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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이신 예수 (눅 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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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이신 예수 (눅 9:10-17)


살다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예컨대 요즘에 스마트폰이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스마트폰도 비싸지만 주변기기까지 사야 되기 때문에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케이스입니다. 사람들이 왜 케이스를 씌우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기에 흠집이 나기 때문입니다. 맞는 이론이에요. 그런데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케이스를 씌워놓는 한, 기기에 흠집이 났는지 안 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흠집이 나지 않았다,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케이스를 안 씌워야 되는데 그래서 나중에 흠집이 난 후에 케이스를 씌우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이건 오늘 설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얘기입니다. 그냥 재미있는 얘기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국은 이기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믿을 것이냐. 결국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 것이냐.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가르치고 따르기 보다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방편으로 전락할 것이냐. 사람은 어떤 연유로 예수님께 나아오느냐. 

오늘날 교회는 서비스업화 돼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한 것보다는 사람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 위한 서비스업이 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소위 교회성장학의 기본적인 전제는 무엇이냐면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해서 그것을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케팅 전략이에요. 성도들의 필요를 파악해서 그것을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든 하나님의 요구사항이든 이런 것은 부차적이고 결국은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가 성장한다, 이것이 교회성장학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이론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설교할 때 성도들에게 직접대고 말하지 말고 또 설교할 때 손가락질도 하지 말라는 이론까지 있습니다. 죄라는 말을 가급적 사용하지 말라 사람들이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던 목사님들도 결국은 타협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 신앙이 기복신앙화 될 수밖에 없느냐. 이건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신앙, 또 말씀을 격을 낮추는, 가치를 떨어뜨리는, 영어로 하면 cheapen, 싸구려로 만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그래서 우리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많으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왜 많으냐. 신기할 정도에요. 차라리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적은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예수를 믿는 사람의 숫자가 적은 것이 더 정확한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고 그러면 예수님이 방침을 바꾸셨는지 아니면 상황이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들이 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인지 우리는 이와 같은 격을 낮추는 복음을 싸구려 화하는 현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는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행적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은 굉장히 엄하셨는데 행적은 굉장히 너그러우셨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에누리가 없어요. 속된 말로 국물이 없어요. no soup. 예수님의 말씀만 읽어보면 너무 어려워요. 너무 엄하세요. 

그런데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굉장히 너그러우십니다. 그래서 말씀으로는 ‘다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을 저질렀다’고 말씀하셨지만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그 여성을 살려주셨습니다. 

또 말씀으로는 ‘삼가 모든 탐심을 피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세리 삭개오를 영접하시고 그의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말씀으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고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당신에게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죄인이든 의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병자든 문둥병자든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은 그들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갖고 판단할 수 없고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같이 생각해야 목자로서 예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대제사장이시요 우리의 스승이시지만 동시에 목자이십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기독교를 이해할 수도 없고 기독교인을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목자로서의 예수님은 양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검은 양이든 흰 양이든 예수님에게는 양이에요. 중국의 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주창했지요. 그 말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중요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흑양백양론입니다. 검은 양이든 흰 양이든 당신에게 오는 양은 당신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스크린하지 않았어요. 걸러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이 그들을 맞으셨다고 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무리가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있어요. 별의 별 동기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님이 그들을 영접하셨어요. 영접한다는 말은 welcome, 환영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가 G20 정상회의를 하면서 외국손님들을 웰컴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무리가 예수님께 나올 때 그들이 어떤 동기로 나오든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든 예수님이 그들을 영접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이와 같은 목자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비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을 모르고 기독교인들을 함부로 비판하면 안 됩니다. 목자의 심정은 부모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람 만들기 위해서 야단도 치고 때로는 매도 때리고 엄하게 가르치기도 하지만 자식이 몸이 아프거나 괴로워하면 품어주지 않습니까. 내 자식, 내 새끼, 이러면서.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의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양들이 목자를 찾아올 때 반기시는 겁니다. 내 양. 영접하시고 환영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똑같은 구절이 마태복음 ․ 마가복음 ․ 요한복음에 다 나와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하고 있고 마가복음에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의롭고 어렵고 거룩하고 말씀이 너무 부담스러운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심정으로 우리를 맞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이전에 요한복음 1장에 있는 것처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것이 주 예수를 영접하라,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필요를 말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전해야 될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영접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우리가 영접하고 믿고 그래도 그것은 효험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영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축복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움직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이미 움직이셨어요. 사람이 무엇을 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이미 움직이셨어요. 하나님이 일하셨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응답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영접하신 다음에 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을 고치시고 그리고 주린 자를 먹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만 하지 않으셨어요. 영적인 일만 하지 않고 몸의 문제도 고쳐주시고 영혼의 문제도 고쳐주시고 배고픔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full service.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적인 것을 강조하시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삶의 문제를 무시하시지 않고 그것을 경시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전부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고 이게 끝도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이 시작이에요. 이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가 있으면 먹이고 병든 자가 있으면 고치고 그리고 영혼의 꼴을 먹이다 보면 그들 중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으니까 예수님이 최선을 다하신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도 최선을 다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도 최선을 다하십니다. 

Do his best. 그렇다면 반드시 선한 결과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세상에 시련이 있고 내 삶에 어려운 일이 있고 그럴 때 만일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좌우된다면 낙심해야 되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좌우되고 하나님이 최선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게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분명히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이게 시작입니다. 일단 이렇게 시작하는데 거부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왜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 모으기가 힘들다고 말하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잘 안 나오려고 한다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건 우리가 예수님을 잘못 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이라면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누가 주저하겠습니까. 누가 싫다고 말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안 오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안 모이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사람이 천국가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지옥 가는 것은 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지옥 가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에요. 안 가는 것은 본인 책임입니다. 본인이 완악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에게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믿는 것이 정상이에요. 오늘날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든 학생이든 자기 주변에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느끼면 심리적으로 위축되지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가 부담스러워지지요. 

그러나 생각을 바꿔서 내가 비정상이 아니고 안 믿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안 믿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불쌍한 것이지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나는 정상이에요. 믿는 것이 정상이에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기도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정상인 것 뿐만이 아니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도대체 무얼 믿고 사는 것입니까. 자기가 전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자기의 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얼 믿고 산다는 얘기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지요. 기도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리고 기왕 기도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하고 그러다보면 다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 이외에 어떤 길이 있겠습니까. 21세기든 제1세기든, 도시인이든 현대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이 내가 길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고 내가 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I am the way.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천년 전에 하신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하도 분명하고 하도 직설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믿든지 안 믿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는 있지만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보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이 방법으로 무리를 영접하셨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보다 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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