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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명 (롬 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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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의 산마루에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얼굴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장군이 나타나서 마을 전체가 소동이 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군은 실망을 안겨준 채 떠나고 말았다. 그 후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정치가도, 시인도 나타났지만 그들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 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으려나 보다 하며 희망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오랫동안 그 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위로의 말을 한다. “우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 그의 모습이 붉은 저녁노을에 비추자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외쳤다. “어네스트를 보세요. 저 사람이 바로 큰 바위 얼굴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바로 마을 토박이인 어네스트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산마루의 큰 바위 얼굴을 보고 그 바위를 닮은 사람을 기다리면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 큰 바위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청교도 작가인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의 얼굴”이란 작품의 내용이다. 작가는 이 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들은 과연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즉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받았다고 해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죄 된 습관과 죄 된 생각과 죄 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지만 생활과 습관은 여전히 세상에 속한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만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이것을 성결의 삶, 성화의 삶이라고 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순간적으로 되지만 거룩해지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계속해서 자라가듯이 우리도 계속해서 성장해서 성숙한 신앙, 장성한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비유했다. 어느 나라에 반정이 일어나서 왕족이 모두 몰살당했는데 다행히 갓난아기인 왕자가 유모의 품에 숨겨져서 살아남게 되었다. 깊은 산속에서 유모에 의해서 이십 여 년 간 길러지면서 산사나이로 성장했다. 그런데 다시 반정세력이 무너지고 정통왕조의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어떻게 알고 이 왕자를 왕궁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신분은 왕자이지만 산사나이로 자랐기에 왕족의 법도와 왕족의 생활과 왕도를 배우느라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회복되었지만 아직 옛 생활의 죄의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천국백성답게 변화되고 성숙되는 훈련의 과정과 거룩해지는 성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5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씀했고 6장부터는 이 성결과 성화에 대해서 말씀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실생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죄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죄의 유혹을 이기고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1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는 5:20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에 대한 설명이다. 즉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해서,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짓겠느냐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 2절에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한다. 그것은 은혜가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해서 언제나 받아주고 용서해준다고 해서 그 사랑을 믿고 제멋대로 산다면 그것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랑을 모독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해도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서 죄를 지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가 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다
2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살리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겠는가? 죽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겠는가?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으면 아무 반응이 없다. 때려도 아프지 않고 욕을 해도 마음이 상하지 않고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죽어야 된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맞는 말이다. 내가 완전히 죽으면 원망도 미움도 불만도 있을 수 없다. 물론 죽기가 쉽지 않은데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 번만 죽어보면, 한 번만 물러나 보면 자신이 생기고 죄에 대해 매력을 잃게 된다. 죄는 죽은 사람을 다스리지 못한다. 

우리는 곰을 미련하고 느린 동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북극의 백곰이 흐르는 강물 속에서 연어를 잡아먹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지혜롭게 그리고 날쌔게 그 재빠르게 움직이는 연어를 잡아먹는지 사람보다 낫다. 왜 이 곰이 그렇게 힘들게 물속에서 움직이는 연어를 잡아먹는가? 곰은 죽은 것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만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서 곰을 만나면 엎드려서 죽은 척 하라고도 한다.
사탄도 시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귀도 죽은 사람은 건드리지 못하고 유혹하지 못한다. 내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마귀가 나를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가까이 온다. 내가 살아 있어서, 교만이 살아 있어서, 욕심이 살아 있어서, 감정이 살아 있어서 마귀가 시험하는 것이다. 내가 죽었으면 마귀가 시험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노예가 살아 있을 때는 주인이 그를 다스리지만 일단 죽으면 주인의 다스림과 소유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사람은 다시 죄에 끌려갈 수 없다.

그러면 이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죽음이다. 3절 “무릇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도 죽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죽었다’는 것은 극기, 망각, 상실, 포기, 절제, 고행, 인내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혼자 죄와 정욕을 이기려고 죽는 것이 아니다. 이 죽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다. 

그래서 3절에 “세례를 통해서 죽었다”고 했다. 세례란 “잠근다, 씻는다”는 뜻이다. 그 당시는 몸을 물속에 완전히 잠그는 침례를 행했다. 이것은 우리가 물속에 완전히 잠기듯이 나는 물속에서 다 죽어 없어지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듯이 나도 완전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완전한 의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그 믿음에 의해서 주는 것이 세례이다. 

그러면 무엇이 죽었다는 것인가?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옛 사람이란 예수를 믿기 이전의 나이다. 예수를 알기 이전의 나는 죽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죄에 대해서 관심과 매력을 가진 나는 죽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세례 받을 때 물에 장사지내 버렸는데 욕심, 미움, 원망, 불만, 이기심이 어디에 있는가? 

뉴질랜드의 원주민 피지족들이 사는 곳에는 동네 한가운데에 Killing Stone 즉 죽음의 바위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을 이 큰 바위에 묶어 놓고 그 머리를 짓눌러서 죽인 후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서 죄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온 한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하고 세례를 줄 때에 그 죽음의 바위 앞에서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그 바위에 묻어 있는 피를 보게 하고는 “자, 여러분의 옛 사람은 이렇게 죽습니다”라고 하면서 세례의 의미를 인식시켰다고 한다. 나는 이미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죽은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죽은 내가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또 다시 죄를 지을 수는 없다.

우리는 새 사람이다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은 죽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살던 전의 생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죄를 짓고 살던 옛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다.

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 받을 때에 물속에 들어가 잠기는 것이 내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라면, 세례를 받고 물에서 다시 올라오는 것은 예수와 함께 내가 다시 살아나는 새 사람을 의미한다. 

회개는 뉘우침이 아니다. 울고 소리 지르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그것은 회(悔) 즉 ‘뉘우침’ 뿐이지 개(改) 즉 ‘고침, 돌이킴’은 아니다. 회개라는 헬라어 metanoia는 ‘방향을 바꾼다, 뒤로 돌아 눕는다’는 뜻이다. 운전할 때 U-turn과 같다. 세상으로, 죄악으로 향하던 것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고 고치는 것이 곧 회개이다. 내가 스스로 죽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서 새 사람이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또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의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를 믿기 전에 평양시내의 깡패로 유명했다. 그가 전도를 받아서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후에는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부고장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하도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 못된 김익두가 죽었다고 잘 뒈졌다고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며칠 후에 멀쩡하게 살아서 나타나자 모두들 크게 놀랐다. 이 때 김익두는 “전에 죄를 짓고 여러분을 괴롭히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제 김익두는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고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표정과 말이 진지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믿었고 그는 그 후로 정말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되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진창에서 뒹굴던 사람이 새 옷을 입고 또 다시 진창에서 뒹굴지는 않는다. 예수를 믿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된 사람이 또 다시 죄를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어리석은 일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다시 진창에 눕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에 이미 나의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죄를 이기라.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길까?
이렇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의 유혹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기고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니라.” “여긴다”는 말은 간주, 인식, 인정하는 것이다. 나의 옛 사람이 죽었지만 사탄은 여전히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계속 유혹한다. 그러나 이미 예수를 믿었으니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만 산 사람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죄와 세상, 유혹과 욕심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은 자로 여기고 돌아서야 한다. 거기에 대해서 생각이나 고민이나 반응은 있을 수 없다. 이미 죽었는데 무슨 반응이 있고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옛 사람이 살아 있으니까 분노, 미움, 욕심, 유혹이 있지 죽으면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께 대해서만 의와 선에 대해서만 살아 있는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8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죽었으면 살리라”고 했다. “죽는다, 죽임을 당한다”라고 하지 않고 “죽었다”고 했다. 이는 스스로 원해서 죽는 자원적인 죽음이다. 누가 죽게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또는 저절로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죽게 되어서 죽으면 그냥 죽고 마는 것이고 자기가 죽이면 사는 사람이다. 고린도전서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고 선언하라.

죄짓고 그냥 죽는 것은 심판 받은 것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스스로 죽일 때 이것은 믿음이다. 남이 나를 비판하면 심판이지만 내가 나를 스스로 비판하면 이것은 회개이다. 내가 나의 잘못을 나타내고 내가 나를 스스로 죽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신다.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하고 그냥 옛 사람의 옛 생활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남이 나를 비난하고 죽게 만든다. 스스로 죽지 않는 사람은 죄의 대가로 심판을 받지만 스스로 죽는 사람은 다시 살리신다.  

9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우리가 죽는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억울하지만 그러나 다시 살기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더라도 예수 안에서 믿음 안에서 새 사람으로 다시 살 것이기 때문에 죽어도 된다. 죽기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영생을 위해서 새 생명을 위해서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만 다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는 완전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고 반응을 보이지 말라. 죄에서 돌아서라. 죄에 또 다시 매이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고” 담대히 나아가라. 이제 나를 다시 살리시고 은혜를 주신 예수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의를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라.

의의 도구로 드리라
죄의 유혹을 이기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 죄를 이기는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죄를 이기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거룩하게 깨끗하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전에는 내 몸을 죄에게 내어주어서 불의의 도구로 쓰게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도구로 쓰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이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할 때 묘한 작전을 쓴다. 즉 우리에게 목적을 바꾸라고 하지 않고 방법을 바꾸라고 타협해 온다. “주의 일을 하긴 하되 적당히 하라.” 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우선 돈부터 열심히 벌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약간 부당한 방법을 써서라도 우선 돈을 벌어라”고 유혹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하려고 하면 “그래, 십일조도 하고 건축헌금도 하고 다 해라. 그러나 우선 네 살림부터 챙기고 너 필요한 것부터 쓰고 그 다음에 형편이 되는대로 이다음에 넉넉해지면 천천히 해라”고 한다. 

마귀회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한 작전회의가 열렸다. 죽이고 가두고 때리고 모욕주고 가난하게 하고 괴롭히고 망신을 주고 자존심 상하게 하고 무슨 방법을 써도 믿음이 식어지지 않고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을 지키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제일 오래된 마귀가 일어서서 “다 하긴 하되 ‘내일부터 하라’고 그 귀에 속삭여 주겠다”고 하여 만장일치로 그 방법이 채택이 되었고 그 방법이 성공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을 지키는데 있어서 방법에 타협하지 말라. 뒤로 미루지 말라. 그러면 불의의 도구, 마귀의 도구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13절에 나를 하나님께 드리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드리라고 했다. 나는 본래는 “죽은 자”였는데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 “나”는 벌써 죽고 이제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인데, 욕심이 어디에 있고 나를 위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죽었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았는데 말이다. 나 자신은 본래 하나님께 드릴만한 존재가 못되는데, 전에 죄를 짓던 나는 죽고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셔서 이제 하나님께 바칠만한 존재, 하나님께 쓰일만한 존재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나를 드릴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로운 일에 도구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온전히 나를 맡기고 전 생애를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내게 주어진 자유까지 다 바치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바 된 삶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헌신으로 내 삶이 꽉 차야 한다. 

누가복음 11:24-26에 이런 비유가 있다. 어떤 집에 귀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는데 갈 데가 없어서 다시 와보니 깨끗이 청소되어 있고 빈 집이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더 악해졌다고 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는데 그 후에 새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상태가 전보다 더 나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살고 죄를 이기며 살기 위해서는 내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다시는 죄의 도구로 쓰이지 말고 의의 도구로 쓰이는 삶이 되라.

어떻게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은혜 안에 있어야 한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으라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만 살았다고 고백하라. 그리고 나의 몸을 하나님께서 의의 도구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 헌신하라.

1858년 영국에서 독일로 유학해서 공부하고 있던 22살의 여학생이 있었다. 그는 목사 딸이었지만 신앙생활을 등한히 한 채 단지 유학생활만 충실히 하다가 그만 병이 들었다. 어느 날 한 친구의 초대를 받았는데 별장 같이 큰 저택이었다. 그 집의 복도를 걷는데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 그림은 유명한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채찍으로 맞아 고난 받으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에 끌려서 그 앞에 섰는데 그 아래에 쓰여 있는 글귀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 너를 위해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주느냐?” 그 글을 본 순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나를 위해 희생하시고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살았구나. 주님,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드리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그 때 받았던 감동과 자기 헌신의 결심을 한 편의 찬송시로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찬송가 185장이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 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 

죄인 된 나의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새 사람이다. 내 몸을 하나님께 드려 의의 도구로 쓰임 받고 나를 위해 예수를 위해서 사는 삶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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