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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아서 (눅 1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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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아서 (눅 15:8-10)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백 마리 양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되찾은 비유'(3-7), '열 개 중에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되찾은 비유(8-10), 그리고 '두 아들 중에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비유'(11-32)입니다. 세 개의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기쁨을 강조합니다. 

여러분도 아주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우산 같이 가벼운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아도 기분이 좋지요. 하물며 신분증이나 신용 카드, 지폐 등이 들어있는 지갑을 분실했다가 되찾을 때의 기쁨은 훨씬 더 큽니다. 만일 낯선 외국에서 여행을 하다가 여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여행을 할 수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구릅니다. 며칠 동안 수소문하다가 극적으로 여권을 되찾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이 경우, 본문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대상을 되찾았을 때 이웃 사람들을 초청하여 모두 잔치를 베풀듯이, 함께 여행을 하는 동료들에게 한 턱 내며 함께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잃어버린 것이 가치가 높을수록 되찾는 기쁨도 비례해서 높아지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대상이 그다지 가치가 높지 않습니다. 양이 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그냥 방치해 둔 채 여기저기를 헤맨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드라크마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드라크마는 희랍의 은전인데 한 데나리온에 상응합니다.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치 임금인 셈이지요. 물론 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한 드라크마도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없겠지만, 결코 가치가 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죽어도 좋다고 처신한 패륜아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회에서 내친 것과 다를 바 없는 아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용서를 하고 잔치를 베푼다는 사실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가치가 적은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목자나, 여자나, 아버지나 찾을 때까지 기어코 찾아내고 맙니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 15장 전체를 이해하는데 1-2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 두 가지 움직임(motion)이 포착됩니다. 먼저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당신에게 가까이 몰려드는 그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지요. 이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이 들으라고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이처럼 이 세 개의 비유가 발설된 사건과 배경, 비유를 듣는 청자가 이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에 세리와 죄인들은 양 백 마리 중에 한 마리 잃어버린 양처럼, 혹은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동전 한 닢처럼, 패륜아 중에 패륜아요 죽어 없어져야 마땅한 둘째 아들처럼, 가치 없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사역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그냥 잃어버린 채 내버려두어야 할 대상들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은 비율로 따지면 1/100이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은 1/10이고,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을 도로 얻은 것은 1/2, 가족의 절반을 되찾은 것이지요. 이렇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따져본다면 점점 더 가치가 높은 대상을 찾는 순서로 비유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또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이라는 시각에서 세 개의 비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잃은 양의 비유에서는 목자가 양을 찾습니다. 여기서 목자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은 길을 잃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상징합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되찾은 동전의 비유에서는 가정주부, 즉 여성이 동전을 찾습니다. 여기서의 여성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성령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성령은 다분히 여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기 때문에 잘 부합됩니다. 동전은 양처럼 음매음매 소리도 못 지르고 탕자처럼 스스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무엇인가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도저히 자기 힘으로써는 생명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해진 까닭에 길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이들에게 생명을 주셔서 길을 찾도록 도와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찾는 이는 가정을 가진 아버지이고 찾는 대상은 아들입니다. 여기서 찾는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아들이 죽게 되자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죽게 될 인생들은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천국 본향으로 되돌아가야지만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동전 한 닢을 찾되 끝까지 찾는 여인>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전이해(前理解)를 가지고 본문 말씀에 초점을 모으고자 합니다. 이미 앞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 비유 역시 세상 사람이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작은 동전 한 닢을 끝까지 되찾는 한 여인의 성실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그냥 잃어버린 채로 있어도 좋을, 그 동전 한 닢을 찾으려고 온 집안을 이 잡듯이 뒤지는 여인의 부지런한 모습이 부각됩니다. 

 그렇다면 먼저 오늘 이 비유의 주인공이 여자라는 사실을 눈여겨봅시다. 그 당시 고대근동 지방에서 여자는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하는 소외 계층입니다. 사실 '한 마리 잃은 양의 비유'에서는 신분이 아주 낮은 '목자'가 주인공입니다. 목자와 여성, 둘 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를 직접 듣는 청중,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에는 형편없이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세워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고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목자가 주로 남자였다는 사실에서, 이 두 번째 비유에서는 여자를 하나님으로 그리면서 그 당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성(性)의 균형을 맞추려는 누가의 세심한 배려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누가복음을 '여성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의 비유 중, 예를 들면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처럼 혹 여성이 주인공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있지만, 여성을 하나님으로 가정한 비유는 이 '동전의 비유' 이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자, 이제 본문을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봅시다. 여기 가정주부로 보이는 여성은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드라크마는 희랍의 은전으로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라고 해봤자 겨우 몇 주간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적은 돈이지요. 그런가 하면 어떤 학자는 열 드라크마를 그 당시 중동 지방의 여자들이 결혼할 때 동전 열 개를 엮어서 만든 목걸이나 머리 장신구(headdress)로 해석합니다. 일종의 결혼 지참금(dowry) 형식으로써 시집 올 때 가져오는 장신구인데 그 당시 여자들은 이것을 굉장히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얼마나 귀하게 여겼던지 밤에 잘 때에도 꼭 목에 걸거나 머리에 쓰고 잤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남성 중심이 아닌 여성 중심으로 열 드라크마를 보면, 이 돈 혹은 머리 장신구는 그 당시 여러모로 기를 펴지 못했고 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던 여성들에게는 매우 큰 재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인공은 비록 열 드라크마 중에 딱 하나만 잃어버렸지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찾아내려고 애섰던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별 것 아니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재산이었다는 것이지요.  

<동전 한 닢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이제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의 핵심은 이 여자가 어떻게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자세로 동전을 찾았기에 깊이 꽁꽁 숨어 있던 동전 하나를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8절에 나오는 세 개의 동사를 유심히 봐야 합니다.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는다'는 동사입니다. 

1. 등불을 켰습니다.  

여자는 등불을 켜고 빛으로 동전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으려면 빛이 있어야 하지요. 동전이 밝은데 노출되어 있었다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딘가 깊숙이,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볼 수 없었습니다. 장롱 밑에 숨었는지, 찬장 밑에 들어가 있는지, 아니면 어떤 옷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지, 어둠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둠 속에 숨은 동전을 찾으려면 밝은 빛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끔 단추를 잃어버렸든지, 반지에 달려 있는 보석을 잃어버렸든지,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렸든지, 그도 아니면 본문 말씀 그대로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든지 할 때, 손전등 하나로 장롱이나 책장 밑을 밝히 비추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영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어둠 속에 꽁꽁 숨어 있는 영혼 하나를 찾으려면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빛입니까? 먼저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9: 5절에서도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한 영혼을 찾고 살리려면 빛 되신 예수님을 비추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빛이 비추이는 곳마다 어둠과 죄악 속에 숨어있던 영혼들이 건짐을 받고 사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이 빛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빛을 이제는 우리가 어둠 속에 갇힌 영혼들에게 다시 반사해서 그들을 구원과 영생의 길로 안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 14-16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우리는 우리의 빛을 어둠 속에 빠진 영혼들에게 환히 비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숨은 영혼,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집을 쓸며'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여자는 그 당시 흔히 사용하던 종려나무로 된 빗자루를 가지고 집안 구석구석을 쓸었습니다. 왜 쓸었을까요? 돌로 된 방바닥 어딘가에 잃어버린 동전이 '쨍그랑' 하면서 쓸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랬겠지요. 아마 동전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 여자는 집안 살림을 다 치우고 샅샅이 빗질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한 사람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영혼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곳곳에서 부르짖는 영혼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영혼을 결코 살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영혼들이 겉은 멀쩡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치 않은 가운데 향락과 죽음 한 가운데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영혼 위에 쌓인 먼지와 쓰레기를 빗질을 해서 쓸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영혼의 소리를 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절규를 듣는 즉시 응답하여 그들을 살려야 합니다. 영혼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만이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27: 7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자들의 소리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들을 건져 주어야 합니다!     

3. 부지런히 끝까지 찾았습니다.  

여자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내기 까지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적당히 찾아보다가 중단한 것이 아니고 끈기 있게 했습니다.

 여러분, 한 영혼을 건지고 살리기 위해서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뚝심과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인에게서 아무것도 아닌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서 가구와 살림살이를 다 치우고, 등불을 켜고, 빗질을 하면서, 끝까지 수고하는 부지런함을 배워야 합니다. 한 영혼을 살린다고 하면서 적당히 기도하고 적당히 전도해보다 안 되면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하면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저앉아서는 결코 한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양 한 마리,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서도 비유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역시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끝까지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노력이 끝난 그 지점부터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다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부지런히, 끝까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스물여섯 살이 된 어떤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오년 동안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집안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심심풀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취미로 쓰기 시작했지만 점점 심혈을 기울여서 마침내 10년 동안에 걸쳐 1,037 페이지나 되는 장편 소설을 하나 완성했습니다. 그녀는 두툼한 원고뭉치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무명이었던 이 여자에 대하여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번번이 거절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7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자 여자의 원고는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닳아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한 지방 신문에 "뉴욕에서 제일 큰 맥밀런(Macmillan) 출판사의 사장이 애틀랜타에 왔다가 기차로 되돌아갈 예정"이라는 짤막한 기사가 났습니다. 그녀는 그 기사를 보자마자 원고뭉치를 들고 기차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가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맥밀런 출판사의 사장이 막 기차에 올라타려던 중이었습니다. 급해진 여자가 큰 소리로 그 사장을 불러 세웠습니다. "사장님, 제가 쓴 소설입니다. 제발, 꼭 한번만 읽어 봐주세요!" 

출판사 사장은 마지못해 원고뭉치를 들고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고뭉치를 선반 위에 올려다 놓고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그러는 동안 여자는 잽싸게 기차역을 빠져나가 우체국으로 달려갔습니다. 얼마 후 기차 차장이 사장에게 전보 한 통을 내밀었습니다. 그 전보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꼭 한 번만 읽어 주세요!" 그러나 냉정하기만 했던 사장은 선반 위에 있는 원고뭉치를 한 번 흘깃 쳐다 볼 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똑같은 내용의 전보가 또 배달되었습니다. 그래도 맥밀런 출판사의 사장은 여전히 원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또 다시 세 번째 전보가 배달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사장은 "참 질긴 여자도 있구나!" 혀를 내두르면서 마지못해 원고뭉치를 선반에서 내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소설 원고를 읽기 시작했을 때, 사장은 점점 더 소설에 깊이 빠져 들어가 목적지에 도착해 다른 승객들이 짐을 챙기는 동안에도 그 원고를 읽는 일에 정신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서 출판된 소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 1900-1949) 여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입니다. 40여개국어로 번역되어서 무려 3천만 부가 팔린 20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지요. 비비안 리와 클라크 케이블이 주연이 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역시 1939년 아카데미상에서 10개 부분을 휩쓴 불후의 명화가 되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하는 이들이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우리 역시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1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가 기뻐했던 것처럼 동전 한 닢을 찾아 낸 여자가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기쁨의 잔치를 벌입니다. 바로 이 기쁨 하나로 그 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잃어버린 영혼 한 사람을 되찾는 일에 이 세상 그 어떤 기쁨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 영혼의 기쁨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모두 길 잃은 한 영혼을 살리심으로써 이와 같은 시들지 않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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