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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사람(2)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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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마태복음 5:1-12)

  
얼마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사건이 아나 있었습니다. 부산의 어느 낙후된 동네에서 재개발을 기다리며 많은 사람들이 떠나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그곳을 우리가 주목한 까닭은 그곳에 살던 한 여중생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소녀는 많은 이들이 우려하던 것처럼 죽음으로 발견되었고, 이번에는 사람들은 그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사람에게로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마침내 그가 폐허 같은 그 동네에 은신해 있다가 붙잡혔을 때, 모든 증오와 분노가 그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오랫동안 도망을 다니느라고 초췌한 몰골로 나타났을 때, 그리고 그의 라이프스토리가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분노만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김길태인데... 길태라는 이름은 단지 그가 길에 버려진 것을 지금의 부모가 된 이들이 고민 끝에 데려다가 키우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해서 길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니... 그리고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 자신의 기구한 출발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이미 그는 자기를 버린 세상과 담을 쌓고 고립된 생활을 시작하였다는 겁니다. 그 후부터 교도소를 드나들기 시작해서 자기가 살아 온 삶 가운데서 1/3을 교도소에서 보냈고... 아마도 이후로는 더 이상 햇빛을 볼 수없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건강이나 젊음을 선하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지를 못하고,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노리고 있다가 치밀하게 그들을 괴롭히는 일을 하면서 삶의 대부분을 살았던 그를 생각할 때, 가슴 한 켠에서는 연민의 마음이 생기는 것도 부인 할 수가 없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다 은퇴를 하신 정진홍 박사는 이런 김길태의 삶을 지난 주간에 세상을 떠나신 법정 스님의 삶과 연결을 시키면서 ‘우리들도 모두 길태가 아닌가? 길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그것도 길 없는 길에서...’라는 물음을 우리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저도 길태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된 순간 오래 전에 읽었던 전혜린의 수필집에서 그녀가 자기를 소개하면서 했던 아스팔트의 아이(aspalt Kind)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느라고 마음 붙여 살만한 고향을 가지지 못한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불안정하기만한 삶을 가리켜서 아스팔트의 아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였던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아마 우리들도 정진홍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길에서 태어난... 그것도 길 없는 길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남은 여섯 가지 행복의 이유들 중에서 세 가지 덕목들...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틈틈이 이 세 가지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 가운데 새겨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만일 우리들 모두가 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또는 마음 둘 곳 없이 이리 저리 헤매이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이러한 우리들의 근원적인 불안함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행복의 조건 속에 담겨 있지 않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 세 가지 행복의 조건들은 모두 사람들과의 관계를 따스하게 해주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열어 놓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v.5) 예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누구를 향해서든지 마음을 열어 놓고 가깝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과도 통합니다. 온유한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따스함과 부드러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향하여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항상 간직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에서는 어떤 단호하고도 분명한 신념이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단호한 신념이나 삶의 원칙같은 것들이 드러날 때에... 그것은 항상 부드러움과 따스함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온유한 마음을 말할 때 언급하게 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온유한 사람의 대명사로 나옵니다.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민수기 12:3) 여기서 겸손함은 온유함이라고도 번역 할 수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형제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지도력을 비판하고 자기들도 모세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나섰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변호하시고, 그들을 책망하시는 대목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제껏 존재하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모세처럼 온유하고, 모세처럼 겸손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는 그렇게도 철이 없고 불평불만 투성이인 이스라엘을 다독거리기도 하고, 하나님께 사정사정 해 가면서 가나안의 입구까지 이끌어 온 사람입니다. 자기도 인간이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화를 낸 것이 화근이 되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끝까지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길에서 흔들림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이렇듯 어떤 형편 속에서도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 모세였던 것이지요. 
   
신약 성경에서 온유함을 말할 때에 생각나는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마태11:28-29)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온유함에 대하여 깨닫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고통이나 무거운 짐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이려하는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은 받아들일 수가 있지만... 당신이 지닌 고통이나 아픔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그와는 반대되는 마음가짐입니다. 네게 아픔이 있고, 무거운 짐이 있기에 나에게로 오십시오. 내가 함께 당신의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우리는 여기에서 온유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런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때에...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시편37편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시37:11) 

시편 37편은 악인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실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인간다움도 잃어버리고,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몰두하는 사람... 한 때는 이런 이들이 득세하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바로 온유하고 겸손함 사람들이다... 그들은 땅뿐만 아니라 평화도 누리게 될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그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암만 생각해 보아도 부드러움이나 따스함이란 세상을 살기에는 손해를 많이 볼 수밖에는 없는 마음들입니다. 어쩌다가 여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좋다가도 한편으로 걱정이 됩니다. ‘저렇게 물러 터져서 어떻게 세상을 사나...’ 이러면서 우리들도 마음의 끈을 다시금 붙잡아 매게 됩니다. ‘강해지자... 독해지자...’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강해지고 독해진다고 해서 삶이 나아지거나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럴 바에야 주님처럼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말하자면...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항상 간직하며 사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들에게 내려 주실 복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비록 세상에서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온유함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로 채워지기를 희망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v.6)
적당한 굶주림이나 목마름은 우리의 더 낳은 미래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가 했던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구지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무엇인가가 내 배를 가득 채우고 있다면... 우리들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은 오로지 잠자는 일 밖에는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넘치고 풍족한 것보다는 좀 모자라는 듯한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투지와 삶의 의욕을 불태우는 동기를 제공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주리고 목마른 것은 오히려 포만감을 가지는 것보다는 더 좋은 일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잠들지 않고 깨어 있게 하니까요.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대체 무엇에 대해 굶주림을 느끼고 목말라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도무지 만족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자꾸만 도전하게 하고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시도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쟁에서의 승리나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히딩크의 목마름처럼 말이지요. 아마도 우리는 이런 목마름도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좀 더 즐겁게 살고 싶어 하는... 또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이러한 목마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저마다가 가진 욕망이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하여 지금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구석에는 좀 색다른 것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옛날 김지하가 가졌던 목마름은 히딩크의 목마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지었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래로 부르기도 했었지요.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이 세상 한 구석에서 사람으로서 느끼는 주림과 목마름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아마 이 시를 읽으면서... 나에게도 그런 목마름이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바로 이것이 예수가 보았던 참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살면서 느껴야할 목마름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공이나 승리에 대한 열망도 아닙니다. 세상을 즐기면서 살려하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에 대한 목마름도 아닙니다. 단지 ‘의’에 대한 열망과 목마름... 그것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인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마태6:33)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의’라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가 잘 사용하는 말이면서도 쉽게 잡히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라는 말에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올바름입니다. ‘저 사람은 참 의로운 사람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올바름을 보았을 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말 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한 곳으로 치우쳐 있지를 않고 바르게 세워져 있을 때에 우리는 의를 말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의라고 하는 말에는 관계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다시 말하면 올바름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며, 사람들과도 한 곳에 치우침이 없이 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에 대한 목마름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다른 이들이 주어진 삶을 어떻게 하면 많이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욕망을 달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을 더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이런 것에 뜻을 두고 산다면 그는 그런 것들을 넘어 서서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있을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나의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은 이렇게 세상을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것 저 것... 나의 욕심을 채우다 보면 우리들은 나 자신도 바르게 서지를 못하게 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 깨어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비움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다름 아닌 배부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설적인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사롭고 통속적인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가난해져야 하고 배고프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복이 바로 배부름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각에는 채우고... 소유하고... 이런 것을 통해서 배부르게 될 것 같은데... 진정 배부름의 비결은 버리고 비우는 일에 있다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바로 그런 것에서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음을 통해서 배가 부르기를 바라고 만족을 바란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는 결코 만족이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치 바닷물을 퍼 마시는 것과 같다고 누군가는 표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 배부를 때... 가슴 뿌듯하고 만족감을 느끼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 입니까? 더 높은 가치를 위하여... 더 고상한 목적을 위하여... 더 품위 있고 고상한 삶을 위하여... 나의 욕망과 소유를 버릴 때... 사실은 그 때가 가장 만족하고 배부를 수 있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가 목말라하고 속이 허한 것 같다면... 그것은 무엇을 향한 목마름인가요? 우리는 왜 항상 배부르지를 못하고.. 만족하지를 못하고... 공허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여기에 참된 해답이 있지 않을까요?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v.7)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자비 또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이라는 덕목이 ‘의’에 이어서 나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의에 집착하다가 보면 사랑을 잃어버리기가 참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의도는 참 좋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래가 도저히 희망이 없어지게 되니까 그들은 자기들만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기대를 한 것이지요. 하지만, 율법에 대한 열심히 그들을 그릇 된 방향으로 끌고 가고 말았습니다. 자기들만의 의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경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리새’라고 하는 말 자체에 그런 위험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 세리와는 다릅니다...’ 예수가 풍자하셨던 바리새인의 모습... 그것이 바로 그들의 실상이었습니다. 자기들만의 상대적인 의에 사로 잡혀서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람들이 예수를 향하여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된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어떤 것일까요? 물론 예수는 사람들 앞에서 놀라운 능력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그는 참으로 탁월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보았던 전부였을까요? 이러한 모든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예수의 탁월한 능력...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끝없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알게 되었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의 모든 아픔과 상처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들 가운에 임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고 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행하신 동기도 우리는 사랑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 가운데는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며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그들을 치유하는 능력의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에게 예수와 같은 능력은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셨듯... 그런 사랑만 있다면... 우리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대할 수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은 그만큼 그 마음속에 사랑이 많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있을까요? 
   
이렇듯 예수가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항상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려 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랑으로 대하실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태6:12) 기도를 반복할 때마다 우리를 참 부끄럽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사실 기도는 이렇게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예수는 이런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왕에게 신하가 있는데,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평생을 지낼 형편이었는데... 왕아 그의 빚을 탕감해 주어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다짜고짜로 자기에게 진 빚을 갚으라며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기가 막히게 생각한 사람들이 왕에게 알렸고 분노한 왕은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마태18:23-35)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안겨 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랑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용서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대하고... 먼저 용서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하심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사랑에 대하여 더불어 사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화답한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미움이나 갈등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산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화답하듯... 우리의 작은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낳는 불씨가 되는 것이지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을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너를 바라보고 자비를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더욱 더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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