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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사람(4)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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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4) (마 5:1-12)
   

지난 20세기를 살았던 이들 중에서 아직도 그 이름만 들으면 사람들의 가슴을 흥분시키고 무엇인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던 마하트마 간디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받았던 미국의 흑인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29년에 태어나서 1968년 한 괴한의 총탄에 쓰러진 그는 불과 40년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걸어왔던 삶의 여정은 지금도 살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보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어쩌면 그는 다른 많은 목사들처럼 교회를 담임하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연치 않은 사건이 그의 삶의 물줄기를 돌려놓고 맙니다.
   
당시 미국은 흑백의 인종차별이 심하였고, 특히 남부는 더욱 심했습니다. 버스를 탈 때에도 흑인과 백인의 자리는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앞자리가 백인의 자리였고, 흑인들은 뒤에만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백인들의 자리가 모자라게 되면 흑인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도 백인들에게 자리를 비켜 주어야만 했습니다. 1955년 12월1일 남부의 몽고메리 시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 전용자석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한 백인 남성이 타자 운전사는 그녀에게 자리를 백인에게 양보하고 뒷자리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체포가 되어서 재판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버스타기를 거부하면서 그들이 부당하게 당하는 탄압의 실상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었던 것이지요.
   
모든 흑인들이 버스타기를 거부하고 걸어서 출퇴근 하는 보이콧 운동을 시작한 날부터 도시의 모든 흑인들이 거기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그때부터 그들은 1년 이상을 하루에 약 20킬로미터씩을 걸어서 학교에 가고 직장에 출근하였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을 이런 행렬에 동참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하지만, 그 대열에 동참한 흑인들은 하나같이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 다녔다는 것이지요. 
  
차가 있는 이들은 이러한 흑인들을 도우러 나섰는데, 어떤 사람이 아주 힘들게 터덕터덕 걸어가는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할머니 차에 타세요. 걸어가실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자기의 차에 타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손을 내 저으며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거라오...’ 

그 할머니는 당당하게 집을 향해 걸어갔다고 합니다. 킹 목사의 ‘자유에의 투쟁’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버스를 거부하는 운동을 시작하고는 몇 주간이 지난 후에 역시 힘들게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할머니 힘드시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위로를 해 주기 위해서 다가간 킹 목사에게 그 할머니는 오히려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물론 내 발은 아픕니다. 하지만, 내 영혼은 한 없이 평안 합니다...’ ‘비록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이지만... 이 일은 정말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로구나...’ 오히려 킹 목사가 위로와 힘을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오늘 예수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따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것을 감추지 않고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박해를 받는 일이고... 그것은 모욕을 당하는 일이기도 하며, 사람들로부터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을 때에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요? 만일 처음부터 이런 경고를 들었다면... ‘당신이 만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다면... 당신에게는 어떤 불이익이나 손해가 닥칠는지... 그것을 우리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는 일은 수 없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당신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 심지어는 당신의 가족들과도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껏 당신이 모았던 모든 돈이나 재물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 삶이 행복해지고... 풍성해지고... 병도 낫게 되고 성공도 보장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기대감 속에서 교회에 나오게 되는데... 정작 예수는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야 할 일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비록 부자가 아니더라도... 소유하고 싶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겪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진정 사람들이 걸어갈 만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는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가 하신 말씀대로 하자면... 내가 건강하다는 것... 내가 풍성하다는 것... 내가 모든 소원하는 것들을 얻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 증거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삶이 오히려 더 고달프고...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고 살아도 되는데... 비난을 당하기도 하고... 오늘 이야기의 서두에서 소개해 드린 것처럼... 비록 서서 가더라도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더 편안할 텐데, 구지 먼 길을 걸어 다니는 것...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때에는 이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예수를 잘 믿는 증거가 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려워서야 어떻게 믿겠어?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박해를 당하고 모욕과 비난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크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리 선한 세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참 선한 것 같고 평화스러운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 일어난 해군 전함의 갑작스런 폭발과 침몰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손을 놓고 편안하게 지내는 밤에도 군인들이 밤과 하늘과 육지를 철저히 경계하니까 우리의 평화는 그야말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조금만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는 혹시 전쟁이 터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염려를 할 수 밖에는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꿩 잡는 게 매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된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렇게 힘을 앞세운 논리와 가치들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서 정말 우리들이 사람으로서 추구해야할 소중한 가치나 덕목들은 발을 붙이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근본적인 인간의 도리나 가치들은 다 생략하고,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만일 힘이 없다면 힘이 있는 사람들이나 질서에 붙어서 자기들의 삶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만이 살아남게 되는 그러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위장된 평화와 힘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살아가는 길인지... 그것을 추구하시고... 그 길을 함께 걷도록 우리를 그가 걷는 대열에로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이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알 수 있듯... 이제는 제자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저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로구나...’(마태16:16) 예수에게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탁월한 힘이 있었습니다. 어떤 병도 고치고...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고... 떡과 고기 몇 마리로 셀 수 없는 많은 무리들을 먹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리고... 도대체 예수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생각이 베드로의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예수에게 기대한 것은 그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분이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의 선택은 제자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길을 버리고는 스스로 십자가를 택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없고 무력한 자가 되기를 자처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길 만이...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정복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하고 버리는 길을 선택할 때만 세상의 모든 갈등과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예수가 가진 생각이나 그가 선택하는 길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가? 그것은 마치 흘러내리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며... 예수가 스스로 비유하셨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문을 마다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마태7:13-14) 그러니 정말 진지한 마음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기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얻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못 생각하기가 쉬운 것은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처럼 생각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 데나리온 받아서 땅에 파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가져온 태만하기 이를 데 없는 종이 변명하는 말... ‘나는 주인님이 심지도 않은 데서도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도 모으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이 말이 주인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심지 않고서 거둔다는 것은 주님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심은 대로 거둔다’(갈라디아서6:7)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문제는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 이러한 것들을 심고 거두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고... 습관을 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적응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을 가꾸고 다듬어 가는 일... 그래서 평범함 속에서도 비범함을 추구하고...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속된 것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세상이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함으로 자기를 가꾸어 가는 일... 그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가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한 번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마음이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마가14:3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습니다. 저도 새벽기도를 한지 25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못 일어날까 해서 휴대폰 벨이 5분 간격으로 네 번을 울리도록 하고서는 잠자리에 듭니다. 그것도 예전에는 진동으로 해놓았었는데... 한 번 못 일어나고서는 큰 소리가 나도록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좋은 것을 거두도록 자신을 가꾸고 다듬어 가는 것... 그것을 몸에 익히며 습관화 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삶을 어둠에서부터 빛으로... 죽음에서부터 생명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이런 가치 있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자기희생의 상징인데... 이러한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 없이는 사람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기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것은 해볼 만한 일이고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만 살지를 않고 누군가를 위하여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 그래서 우리가 바울처럼 ‘주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전15:10) 거기에다가 덧 붙여서... 누구에겐가 ‘나는 세상을 살면서 그가 내게 하였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사랑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기억될 수 만 있다면, 세상에서 그렇게 멋지고 가치 있는 삶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가 박해를 말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할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런 삶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살만한 삶이기에... 이 길에는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치와 아름다운 열매가 있기에... 예수는 이 길을 우리에게 소개하며 함께 갈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먼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당하는 길입니다. 예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v.10) 우리는 이미 6절에서 예수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말씀하실 때, 의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의란 바른 관계를 언급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 들 앞에서 바르게 세우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우리는 이들을 의에 주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의를 말할 때에 우리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생각을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명확히 전달하였습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5:24) 성전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온갖 불의를 일삼고, 특히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인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와서 드리는 예배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현실 생활 가운데서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사를 성경의 구석구석에서 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해 내셨던 가장 커다란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 곳에서 나그네요 약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가나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을 때에 그 곳은 더 이상 나그네나 과부나 고아와 같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예수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그 사람은 바로 세상에서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설혹 그러한 행위로 인해서 어떤 핍박이나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말이지요. 생각해보면 강한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한 선택을 하다보면 강한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이득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세상에서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돌보는 것...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것... 설사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손해가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앞서서 그런 삶을 추구하였던 예수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v.11) 나 때문에... 나를 생각하고 나를 본받아서 살려고 하다가... 그런 뜻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대문에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는지요? 예수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신념이나 삶의 원칙을 고집하다가 다른 이들에게 듣지 못할 말을 듣거나... 받지 않아도 되는 부당한 대접을 받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순간에 직면한 적이 있었는지요? 초대교회에서 이 말씀이 울려 퍼질 때... 아마도 성도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이러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사람들이니까요.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단지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도 탄압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티베르 강이 범람하여 도시를 휩쓸거나, 만일 나일 강물이 말라버리거나, 만일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거나, 만일 지진, 전염병, 기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곧 “크리스찬을 사자의 밥으로 던져주라”고 소리쳤다.’ 그런가하면 성 어거스틴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비가 오지 않으면 그것은 크리스챤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활동하던 북 아프리카에서 격언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 직면했던 현실이었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이런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과 고통을 견디어내야만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그들이 예수를 통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기에...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본 것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목숨까지도 바꾸어가면서 그들은 예수를 놓치지 않은 것인가요? 생명에 대한 극심한 위협은 고사하고... 조금만내  마음에 맞지 않거나 곤란한 일만 생겨도 교회에 나오지 않거나 믿음을 포기하려하는 우리들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를 않는 대목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만큼 예수가 우리에게 소중한 분이시라는 증거가 아닐까요? 예수에게는 그 무엇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희생해가면서라도 붙잡고 싶은... 설혹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더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예수에게는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 심지어는 목숨도 잃어버릴 판인데... 그래도 예수를 붙잡고 있고.. 예수 때문에 모든 박해와 비난과 모욕을 다 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를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가 오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로 인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비난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붙잡을 수 있고...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인지요? 그렇게 예수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분으로 남아 있는 것인가요?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해보았던 행복의 절정을 우리는 이 대목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렇게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예수를 붙잡을 수 있다면... 예수가 화근인데... 예수 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좋을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붙잡을 수 있다면... 다른 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예수가 좋아서... 어둠 속에서 헤매던 나에게 꺼지지 않는 영원한 빛을 비추어 주신 분이 예수이기에... 만일 나에게서 예수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의 삶은 다시 어둠 속으로 빠지고 마는 것이기에... 예수 없는 생을 택하느니 차라리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것이 더 낫기에... 이런 선택과 결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만한 이유를 충분히 소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예수를 제대로 잘 믿고 있는 사람이고, 한 인간으로서 가장 거룩하고 가치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삶의 전부로 생각하고 우리의 삶이 여기에서 그쳐버리고 만다면... 삶이란 얼마나 허무하고 통속적인 것인가요? 예수는 우리에게 그 이상의 행복과 가치를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생각하며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가는 것... 그것은 마치 십자가를 지는 일과도 같은 것인데... 여기서 느껴지는 가치와 기쁨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은 킹 목사가 언급했던 그 할머니처럼 몸은 고달플지 모르지만 영혼은 마냥 자유롭고 행복하고 무엇인가로 가득한 충만한 삶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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