을 위하여 또 다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준 건강, 나에게 준 지식, 나에게 준 미모 나에게 준 경제, 나에게 준 달란트를 가지고 참으로 멋지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보고 가겠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를 품고 섬겨야하겠다는 비전 말입니다. 

어려움과 고통당하는 이웃을 품고 섬겨야 하겠다는 비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섬겨야 하겠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창조 질서의 원리입니다. 최초의 인간을 보십시오. 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 2:20)"입니다. 

도와 주라고 즉 섬기라고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 섬기라고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가족들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교회 직분 왜 주었습니까? 계급으로 주었습니까? 서열로 주었습니까?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2)"라고 했습니다.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하루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동안 행복하려거든 여행을 하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거든 집을 사라. 일 년 동안 행복하려거든 결혼을 하라. 일평생 행복하려거든 이웃을 섬기라" 

섬김의 비전을 품고 삽시다. 마음에 새장을 품으면 새는 언젠가 날라 들어옵니다. 섬김을 품으면 섬길 수 있는 대상이 생기고 섬김만한 능력이 주어 줄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김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2. 복된 세상으로 변화시키길 원하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김의 방법을 낮아지는 종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와 함께 좌의정 우의정을 요구할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방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섬김이 아니라 섬김받는 이 땅의 정치적 왕이 될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섬김의 방법으로 예수님이 택한 목숨까지 버리는 그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말은 잘합니다. 그 자리가 탐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고 그 자리에 오르는 희생과 수고, 고난은 회피합니다. 심는 수고 없이 열매만 거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장담하던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떻게 합니까? 다 도망갑니다. 

섬김의 비전이 있다면 섬김을 인생의 목적으로 삶았다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섬김을 실천하였습니다. 우리를 그 정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돈도 주고 집도 줍니다. 그러나 목숨까지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희생을 통한 섬김의 실천력입니다. 실제로 고통을 감당하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섬겼습니다. 섬김을 위해 희생을 감당하였습니다. 섬김을 위해 수치를 감당하였습니다. 섬김을 위해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섬김을 위해 비난과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종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발을 씻긴 것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섬김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섬김은 머리에서만 있으면 효력이 없습니다. 실행될 때 빛이 되고 향기가 됩니다. 우리도 주어진 것으로 예수님처럼 섬김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섬긴다는 말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대표적인 의미는 "식사 시중을 하다", "돌보다", "부양하다", "돕다"라는 말입니다. 섬기는 것은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하는 것입니다. 힘이 듭니다. 그러나 실천하면 가정이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 

오랜 전에 대학교수인 집사님께서 저에게 상담 좀 하자고 했습니다. 아내와 이혼을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교사로 같은 부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를 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내가 부자집 외동딸이라는 것입니다. 시집을 왔는데 정리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퇴근하여 집에 들어가보면 스타킹, 속옷들이 방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쓰레기장이라는 것입니다. 13년 동안 참고 살았는데 이제는 도대체 살 수가 없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고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가정이 천국처럼 변하겠습니까? 성숙한 사람이, 알고 있는 사람이 섬겨야 합니다.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려면 변합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뀌지 않는다고 불평만하고 원망만 하면 변하지 않습니다. 

섬김은 내 입장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완전한 모습을 보고 섬겼겠습니까? 죄 가운데 있을 때, 구역질 날 정도로 모순된 삶 속에 있을 때, 이기주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울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섬겼습니다. 섬김은 남의 입장에 서서 낮아지고 희생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 교회에 등록한 집사님 댁을 심방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 등록하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내가 필요로 하는 교회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신앙이 참 성숙한 분이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목요일 등록한 집사님 댁을 심방하였습니다. 젊으신 분인데 점심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요즈음 같은 시대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섬김에 훈련이 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 교회에서 참으로 잘 섬기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사 오기 전 구역 식구들이 떠나고 홀로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홀로 아무 말 없이 식당 봉사하시는 집사님을 보았습니다. 교회에 나와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깁니다. 꽃꽂이로 차량운행으로 주보로 섬기시는 분들을 봅니다. 사례를 드리지 않지만 성가대 지휘자라고 반주자라고 말없이 섬기는 성도님들이 아름답습니다. 많은 헌금으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섬기는 성도님들도 계십니다.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해 세계를 품고 섬기는 운동을 합니다. 시골 교회, 소년 소녀 가장, 불우 이웃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누가 더 섬김은 받느냐로 경쟁하는 교회가 아니라 누가 더 잘 섬기느냐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물결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 즐겁게 섬기는 섬김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데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섬길 만한 것이 없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섬기면 됩니다. 경제력이 있으신 분은 경제력으로 섬깁니다. 지식이 있는 분들은 지식으로 섬기면 됩니다. 권력이 있으면 권력으로, 건강이 있으신 분들은 건강으로 섬기면 됩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쓰임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고 기쁜 일입니까? 오병이어 5천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같습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음식이지만 그것이 섬김의 도구로 쓰이니까 5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 목자로 있을 때 쓰던 것입니다. 익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섬김의 도구로 쓰이니까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통해 수많은 생명을 살려 냅니다. 아무리 좋은 구술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Warren Wiersbe 목사님은 “오늘날 교회 속의 슬픈 현상은 유명한 사람들은 많지만 종들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이라고 했습니다. 
D. L. Moody 목사: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데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가에 따라 판가름 난다.”라고 했습니다.


3. 복된 세상으로 변화시키길 원하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김 결과는 박탈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섬겨야 합니다.

사람들은 섬기면 손해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열심히 섬기려고 노력합니다만 때때로 너무 순진하고 세상적으로 볼 때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때로는 화장실 청소도 합니다. 화단에 꽃도 심고, 나무도 심습니다. 걸레로 예배당 의자도 닦습니다. 새벽 차운행도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을 위해 10년 넘게 무료로 정보를 제공합니다. 성도들을 위해 무료로 큐티집 봉사를 합니다. 15년 넘게 대학교에 나가 무료로 봉사합니다. 

목회 생활 30여년을 하지만 부목사님이나 사례금 별 차이 없이 받습니다. 제가 200만원 부목사님이 180만원 받습니다. 내 앞으로 등록된 재산이라고는 17년 쯤 된 엘란트라 차 한 대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대접해 줍니까?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배하는 자 앞에서는 사람들이 굽신 거리지만 섬기는 자 앞에서는 사람들이 머리를 듭니다. 
목사가 뭐 그런 일까지 하느냐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섬김의 결과는 세상 사람들이 비웃어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고 결국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올라가려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 자리는 아버지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차지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법칙입니다. 26, 27절에 섬기는 자가 오히려 크게 되고, 종이 되는 자가 오히려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섬기는 것이 박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며 섬기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섬김이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섬김이 오히려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김의 도를 가르쳐 준 후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4-1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섬김의 도를 알고 행하면 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보면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1)” 언젠가는 상급받을 날이 오고야 맙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7)” 우리의 섬김의 눈물을 다 씻어 줄 날이 오고야 맙니다. 
세상에서도 섬기면 손해되고 박탈되며 없어지는 것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도 서비스가 우수한 회사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최상의 서비스"라는 책을 쓴 발 지(Val Gee)는 "고객의 68%가 단골이 되지 않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나쁜 서비스 때문이다. 한 사람의 불만 고객이 10-20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서비스도 상품이다 "를 쓴 칼 알브레히트는 "우수한 제품을 미흡한 서비스로 제공하느니, 차라리 평범한 상품을 우수한 서비스로 제공하는 편이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서비스의 황금률을 "당신이 고객일 때 받고 싶은 대접 그대로 고객들을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섬김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회사가 잘되고 섬기는 가정이 행복하고, 섬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섬기는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1등만이 기억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닙니다. 1등도 다 잃어 버립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들은 오래 도록 기억됩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주어진 인생 섬기지 않아도 썩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후회 없이 섬기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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