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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헌신 큰 감동 (요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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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헌신 큰 감동 (요 12:1-3)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그리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나를 아시고 불러 주셨습니다. 생각하면 최고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나로 하여금 주안에서 살게 하신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내가 주안에서 살았다는 말은 그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고 사용 받은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쓰임 받은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고 영광입니다. 언젠가 공원묘지에 갔다가 안장된 묘지들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무덤에는 각종 다른 묘비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는데 묘비에는 “성도 아무개”라는 묘비가 많았습니다. “성도”라는 묘비는 어떤 집사의 믿지 않는 남편들에게 대우해서 붙여 준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권사” “장로”라는 묘비도 보였습니다. 

그 묘비를 보는 순간 참 돋보였습니다. 직분자들은 수고를 많이 한 대신 그런 영광도 주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분들은 그 직함이 참 죄송한 직분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최선을 다했음에도 아쉬움이 많은 법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직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시무를 마치게 될 때는 열심히 일했어도 아쉬움이 많은 법입니다. 우리는 직분을 함부로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았으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역을 마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헌신의 모습일까요. 그리고 후에 후회가 없게 만족하게 사역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섬김의 삶에 대해서 모범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족들이 주님을 지극히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오리쯤 되는 곳에 위치한 동네입니다. 그 동네가 나사로가 사는 동네입니다. 마태복음26장을 보면 그 집이 나병으로부터 고침 받은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몬의 아내가 마르다라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마리아가 그 집에 와 있습니다. 그 날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배설한 자리였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오래전에 살아났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살려내셨다고 해서 죽이려고 해 조용히 지내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 잔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날의 주인공은 단연 마리아였습니다. 이 마리아가 옥합을 들고 오더니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온 집에 향유냄새가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진정한 헌신, 섬김, 순종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주님의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은 이 모습으로 헌신하고 순종하고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3복음서가 대서특필하고 있는 것은 후대에 진정한 헌신의 삶은 이런 모습이라고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추천하신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기 마리아의 모습에서 몇 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열정 

마태복음26장과 마가복음14장을 보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부었든 한 가지 공통점은 “부어버렸다”는 점입니다. 부었다는 말은 옥합을 깨서 송두리째 부었다는 말입니다. 향유병은 깨야 부어질 수 있습니다. 깼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송두리째 바쳤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자신을 깨부수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마리아의 헌신의 모습에는 열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헌신의 삶, 섬김의 삶에는 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깨고 부수고 부어버리는 열정이 있어야 그것이 헌신이고 봉헌의 삶입니다. 열정이 없는 헌신은 형식적이 될 수 있습니다. 헌신이나 봉헌이나 섬김은 자기 몸을 사려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에는 자기를 이렇게 깨부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직분자에게는 이런 열정이 요구됩니다.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헌신을 해도 마지막에는 아쉬움과 후회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적당히 직분을 가지고만 있었다고 하면 마지막에 얼마나 많은 회한과 후회와 아쉬움이 몰려오겠습니까. 듣자니까 요즘 기관들이 총회를 하는데 임원을 서로 맡지 않겠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장로 부인들이 더 회피한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신을 깨부수기는커녕 아예 회피한다고 합니다. 편하려면 차라리 직분을 맡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 모습에서 열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의 열정을 예민하게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참 헌신에는 주님을 향해서 자신을 부수는 열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아낌없음 

마리아가 그날 쏟아 부은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이라고 했습니다. 나드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나르드라고 하는데 동방의 향유의 분량을 말합니다. 이 향유는 원산지가 동방이었습니다. 유대에서는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수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향유가 고가품이고 그 시대에는 명품이었습니다. 그때 쏟아 부은 향유가 약 한 근 340g을 말하는데 가룟 유다의 감정에 의하면 값이 300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이 금액은 샐러리맨의 일 년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당시 가장 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이 향유를 살짝 발라주는 것이 최고의 예의였다고 하는데 이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주저 없이 망설임 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려면 이 아낌없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섬김의 대상과 헌신의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는 헌신으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 보답하는 헌신은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모습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요. 어떤 때 보면 너무 주저주저 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내가 조금 희생될까봐서 주저주저 합니다. 내가 조금 손해볼까봐, 직장에 지장이 될까봐, 헌금을 더 내야 할까봐, 놀러 다니는 일에 방해가 될까봐, 일 좀 맡기려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둘러댑니다. 

직분을 받을 때는 덜렁 받고 명예는 받아야 하겠고 감당하기는 억울하고 그러니까 그 모습에서 소신도 철학도 고백도 전무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돋보이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쏟아 부었습니다.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로 닦아 냈습니다. 그 시대에도 있을 수없는 방법으로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발에 붓고 머리로 닦아낸 것은 진정한 제자 됨의 표현이었을 것이고 순종과 섬김의 정신을 유감없이 표현하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과 섬김과 봉헌의 모습입니다. 

주님 만족 

마리아가 향유병을 깨서 주님 발에 부었을 때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온 집에 향기가 가득하였던 것이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아주 만족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향기가 나고 주님이 만족해 하셨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최고의 헌신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상관없는 일에는 너무 열정적일 때가 있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학교일은 아주 지성으로 합니다. 직장에는 그렇게 충성하고 주일날도 예배를 빨리 끝내고 출근합니다. 취미생활을 위해서 주일예배를 간단히 끝내버리고 운동하러 갑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위해서는 너무 소극적이고 인색합니다. 

헌신의 의미는 전혀 없는 직분자들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끝마쳐야 할 때가옵니다. 언젠가 그 때가 오면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고백하려고 마음먹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예수께 송두리째 부어버렸습니다.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흔쾌하게 말입니다. 그랬더니 온 집에 향기가 가득하였고 예수님이 만족해 하셨습니다. 주님이 만족해 하셨으면 온전한 헌신입니다. 

주변 시기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 발에 부으니 가룟 유다가 왜 그 값비싼 것을 허비하느냐 가난한 자에게 주면 얼마나 좋으냐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는 그냥 제자들이 그랬다고 익명으로 처리하였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그랬다고 지명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참 분수가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수학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수학을 좀 알았더라면 분수를 알았을 것인데 그리고 주제를 파악했을 것인데 말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유다의 그런 의도를 도둑질 하려고 그랬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유다의 속 내장까지 다 들여다보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순간적으로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는 빨랐습니다. 그런데 영적가치를 헤아리는 데는 전혀 계산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도 스승인데 여인의 헌신을 경제적인 낭비로 일축하고 있습니다. 인격이 냉랭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스승도 팔아서 자기의 부를 축적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다 이런 시기와 질투심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말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일을 안 하면 질투의 대상도, 시기의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열심히 일해서 욕먹고 시기도 받고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니까 눈치 빠른 사람이나 용기 없는 사람은 큰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지도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누가 말 하거나 말거나 옥합을 송두리째 깨트려 부어버렸습니다. 

그 모습에 열정과 용기와 소신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헌신의 삶은 열정과 용기와 소신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직분을 가졌으나 안일하게 무사하게 평안하게 욕먹지 않으려고 변두리에서 머물다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시간이 다 끝나버린 후에 아쉬워하고 후회할 줄도 모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예수께 부으니 온방에 향기가 가득하였고 예수께서 만족해 하셨습니다. 이 대목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헌신의 모습이고 이것이 진정한 봉헌의 삶이고 순종의 삶입니다. 

안목 있는 헌신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부어버렸을 때 제자들이 마리아를 낭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7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이 마리아의 도유사건은 타이밍이 아주 절묘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그날 잔치는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마련된 잔치였습니다. 이제 6일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합니다. 결전을 앞두신 예수님은 오늘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리아는 아주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여 유감없이 자신의 마음을 예수께 쏟아 부었습니다. 이 대목이 이 이야기가 주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나 이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부활해야 하는 예수님의 미래의 사건이 함축된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봉헌은 효과가 만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주 만족해 하셨습니다. 100% 효과를 거둔 헌신이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나의 장삿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일주일 후에 십자가에서 죽고 곧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잔치자리에서 발설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장례식에서 시체를 대부분 썩지 않게 방부제를 넣어 미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향유는 시체가 부패했을 때 악취를 제거하고 방부제로 사용한 액체입니다. 마리아는 6일후에 주님께서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하여 그날 쏟아 부었는지 마침 쏟아 붓고 보니까 장례를 준비하는 기회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봉헌의 삶을 살다 보니까 주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헌신은 아주 안목 있는 헌신이 된 것이고 개인적인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예언적 의미를 지니는 행동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헌신의 삶도 때가 있습니다. 장로가 70세가 되면 시무에서 은퇴하는 제도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헌신은 다 늙어서 하는 헌신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헌신은 다 늙어서 힘이 없을 때 그리고 할 일이 없어서 하는 헌신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보다 젊을 때, 힘이 있을 때, 손에 땀이 솟아날 때, 좀 더 능력이 있을 때, 인생 중 굵고 힘이 있을 때 하는 헌신이 더 아름답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그래서 빛이 납니다. 그래서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만족해하신 것입니다. 기회가 다 지나가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다시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머문 자리의 아름다움 

이 마리아의 이야기는 지난 2천년동안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마태복음26장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이 헌신도 전파되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읽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지난 2천년 동안 시공을 초월하여 이 여인의 헌신의 모습이 전해져 왔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헌신의 모습을 왜 그렇게 강하게 강조하셨는가 하면 이 여인의 헌신의 모습에 사랑과 믿음과 용기와 자기희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자질이나 헌신의 자질에는 이상의 섬김의 요소들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헌신의 모습은 가장 모범적인 모습으로 예수께서 추천하신 것입니다. 

직분을 받아 임직할 때도 중요합니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직분을 순종하며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마리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모습은 그 직분을 내려놓을 때, 마칠 때가 더 중요합니다. 잘 마쳐야 합니다. 그것은 인생을 더 아름답게 하고 향기롭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고 더 나아가 직분을 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은퇴하시는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임직자들은 마음깊이 이 말씀을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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