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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만난 사람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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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사람 (눅 19:1-10) 
 
 
행복과 불행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매우 행복할 것 같은 사람도 속으로는 불행에 허덕이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매우 불행할 것 같은 사람도 오히려 남이 모르는 행복을 즐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이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시간이나 환경에 따라서 바뀌곤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과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 원리를 바로 가르쳐 줍니다. 여기 소개된 세리장 삭개오의 경우를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그의 삶과 행동을 통하여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바른 이치를 깨닫고자 합니다.

1.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1-2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가진 자요, 소위 기득권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좋은 이름을 가졌습니다.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 또는 ‘정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삭개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그가 베드로의 동역자로 있다가 가이사랴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는 말도 있고, 또는 가이사랴에서 고넬료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으며, 그가 훗날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가 된 맛디아라는 말도 있습니다. 삭개오가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 사람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였습니다(레 11:45).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순결하고 정의롭게 살지 못하였지만 본래는 좋은 집안에서 좋은 이름을 빛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2)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稅吏長)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 지역에 있는 매우 오래 된 도시입니다. 구약 여호수아 당시에도 그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로 많은 인구와 견고한 성곽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수 2:1). 예수님 당시에는 여리고 평원의 곡창 지역에서 많은 농산물과 특히 고급 향료의 산지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로마 정부로부터 세리장의 직책을 부여 받아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세금을 매기고 거두는 세관원의 경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곤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아래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으나 삭개오는 로마 권력을 힘입어 자기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등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3) 재물을 가졌습니다.

삭개오를 두고 “세리요 또한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정부는 그들이 식민지로 지배하는 여러 곳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세관을 세우고 현지의 사람에게 세정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을 맡겼습니다. 삭개오도 그들의 정책에 따라 로마 정부와 자기 민족 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면서 임의대로 세금을 징수하여 일부는 로마 정부에 바치고 일부는 자기가 착복하곤 하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세리를 ‘면허증 가진 강도’라고 할 만큼 나쁘게 인식되었고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마 9:10). 그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습니다. 예레미야 17:11에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2.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같았으나 실상은 많은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불행하였습니다. 누가복은 12:21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1) 근본을 잃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이름대로라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과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갈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권력과 재물을 많이 가졌더라도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근본을 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허망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시 14:1). 로마서 1:28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7:5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자기를 잃었습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되고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권력과 재물을 소유하였지만 자기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마음속에는 많은 갈등과 번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즉시 달려 나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간 것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갈증의 표현이었습니다. 순결과 정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거짓을 생활의 수단으로 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있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스스로 회의를 품게 되면 삶의 의욕과 희망을 잃게 됩니다. 자기의 정체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사람이 겉으로 잘난 것처럼 과시하려 하는 것입니다.

3) 행복을 잃었습니다.

인간의 근본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존재 가치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면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창 1:27). 솔로몬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전 3:11).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충족되지 못하면 절대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영적 욕구의 충족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히 13:9).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는 자만이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3. 회복된 사람입니다.

10절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킵니다. 좌절된 꿈과 희망을 회복시키고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아 주는 것입니다. 

1) 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름뿐인 삭개오가 명실상부한 삭개오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의 특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면서도 실상은 삭개오처럼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무리를 향하여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마 3:9). 스스로 하나님과 격리된 채 허망한 것을 붙들고 살았던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언해 주셨습니다.

2) 신령한 생명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죄와 죽음 아래 있던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는 원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였습니다. 

또 8절에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잠시 잠깐 살다가 끝나는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되는 신령한 생명을 뜻합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에 근거합니다. 고린도전서 15:52에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하였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그의 마음속에서만 상상하고 동경한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보기 위하여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또 자기는 키가 작아서 쉽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길을 앞질러 가서 거기 있는 돌감람나무 가지에 올라갔습니다(3-4절).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시고 삭개오를 부르시며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지난 과오를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습니다.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고 또 남을 속이고 빼앗은 재산은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면 심령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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