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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사람(3)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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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마태5:1-12)

  
얼마 전에 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장례식을 지켜보는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어서도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 것인지...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마치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권위 앞에 복종하고 선선히 그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생전에 많은 글을 쓰고, 많은 말을 하였지만... 죽음을 통해서 가장 힘 있는 말을 사람들에게 남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세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화려한 장식이나 그의 삶을 꾸며주는 아름다운 미사여구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은 이제껏 그 어떤 죽음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당당함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서 마치 김수환 추기경님이 세상을 떠날 때처럼 슬퍼하고 그가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 개신교에는 그런 분이 없을까? 매일 같이 감투를 놓고 싸움박질만 하기에 여념이 없는 감리교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숨이 턱턱 막혀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우리 감리교 목사 중의 한 분인 이현주 목사의 교회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현주 목사님 정도면 그래도 법정스님처럼 유명하지는 않아도, 법정스님과 견주기에 손색이 없는 분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하게 자라나서 어렵게 목사가 되신 분인데... 책도 많이 쓰고 깊은 영성이 있는 책들을 많이 번역해서 우리들에게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새는 감리교회 보다는 성공회나 성당 같은 곳에서 더 유명한 목사가 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최근 몇 년 동안 하나의 실험적인 교회를 시도하였습니다. ‘드림실험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교회였는데, 인터넷을 통해서 예배의 장소를 공지하면 뜻 있는 사람들이 찾아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경치 좋은 산에서도 모이기도 하고, 광주의 5.18묘역이나 용산 참사의 현장과도 같은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최근 이런 실험적인 시도를 중단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 너무 많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나 목사님들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우리는 그저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고 많이 모이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하나님께 자기를 드린다는 의미를 가진 드림교회를 처음 시작하면서 밝혔던 시작의 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드림실험교회는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실현코자 한다. 그 밖에, 다른 어떤 목적도 지니지 않는다. 
2. 드림실험교회는 현존하는 어느 교파나 종파에도 소속하지 않는다. 
3. 드림실험교회는 유형 무형의 재산을 일절 소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배당이나 교육관 시설을 따로 가지지 않고 교인명부(교적부)도 만들지 않는다. 
4. 드림실험교회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일들은 아래 다섯 가지다. 
ㄱ. 하느님 예배 ㄴ. 교육 및 훈련 ㄷ. 이웃 섬김 ㄹ. 성도의 교제 ㅁ. 치유  

우리는 교회를 말할 때에도 얼마나 많이 모였는가? 얼마나 큰가? 이런 것들에 익숙해져 있는데... 그가 추구하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큰가? 생각해보면 이것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예수의 정신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예수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마태18:20)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예수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많이 모이는가? 적게 모이는가? 큰가? 작은가? 예수는 그것보다는 그들 속에 내 정신... 내 마음이 있는가? 이것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항상 바쁘고 분주합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이지요. 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좀 더 큰 것을 이루어 보려고 우리는 늘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거리에 나가보면 어디를 가든지... 얼마나 차가 많은지... 도대체 이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느라고 이렇게 바쁠까? 물론 저도 그들 중에 섞여 있지만,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관심사는 내가 무엇을 이루는가? 하는 것(doing)에 있기 보다는 내가 무엇이 되는가?(being)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되어 가려고 할 때...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사람으로 되어갈 때...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에 묵상하는 십자가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기쁨을 안겨주었을 텐데... 할 일도 많은 사람이 왜 그리 일찍 죽었을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바울의 말을 빌자면 십자가는 어떤 이들에게는 거리낌의 대상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미련함의 상징입니다.(고린도전서1:23)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다시 말하자면 예수가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기를 맡겼을 때... 이제는 더 이상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셨을 때... 바로 그것이 십자가인데... 십자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바울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4) 
   
사순절을 보내는 동안 이런 것을 좀 생각했으면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만 하지 말고... 더 신실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도록 자기를 살피는 것입니다. 진정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이 자리가 온전히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가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이제껏 우리가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이 되면 다 녹아 없어지는 것과도 같은 일입니다. 

지난 겨울동안 참 눈이 많이 왔고 우리는 그 눈을 치우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봄이 되니까 그 많던 눈들이 다 녹아 없어지게 되고... 식물들은 눈이 녹은 물 덕택에 조심스럽게 생명을 싹틔우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이지요. 내 마음이 봄이 될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며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아름답고 소중한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팔복을 함께 나누면서 깨닫게 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되면... 온유한 마음이 되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각박하고 삭막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의 주변이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팔복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선명하게 밝혀주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v.8) 예수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자기의 마음이 깨끗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차라리 몸이 깨끗한 사람은... 이렇게 하든지, 옷이 깨끗한 사람은... 이렇게 예수가 말씀을 하셨으면 그래도 좀 괜찮을 것 같은데... 예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말하십니다. 마음은 사실 우리가 좀 덜 신경을 쓰는 부분이지요. 외출할 때에 옷차림을 본다든지... 얼굴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살피는 일은 있어도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우리들이 신경 쓰는 겉모습 보다는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어떻게 음식을 먹으면서도 손을 씻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들은 단지 위생적인 이유 말고도 제의적인 면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사람의 내면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손을 씻어야 했고, 그것은 하나의 예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의사가 수술 전에 손을 씻듯 그렇게 손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것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지요. 그냥 듣고만 있을 예수는 아니었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온다.’(마태15:19)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정말 깨끗하게 씻어야 할 것은 손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씻는다고 해서 쉽게 씻을 수가 있는 것인지... 
   
오늘 예수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말할 때에... 우리는 깨끗하다는 것을 동기의 순수함을 통해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란 곧 동기가 순수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고 할 때... 여기에는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복잡하지 않은...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내거는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그가 정말로 추구하는 것은 명분과는 많이 다른 경우이지요.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만일 어떤 정치가가 정권을 잡고 나서 ‘개혁을 하겠다... 사회정의를 세우겠다...’ 이렇게 말할 때에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반대파를 정리한다든지... 자기가 정권을 잡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다든지... 아니면, 자기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을 협박해서 길들이는 수단이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그가 내거는 명분과 실제로 추구하는 것이 일치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고,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동기가 순수하고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단순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얽혀 있고, 너무나 많은 것을 얻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말하는 것들이나 행동하는 것이 순수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내가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들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손해가 될까? 이익일까?’ 이런 것들을 따지다 보면 순수함이나 깨끗함과는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좀 단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왜 사느냐?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까닭이 무어냐?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답을 알고 살았습니다. 예수를 지탱했던 삶의 동기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살아가는 까닭을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요한복음4:34)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예수는 밥을 굶어도 배고프지 않았고, 아무리 피곤하다가도 힘이 솟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화답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단 하나의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고린도전서10:31) 이렇게 우리가 좀 단순해 질 때...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나 동기를 하나님께 둘 때에 우리는 마음이 깨끗해지고,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에 다가서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예수는 이야기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 단순한 동기와 선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과연 축복인지... 우리는 먼저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유한한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환상 가운데서 하늘 보좌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이제는 죽었구나... 죽는 일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이사야6:5)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들고 내려왔을 때, 그 얼굴이 빛났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늘의 빛으로 가득한 모세의 얼굴을 보는 것도 무서웠습니다. 모세는 하는 수 없이 한동안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우리가 복으로 생각할 수가 있는지... 우리는 햇빛조차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성도들에게는 궁극적인 희망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고전15:12) 바울은 이렇게 주님을 온전히 보게 될 그날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이 땅에서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느라고 애를 썼던 성도들의 희망이기도 하였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 그것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공포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에 있을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산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원하고 근원적인 행복과 기쁨 속에서 세상을 살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사는 사람들... 허황된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 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세상을 살려 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시는 진정한 생명과 하늘의 기쁨과 위로가운데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v.9)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들 중에서 아마 평화만큼이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말이 또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평화일 것입니다. 

평화라고 하면 아무런 갈등이나 싸움이 없는 상태를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가 하는 노력의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머지않아서 우리나라가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무기를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될 거라고 하는데... 많은 돈을 들여서 군대를 유지하고 무기를 사들이는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겪으며 간신히 얻어낸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하지만,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의 시대는 이런 면에서 충분히 평화스러웠습니다. 이른바 로마의 평화 pax-Romana라고 하는... 로마의 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평화가 세상의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평성대에도 예수가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은 평화라는 말 가운데에는 이런 억지로 유지되는 평화를 넘어서서 인간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라는 의미가 여기에는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행복이라고 할 수 있고, 요즘 사용하는 말로 하자면 well-being이라는 말로도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평회를 이루는 사람이란 그렇다면 어떤 사람일까요? 이를테면 가정을 생각해봅시다. 가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함께 음식을 먹으러 가야하는데... 나갈 대부터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이들은 피자를 먹으러 가자고 하고... 엄마는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고... 아버지는 자장면이 먹고 싶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니까 아버지가 소리를 버럭지르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오늘은 자장면이다...’ 가기는 가겠지요. 그리고 자장면을 주문해서 먹겠지요. 더 이상 말은 없을 것입니다. 또 아버지가 소리를 지를 까봐... 다들 묵묵히 자장면을 먹습니다. 이것을 평화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아까와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없고 조용하니까 평화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만,.. 우리는 이런 것을 평화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클레이 같은 영국의 성서학자는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란 곧 ‘담을 헐어버리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이제껏 생각하던 평화와는 다른 것이지요. 담을 헐고 나와서 막 떠들다가 한 방 먹으면... 그래서 우리 집은 틀렸어...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데... 이것은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가 쳐 박혀 있는 사람을 거기서부터 나오게 하는 사람... 그래서 나와 너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되고.., 조금은 시끌시끌하더라도 진정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담을 허물어내고 평화를 이루어 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시끌시끌하지 않았습니까? 세상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이 예수에게는 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에베소서2:14) 바울은 이렇게 예수를 말하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드리워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담을 무너뜨리시고 그들이 서로 사람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신 분! 그 분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듯 담을 허무는 데에 있어서 사용된 예수의 방법이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였다는 것입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에베소서2:16) 결국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란 자기의 마음을 열고 너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어 줌을 통해서... 참된 평화가 경험되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아들’또는 ‘하나님의 딸’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것...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상의 왕들이 자기들을 그렇게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나중엔 그것도 모자라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요구하는 황제들도 생겨나게 되었지요. 어쨌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소중한 호칭입니다. 그런데 평화를 이루는 사람... 사람들을 가로막는 담을 허물어뜨리는 사람... 그 일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를 지는 일가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이들을 친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요?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이 영 낯설고 도저히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느껴지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미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담을 헐어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 하는 아주 효과적인 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처럼 힘든 사람들은 없어. 세상 사람들은 싸웠다가도 금방 화해하고 그러는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한 번 틀리면 그것으로 끝이야... 목사들은 더 해...’ 이래서 되겠습니까?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 maker)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담을 헐어버리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시는 숙제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서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임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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