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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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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막 2:1-12)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자라신 곳은 나사렛이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을(눅4:18-19) 듣지 않았다. 오히려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리려 하자(눅4:29),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사셨다(마4:13). 

그 때부터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개인적으로 구별된)동네라고 불리고(마9:1), 예수님의 사역의 근거지가 되었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각 마을의 회당에서 전도하셨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으셨다(막1:39). 그러던 어느 날,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에게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였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깨끗하게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고쳐준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다. 치료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많이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막1:45). 

(1-2)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이제 여러 날이 지나자,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 이 소문이 듣고, 몰려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든지, 안으로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고, 사역이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에 관심을 가졌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거나, (요6장)처럼, 떡을 먹고 배부르기를 바랐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에, 지장을 줄 때가 많았다. 무리가 떠나가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비로소, 깊은 영적 진리를 전하셨다. 

예수님은 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를 말씀하셨다. 이 '도'는 '말씀'을 뜻한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의 도이기 때문이다. 가버나움 집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셨다. 

다행히 가버나움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들처럼, 끔찍하고 무지막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 동기로, 예수님께 나아왔는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육적인 일에만 관심을 쏟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오히려 지장이 될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처럼 하나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며, 구원을 얻을 기회도 놓쳐버리고 만다.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쁨으로 순종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길이다. 

1. 죄 사함을 받은 중풍병자(3-5).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중풍병자는, 남들의 부축을 받아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누운 채로, 4사람이 침상을 들고, 예수님에게 왔다.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었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서도, 동정을 베풀지 않았다. 모인 사람들은 한 마디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풍병자와 4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길이 막히자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당시의 집들은 단층이었다. 집밖에 계단이 있어서, 그 계단을 통하여 지붕 위로 올라갔다.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들고서, 힘들게 지붕 위로 올라갔다. 먼저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위치를 찾았다. 

정확한 자리를 찾은 후, 그 곳의 기와를 벗기고,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지붕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니, 그들 위로 먼지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지붕에 구멍 하나가 뚫리더니, 그 구멍은 점차로 커졌다. 

잠시 후에 큰 구멍을 통하여,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상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왔다.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은, 그 중풍병자를 향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그 중풍병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가르치심을 중단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그들은 예수님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붕 위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주님,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그를 고쳐주실 줄을 믿고서, 주께로 데리고 왔나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그 중풍병자의 병을 낫게 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졌기에,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요9장) 말씀처럼, 죄 때문에 병에 걸린다고 여겼다. 따라서 중풍병자는, 그의 병든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가 싫었지만, 예수님이 반드시 병을 고쳐주신다는, 믿음 때문에 나왔다. 그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힘들게 지붕 위로 올라가고, 지붕을 뜯었다. 예수님은 반드시 고쳐주신다는 믿음을 보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는, 오로지 중풍병자 한 사람에게만 말씀하셨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4명에게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믿음이 중풍병자에게 있었다. 

물론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자기 병을 고쳐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보다 마음으로, 더 절실하게 바라던 것은 따로 있었다. 예수님은 (요2:25) 말씀처럼,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신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아셨다. 그것은 자기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중풍병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애통하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왔다. 말하자면 4명의 사람들은,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만 믿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도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다. 이제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났다. 구원받았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완전히 옮겨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작은 자'(      , 어린이, 자식)이라고 부르셨다. 

(낳다, 태어나다.)는 말에서 왔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를 무시해서, 부르는 말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멸망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예수님께 나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 주신다. 이런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2. 예수님을 비난하는 서기관들(6-7).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4파로 나누어졌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열심당파였다. 각 파마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서기관들이 있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자들이다. 요즘 말로, 서기관들은 각 교단의 신학교 교수에, 해당하는 셈이다. (눅5:16)에 의하면, 그 자리에 서기관들은, 바리새인과 함께 있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였다. 그런데 그들이 온 이유는,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을 때,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결정적인 잘못을 찾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유대교에서 가장 큰 죄는, 바로 신성 모독이다. 신성 모독에는 3종류가 있었다. 

(1) 율법을 비방함.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율법을 비방했다는 죄목을 덮어씌우려고 했다(행20장).  

(2)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함. 
이는 율법을 비방하는 것보다, 더 나쁜 신성 모독이다. 여기에 대한 예가 (레24장)에 등장한다. 

(3) 하나님처럼 행세함 
최악의 신성모독이다. 본문의 서기관들은 이 죄목을 예수님께 덮어씌우고자 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책잡았던 근거는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의 주장대로, 제사장도, 선지자도 죄를 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기에, 예수님을, 신성 모독을 하는 자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았다. (레24장)은 신성 모독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설명해야만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탄을 힘입어서, 이적을 행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죽였는가? 

예수님이 로마에 반역하는 것처럼 꾸며서, 로마인의 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은, 신성 모독을 하는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만일 죄 사함의 권세가 없는데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면,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 

반면에 예수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이다. 죄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사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 보이셨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확고하게 가지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증명하는 능력(8-12).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 아셨다. 

그래서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했다. 여기서 '이것'은 복수형이다. 서기관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 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율법이 명한 바에 따라, 예수님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전혀 입밖에 내지를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생각을 다 아셨다. 예수님은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삼상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왕상8:39)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대상28:9)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마음에 있는 소원을 다 아셨다.  

또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바도 다 아셨다. 이것만 봐도,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자기를 죽이려는 서기관들에, "너희가 내 말을 오해하였구나. 내 말의 뜻은, 내가 그의 죄를 사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죄를 사하여주셨다는 뜻이니라." 

이렇게 변명하셨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자신은 분명히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향해, 이같이 물으셨다.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죄를 사하는 일이나, 이적으로 병을 고치는 일이나, 사람에게는 똑같이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쉬운 일이다.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말이 더 쉽겠는가? 당연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쉬울 것이다. 이는 신성 모독하는 자라도, 말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은, 금방 진위가 가려질 수 있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하기에 어려운 말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서기관들의 생각에, 말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그 일을 행하심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에, 말하기가 어렵다고 여겨지는 일도, 역시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를 원했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서기관에게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3가지를 명하셨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는 남들이 부축을 한다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침상에 누운 채, 전혀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셨다. 그의 힘으로 일어나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에게, 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이렇게 행하려면 중풍병자의 몸에, 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한다. 피부, 힘줄, 혈관, 뼈, 뇌 세포까지, 모두 다 새롭게 창조되어야만 했다. 

이 같은 새 창조의 역사는, 우리의 몸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명하신 그대로 일어나, 그 자리에서 상을 들고, 자기 집을 향해 걸어갔다. 이 이적의 목적은,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 

그 곳에 모인 무리들은, 다 놀랐다. 그들은 그제야, 나음을 입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과거에 볼 수 없던, 기이한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반응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예수님은 사람일뿐이었다. 

결론이다. 어떻게 사람이, 창조의 역사를 행할 수 있고, 어떻게 사람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또한 이적을 통하여, 이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죄를 용서받으려면, 죄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죄가 있다. 하나님은 죄가 없지만, 영이시기에, 몸이 없기에, 죽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다(요1:14).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중풍병자와 같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예수님의 긍휼을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자. 그리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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