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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요일 4: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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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요일 4:19-21)


어릴 때 결혼해서 50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가 계셨답니다. 워낙 할아버지가 무뚝뚝하셔서
할머니는 평생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셨답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는 어느 프로그램에 참석하였답니다. 사회자가 할아버지께 “사랑한다”고 말해보라고 했답니다. 할아버지는 쑥스러워 말씀을 하지 못했답니다. 

그러자 사회자가 계속 “사랑한다.”고 한 번만 해보라고 했답니다. 드디어 할아버지가 입을 열어 말씀하셨답니다. “지도 알끼다~~”라고 했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사랑합니다.”라고 해 보세요. 부부가 옆에 앉아 있으면 손을 잡고 “여보 사랑해요.”라고 해 보세요. “아버지 사랑해요.” “어머니 사랑해요” “애야 사랑한다.”라고 가족을 보면서 말해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은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한 실험에서 부부간에 얼마나 의사소통이 잘 되나를 알아보기 위해 "여보 고마워. 사랑해"라는 문자를 아내에게 보내게 했답니다. 아내에게 답장이 왔는데 천차만별이었답니다. "대낮부터 술 먹냐?" "누구시죠?" "약 먹었어?" 

그런데 전날 대판 싸운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답니다. "개똥이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육신적인 가족만 가족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영적으로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족으로 실천해야 할 최고의 계명이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는 형제로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7, 11, 20, 21). 

7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려 53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고 납세의 의무를지지 않으면 범죄하듯 신앙인은 형제에 대하여 사랑의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 이름 속에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남편, 아내, 자녀들의 이름을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말썽만 피우는 자녀일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자녀일지라도 우리가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 상하게 하는 남편일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본래 요한도 사랑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1)그는 편협한 열성분자였습니다. 막3:17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에게 별명을 줍니다. "(막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천둥 번개의 아들입니다. 그만큼 성격이 급하고 열정적이다는 말일 것입니다. "(눅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다른 교회가 아무리 잘 해도 내 교회가 아니면 폄하합니다. 다른 권사님이 아무리 주방 봉사를 잘해도 내 편이 아니면 칭찬하지 않습니다. 편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이 된 사람입니다. 편 가르기를 한 사람입니다. 흑백 논리로 사람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2) 그는 생명의 귀중성을 몰랐고 사랑이 없고 쉽게 격분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어떻게 합니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9:55)"라고 했습니다. 

3)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야심가였습니다.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변하였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외치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음을 전하다 에베소에서 잡혔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독사굴에 던짐을 받고 물속에 던짐받기도 하였지만 극적인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 되어 들 것에 실려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들것에 실려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러자 한 성도가 "선생님 그 설교는 수십 번도 더하였습니다. 이제 새 설교가 없습니까?"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 것을 봅니다. 앉은뱅이를 사랑하여 베드로와 함께 앉은뱅이를 고쳐주다 옥에 갇힙니다(행3:12-4:4).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출세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편협한 열성분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는 종교적 영웅주의자가 아닙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행8:14). 베드로를 앞세워 일을 합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최고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합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12:28)”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1)”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한 가족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는 사랑이 풍성한 교회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 그 무슨 소용 있나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유일한 표증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품안에 깃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가정, 좋은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하 세상은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11, 19).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이같은 방법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다는 말씀입니까?

9,10절 보십시오. 독생자를 보내시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배반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우리가 사탄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조건을 보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으로 볼 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자기로 시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욕망에서 시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랑이요, 에로스 적인 사랑입니다. 이용가치가 있으면 사랑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버립니다. 보상적인 요구가 거절당하면 증오로 변하여 버리는 것이요, 그 사랑 뒤에는 미움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2) 상대방로부터 시작되는 사랑도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조건이 달라지면 금방 배신하고 증오하고 이용합니다 

3)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입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께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 신부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된 다미엔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오래 전에 삼포능자의 [사랑하며 용서하며]라는 책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내용이 있습니다. 1954년 가을 연락선인 토오야 호가 태풍을 만나서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승객 몇 천 명 중에서 1,011명이 이 날 밤의 조난으로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토오야 호에는 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명대가 없는 젊은 남녀에게 자기들의 구명대를 주고는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선교사 사진을 자기 방에 지금도 걸어 놓고 있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네 사람의 군목을 위한 기념 예배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연이 이렇습니다. 

1943. 1. 22 폭스, 구스, 폴링. 웨싱턴 군목이 '도체스터 호'에 승선하였다고 합니다. 그해 2월 3일 55분 독일 잠수함 u-233 이 도체스터 호에 접근하였답니다. 얼마가지 안아도체스터 호는 어뢰를 맞고 점점 물에 잠기기 시작했답니다. 네 명의 군목은 잠기어 가는 함정 속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구명정을 커내어 주기 시작하였답니다. 사용할 수 있는 구명정은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마지막 남은 구명정까지 모두 꺼내어 주고 그들은 갑판에 어깨를 맞잡고 섰습니다. 

그들은 어깨를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배에 따고 있던 병사 904명 중 60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물론 전사자 명단에는 장렬하게 죽어간 4명의 군목명단도 끼어 있었습니다. 

1951. 미국 국민은 네 목사 기념 예배당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1961. 1. 18 의회 표결로 "그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특별훈장"을 수여하였고 그들이 천국에 간 2월 3일을 네 군목을 위한 기념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내 마음에는 맞지 않고, 아직 내 마음에 증오가 가시지 않고, 아직 미운 감정이 정리 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피해를 주고,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방법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삶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는 사랑으로 감동이 넘치는 살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여야 합니까?


3.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명령을 실천하는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2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님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명령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거역하느냐 순종하느냐 둘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입니다. 형벌과 상급의 문제입니다. 실천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입니다. 창조와 파괴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면 창조되나 사랑하지 않으면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의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하지말라는 것입니다(7절). 
물론 사랑은 거듭남의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안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7).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대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그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을 통해서 입니다. 순종함으로 경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3)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6). 

12-16절에서 네 번이나 강조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 때문에 원수가 되어 미워합니다. 아마 이번 주 새벽기도회를 하면서도 불편한 가정들이 있을 것입니다. 새벽 기도회 신경쓰지 않고 밤 늦게 들어온 남편으로 남편 미워한 아내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좋은 일 하자면서 서로 마음 맞지 않아 미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번은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온 가족이 잘 나오시는 부부였는데 몇 일 나오다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왜 엄마 아빠 새벽기도회 중간에 그만두었느냐?” 새벽에 차를 타고 오다가 늦게 나온다고 싸웠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례를 서로 가는데 아내가 늦게 나왔습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토요일인데 분명 서울 가는 길이 밀릴 텐데 늦은 것입니다. 가는 동안 사랑의 마음은 달아나고 분노만 마음을 매웠습니다. 사탄의 장난에 놀아난 것입니다. 늦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신랑 사정상 결혼식이 30분 미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신이 앞질러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냥 사랑하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속없는 사람같지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에릭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첫째로는 관심을 가지는 것, 둘째로는 책임을 느끼는 것, 셋째로는 존중하는 것, 네 번째로는 이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고전 13장에서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만 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존중해주고 내가 오래 참고 내가 주면 시간 지나면 모든 것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워라"라는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대만에 육군사관학교 수영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19세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부모들이 절친한 사이라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 언약을 하고 혼기가 되자 결혼을 시켰습니다. 식을 올리고 신혼 첫날밤 가마를 타고 온 신부의 금란직보를 벗었을 때 신랑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온통 우박 맞은 잿더미 모양의 곰보인데다 아주 박색이었습니다. 동갑내기인데도 40여 세는 족히 넘어 보였습니다. 그는 어머니 방으로 도망 나와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울먹였습니다. 어머니는 운명이러니 하고 체념하고 살으라고 그를 타 일렀습니다. 그는 기숙사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여름방학 때 강제로 아버지는 그를 대리고 왔으나 아내는 원망은커녕 눈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열심히 집안일을 잘 돌보았습니다. 갖은 냉대와 구박을 하였지만 아내는 부업을 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아들과 딸을 낳았습니다. 딸에 소용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생활을 하였고, 아들은 육사에 우수한 성적으로 제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장에서 올랐는지 각막염으로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시력을 잃어버린 때였습니다. 졸지에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각막이식 수술을 하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그 말을 하자 아내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만불로 2만 달러가량이 들어 있는 예금통장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녀가 남몰래 모아놓은 피와 땀의 결실이었습니다. 

"당신은 저 같은 것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글을 읽을 수 없으면 눈 뜬 장님이니까요. 당신은 눈을 되찾아야 해요. 의사는 교통사고로 죽은 운전사가 아내에게 유언으로 6남매를 위해 자기의 여러 부분을 팔아 쓰라고 유언하여 그분의 것을 이식한다며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수술은 성공하여 1주일 동안 회복한 후 택시를 타고 딸애와 함께 집으로 왔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들어가지 무슨 까닭인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제 오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고마워 고생 많이 시키었어." 그는 앞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아내는 상을 다 보고 나더니 벽 쪽으로 돌아 앉아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조금 전 하신 그 말씀...그 말씀 만으로 저는 기뻐요. 제 인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는 울먹이며 떠듬떠듬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딸에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방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딸 소용이는 어머니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격렬하게 울부짖었습니다. " 엄마. 아빠에게 모두 털어바요! 엄마가 아버지에게 눈을 뽑아드렸다고. 자아 얼른 보여 드리란 말이어요." "얘야 너무 목소리가 높구나 엄마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란다." 그녀의 왼쪽 눈의 홍채는 수술 전의 그의 눈처럼 흐려져 있었습니다.

"금화!" 그가 아내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왜 이런 짓을 했소."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쥐어흔들며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소중한 제 남편인 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중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남편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아내는 아내라는 하나의 이유로, 부모는 부모라는 하나의 이유로, 자식은 자식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성도는 성도라는 하나의 이유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다. 십자가의 댓가를 치르고 한 가족된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느껴질 정도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있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20-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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