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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선교합니다 (눅 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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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선교합니다 (눅 10:1-6 )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누가복음 10:1-6)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에서 선교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가서 제자를 만들라”는 포괄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서는 선교사들이 직면하는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무리 중에서 70명을 따로 세우시고 둘씩 짝을 지어 35팀을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추수 밭으로 비유하셨는데 이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추수할 때는 되었고 일꾼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일꾼이 없다”가 아닙니다. 지금 앞에 있는 수천 명에게 “너희가 누구든지 나가거라” 하시면 될 텐데, 대신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너희가 추수할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 

여기 ‘주인’이라는 말과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선교사에게 있어서 이 말만큼 중요한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를 위하여 일터에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 일을 위하여, 자기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추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불러 보내셔야 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는 일꾼과 보내는 주체가 먼저 관계를 정립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가느냐? 누가 너를 보냈느냐? 너는 누구를 위해 부름을 받았느냐?”를 분명히 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추수 밭에 일꾼이 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추수의 주인이십니다. 가장 기본적인 이것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선교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몰라주고 인정해 주지 않는 교회의 작은 일일지라도, 일꾼으로 부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요 부르심입니다.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불러 보내시는가를 알고 가는 사람들은 희생과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선교지에서 어느 선교사 댁에서 하룻밤을 잤는데, 어쩌면 그렇게 좁고 추운지요. 승용차도 작아서 딱 4명만 타야지 1명도 더 타지 못합니다. 그분들이 어떤 분들인가? 한국에서 1천2백 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던 사장이요 로터리클럽 회장이었습니다. 사업이 망해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한창 잘 되던 사업을 그대로 접고 선교지로 가셨습니다. 이런 희생은 “누가 이들을 불렀는가?” 하는 관계정립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이 일꾼들에게 “너희가 알아서 마음대로 가라!”고 하셨다면, 가서 싫으면 그냥 돌아올 것 아닙니까! 그런데 추수의 주인이 일꾼을 선택하시고 보내시고 일꾼은 주인의 부름을 받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더 이상 일꾼의 일이 아닙니다. 추수할 밭의 주인의 일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그 다음 말이 성립됩니다. 

주님께서는 70명을 따로 세우시고 둘씩 짝을 지으신 후 일꾼들에게 “너희가 가고 싶은 아무 곳에나 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계획하셨던 각 동네, 각처로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너는 저쪽으로, 너는 이쪽으로 가라”고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추수 밭에는 주인이 있습니다. 주인은 어느 밭에 무엇을 심었고 그 밭의 추수는 언제 하는 것이 좋은지 자기 밭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농촌에 가면 품앗이를 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곤 하는데 품앗이를 받아 오는 사람은 그런 내용을 잘 모릅니다.

할렐루야교회가 주인의 집이라 하고, 김상복 목사님이 추수할 주인이라 합시다. 주인에게 밭이 3개가 있는데 양재동에, 용인에, 나머지 하나는 야탑동 집 옆의 텃밭이라고 합시다. 주인이 일꾼들에게 양재동 밭에 가서 추수를 하되 이 달 안으로 반드시 끝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올해 농사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용인의 밭은 양재동 밭의 추수를 다 끝내고 다음 달까지 끝내라고 했습니다. 대신 야탑동의 텃밭은 손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추수할 것도 없지만 주인이 쉬엄쉬엄할 것이니 양재동과 용인의 밭을 제 때에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꾼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양재동과 용인 밭은 길도 모르고 험해요. 그래서 “우리 그쪽에 가지 말고 집 옆에 있는 야탑 텃밭에 가서 일하자!”하고 일주일 만에 추수를 다 마쳤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양재동과 용인 밭은 추수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망쳤습니다. 텃밭은 추수하지 말라고 했는데 해서 망쳤습니다.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헛일을 한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결과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선교의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선교사가 20여만 명에 이릅니다. 이들 중에 91.8%는 기독교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7.5%가 비기독교권이고 0.7%가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미전도종족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는 선교사가 없다고 야단이고 어떤 곳에는 선교사가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꾼들이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 가서 일을 해야 할 것인가는 금방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거기는 멀고 험하니까 가지 말고 가까운 곳에 가서 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제가 아프리카 선교를 하다가 한국에 나와야 하는데, 제가 하던 일을 맡아 줄 분이 별로 없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선교사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그 분이 그런 일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 늘 마음에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좋은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이 일을 놓고 기도하던 중에 “선교사님,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셨습니다. 마침내 일꾼을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서류를 준비하고 훈련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있는데 그 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힘이 빠진 목소리로 “선교사님, 저희 아프리카로 못 갈 것 같습니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당회에서 아프리카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길이 너무 멀고 험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럼 어디로 가라고 하십니까?”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뭡니까?” “비행기 1시간 거리라 나중에 교인들이 방문하기도 쉽기 때문이랍니다.”

선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기 쉬워서,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우리를 부르신 주인님께서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추수의 일꾼은 주인이 가라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주인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우리가 어느 곳에 가서 선교를 해야 할지 답이 금방 나옵니다. 물론 최전방 어려운 곳에 선교사가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수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곳에 가기를 원하시면 우리는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 가는 것이 일꾼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주인인 예수님께서 일꾼들을 보내시면서 전대(지갑), 주머니(배낭), 신(예비신발)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9절에 보면 옷도 예비로 준비해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주인이 일꾼을 보내면서 빈손 들고 나가서 청빈하고 겸손하고 가난하게 거지처럼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에게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말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골에서 품앗이 일꾼을 부르면서 “오늘 점심은 각자 알아서 먹으세요!” 합니까? 아닙니다. 점심과 음료와 새참, 농기구까지 모두 준비합니다. 거둔 곡식은 일꾼들이 알아서 가져가지 않고 주인의 곳간에 들어갑니다. 일꾼들은 추수만 도와주러 온 사람입니다. 오늘 추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선교사나 주의 종들은 그를 일꾼으로 부르신 주님께서 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것을 알고 일하러 가라는 겁니다. 때로는 선교사들에게 현실이 눈에 보이고 인간적인 판단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교사는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담력이란 ‘내가 비록 빈손 들고 서 있지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갖지 못하면 선교사는 약해집니다. 

제가 속한 WEC 선교회는 독특한 선교정책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선교재정에 관한 것입니다. WEC 선교사들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재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알리거나 부탁하거나 요구하거나 호소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암시도 주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일하던 아프리카 감비아는 비포장도로가 많아서 일반 승용차는 며칠 만에 스프링이 부러지고 맙니다. 그런데 제가 할렐루야교회에 와서 목사님께 “목사님, 감비아의 길은 하도 험하고 고약해서 일반 차로는 감당을 못합니다. 그런데 단단한 4륜구동 짚차 하나만 있으면 정말 맘 놓고 일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짚차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이것은 차를 사달라는 뜻이지요. 선교사가 이런 암시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교비용은 사람에게 호소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후원자를 붙여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셔야 하고, 후원자도 같은 선교적 마음으로 임해야 가능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믿음과 관계가 멉니다. WEC 선교사들의 기도카드나 잡지의 어디에도 후원계좌번호가 없습니다.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 일을 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에 우리 선교회가 오래전에 큰 규모의 진료소를 세웠습니다. 감비아 사람들의 질병은 참 특이합니다. 고혈압, 당뇨, 심장병은 아예 없습니다. 대부분이 말라리아, 배탈, 상처, 두통 등입니다. 필요한 약은 감비아에서 구할 수 없고 전부 외국에서 들어와야 하는데 이 약값이 만만치 않습니다. 선교 단체가 약값을 대고 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교회도 감당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많은 재정이 들어갑니다. 이런 사역을 함에 있어서 어떤 단체는 현지에서 직접 일을 하고, 어떤 단체는 재정만 지원합니다. 감비아 병원에는 월드비전에서 매월 2만 불씩 지원을 했습니다. 그 돈으로 독일, 영국 등에서 약을 구해서 현지인들에게 거의 무료로 공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월드비전에서 저희 선교회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다른 지역에 지원해야 될 큰 일이 생겨 2개월 후에는 더 이상 지원금을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이 없으면 병원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교사들 돈으로는 감당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40명의 선교사들이 급히 모였습니다. 그 중에 2명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이 사실을 대강이라도 독일과 호주에 알리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선교사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껏 이런 일을 사람에게 먼저 알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한 이 형편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은 우리를 여기 보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 주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2주 후에 평소에 전혀 교제가 없던 유럽의 한 단체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혹시 귀 선교지에 재정적인 필요가 없으신지요?”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말하지는 않지만 물어 오면 답할 수는 있습니다. 재정이 필요하냐고 묻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잖아요. 

이렇게 편지가 오면 “기도 응답이구나!”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히 편지를 씁니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연락을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월드비전에서 지원을 끊어서 걱정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알려 주는 거니까요. 우리는 아주 점잖은 표현으로 “아이고, 후원해 주시면 너무 감사하지요” 이 말만 썼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얼마 필요한지 모릅니다. 한 달 후에 답이 왔습니다. 월드비전의 후원이 끊어지는 다음 달부터 매월 1만5천 파운드(2만2천 불)를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2천불을 더 붙여 주셨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문제는 일꾼들이 이 사실을 실천하는 것에 자신이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선교사들이 담대해집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꾸 사람을 쳐다보고, 손에 쥔 것을 쳐다보고, 교회나 단체를 쳐다보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절).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늘날까지 보셨습니다. 우리 일꾼들이 가는 곳마다 늑대들이 으르렁거립니다. 카자흐스탄에 다녀오신 분들은 이 말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그곳은 목숨 걸고 가는 곳입니다. 늑대들이 기회만 있으면 잡아먹으려고 달려듭니다. 그 안에 어린 양 같은 선교사가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을 늑대 소굴에 보내시면서 “미안하다 얘들아, 가서 늑대가 으르렁 대면 그냥 먹혀라!”하시는 건 아니거든요. 주님은 제자들이 그렇게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너희가 늑대소굴 같은 곳에 가지만 그 늑대들의 입을 제어할 수 있는 분이 바로 너희를 보내는 나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님이 주님인 줄 알면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으로 선교지에 나갑니다. 그러나 만만한 곳은 없습니다.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어서 가는 곳마다 늑대가 우글거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심을 봅니다. 

아프리카 감비아는 모슬렘 국가입니다. 저는 월럿 부족과 만딩고 부족을 위해 사역을 했는데 월럿 부족은 조상 대대 이슬람부족으로 자부심이 무척 강합니다. 그곳 자매 한명을 접촉해서 개종시켰습니다. 이 자매가 예수를 믿고 참 아름답게 자랐습니다. 18살에 만났는데 21살 때 이 자매가 세례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다 알게 되니 가족에게 먼저 알리라 했습니다. 물론 반대는 있겠지만 알리기는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자매의 식구들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앉아 잡담을 나눌 때 말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자매가 집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현관 밖을 보니 그 자매가 속옷만 입은 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제가 문을 열자 자매는 그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 뒤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자매를 내 놓으라고 합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저었습니다. 그들은 1시간 째 실랑이를 벌이다 돌아갔습니다.

그 자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동네 주민들이 기분 좋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말을 꺼냈다고 합니다. “제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증표로 이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말까지 마치자 아버지가 자매의 머리를 잡아 땅바닥에 눕히고 밟기 시작했답니다. 그러자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밟기 시작했습니다. 자매가 소리를 지르니까 밖에 있던 고등학생 남동생이 무조건 달려들어 사람들을 몸으로 밀어내고 누나를 깜깜한 어둠속으로 빼낸 것입니다. 

다음 날, 세례는 줘야하는데 자매는 퉁퉁 부은 채 누워있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조용하던 사람들이 밤10시 무렵에 자매의 가족과 이웃 20여 명이 우리 집을 찾아 왔어요. 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네 놈이 모슬렘 땅에 들어와 더러운 종교, 기독교를 퍼트려서 우리 딸이 넘어갔으니 네 놈이 알라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자매의 아버지보다 그 옆에 있던 삼촌이 더 무서웠습니다. 흑인들은 보통 눈이 아래로 처지고 착하게 생겼는데 그는 눈이 아주 무섭게 생겨가지고 자기 형이 나를 저주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고 저를 계속 째려보았습니다. 저는 저주하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저 삼촌이 나를 공격하려고 무엇을 숨겨놓고 저러나?’ 경계하였습니다. 자매의 아버지는 1시간 동안 저주하고 “네 놈의 목숨이 보존될 줄 기대 마라!”하며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살기(殺氣)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날 밤 그 무리 속에서 살기를 느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자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현관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또 점검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방에 들여보내고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상황이 너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저를 지켜주옵소서. 우리 가족을 지켜주옵소서. 그들의 눈에서 살기를 봤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할 태세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데, 제가 아까 분명히 잠근 뒷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봤더니 자매의 아버지가 저주할 때 옆에서 팔짱끼고 저를 째려보던 그놈이, 나무도 자르고 풀도 베고 고기도 자르는, 감비아의 긴 칼을 가지고 서있었습니다. 저는 온몸이 마비되어 꼼짝없이 있는데 그가 말 한마디 없이 제 오른쪽 옆구리를 꾹 찌르는 겁니다. "주여, 저는 이제 여기서 죽습니다. 제 영혼을 받으시고 제 가족을 지켜주세요." 하고 눈을 떴는데 꿈이었습니다. 죽는 환상을 본 저는 ‘오늘 내가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전화가 없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기도하려 해도 극한 두려움에 기도도 안 됩니다. 성경을 보려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내가 오늘 어떻게 죽으려나 생각만 했습니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 왔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침잠이 많은데 이른 아침에 우리가 양육하던 마머드 카마라가 “목사님!”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 친구가 제 앞에 앉더니 다짜고짜 우리 동네에 미친개가 한 마리 있다는 겁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정신이 아니라 했지만 계속 말을 합니다. 그 개가 얼마나 사나운지 사람들이 근처에도 못 가는데 아직 그 개에게 물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신기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주인이 개의 목과 다리를 철사로 꽁꽁 묶어놓았기 때문이랍니다. “목사님, 모슬렘들이 미친개처럼 짖어도 우리를 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묶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순간 ‘하나님께서 공포에 떨고 있는 나에게 지금 이 청년을 보내셔서 말씀하시는구나!’ 했습니다. 그 자매는 이후에 수십 명이 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도사와 결혼해서 목사 사모가 되었고 지금 감비아 교회의 여성 지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내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종종 같이 있겠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이 땅 끝일지라도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으신 여러분, 그것이 어떤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긴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참고 멀어도 가고 어려워도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일꾼입니다. 그것이 선교사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신실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병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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