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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 (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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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눅 19:1-10)
 

오늘은 교회력을 따라 추수감사주일로 교회가 지킵니다. 이렇게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여러분은 어떤 일에 대하여 감사할 것인가 생각하며 일년을 돌아봅니다. ‘추수감사’이니까 일년을 수고하여 거두어들인 수확에 대하여 감사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일년 동안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무엇을 채우셨는가 돌아보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일을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며칠 전에 어떤 아는 목사님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곱셈의 법칙은 어디에도 통합니다. +,-,나누기,곱하기 등 기초산수만 잘하여도 인생은 복이 터지는데 기왕이면 더하기나 곱하기보다 내 것을 나누는 그리고 빼는 것으로 인생을 출발하면 더 할 수 없는 복이 터진답니다. 

누가복음의 주제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가복음은 1장과 2장에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따라 주님께서 나시고 그 언약을 기다리던 자들에게 보이셨음을 말함으로 그 언약을 이루셨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3장부터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택하시고 성령으로 행하셔서 가르치심을 9장50절까지 말합니다. 그 후에는 9장51절부터 19장27절까지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말하고, 19장28절부터 23장56절까지는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심을 말하며, 24장1절부터 53절까지는 예수께서 다 이루시고 승천하심을 말합니다. 

이렇게 누가복음 전체를 볼 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말씀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을 따라 제자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9:51-62절에 이 제자도가 무엇인지 그 원리를 말씀합니다. 6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고 한 말에 대한 답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럼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요? 어떤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를 때 아버지를 장례하는 문제, 가족을 작별하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따른다고 했는데, 주님께서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 땅의 나라에 속한 것에 매여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있습니다.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주님의 뒤를 따르는 백성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삭개오가 한 말과도 연결이 됩니다.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 서로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것인가를 말씀하셔서,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하며, 성령을 선물로 받고 이 일을 제자로써 감당해야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하셔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일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써의 삶을 누가복음 18장에 부자청년과 베드로를 대비시켜서 비교해 주십니다.

그런 다음 이제 주님은 그 말씀하신 원리를 따라 18:31절-34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그럼 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주님의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여리고 성을 배경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가까이 가셔서 소경된 자를 보게 하신 일, 그리고 여리고 성에 들어가셔서 삭개오를 구원하신 일을 말씀합니다. 그 후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올 때에 열 므나를 주고 떠났는데 어떻게 왕권을 인정하고 그 왕의 명령을 지켜 수행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열 므나에 대한 결산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상 18:31-19:27절까지가 한 묶음으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여리고성을 먼저 언급하는가? 이에 대하여는 구약적인 배경, 즉 여호수아서의 배경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에 나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점령한 곳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 성의 정복이 모든 가나안 땅의 정복을 말해 주는 시금석이었습니다. 그 때 정탐꾼을 보내어 라합의 가정이 구원얻음에 대하여 말해주고,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점령하여 모두 불태우고 다시는 그 성이 세워지지 못하는 저주까지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대적들과 싸움을 벌이시고 원수들을 정복하는 일을 행하시는데 그 일의 성격이 이 여리고성에서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싸움이며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인가를 설명해 준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리고성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여리고성에 가까이 가셨을 때 맹인을 치료하신 일이고, 둘째는 삭개오의 가정에 구원을 선언하신 일입니다.
  
먼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셔서 보게 하신 일이 여리고성을 중심으로 한 첫 주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하신 후에 첫 번째 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지나가시니까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하였습니다. 구걸하다가 이 맹인은 소리쳐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맹인은 다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사 보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심을 말씀하시면서 그가 어떤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사 삼 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셨을 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일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으나 이 여리고 성의 구걸하던 맹인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만을 듣고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그의 긍휼함을 원하였습니다. 즉 보지 못하는 맹인이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오신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그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펴서 읽으시고 이 글이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신 말씀이 이 여리고 성의 맹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4:16-1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님께서 오셔서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의 일을 하셨는데 그 일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성령이 임하셔서 그의 사역을 말씀하신 그 일이 여리고 성의 맹인에게 나타나고 이룬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베푸신 긍휼의 사역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여리고성 전투는 오직 기생 라합의 가정만이 구원함을 입었습니다. 다른 여리고성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를 장사지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려 하지 않고 대적하였으나 오직 라합의 가정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 가정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듣고 보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처럼 이 맹인이 나사렛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았습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3:34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처럼 예루살렘 사람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맹인과 같은 비천한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영접하여 그의 긍휼하심을 얻었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인이 보게 된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삭개오의 가정의 구원에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주제를 따라 본다면 이 맹인이 보게 된 구원의 삶이 삭개오의 구원함에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삭개오가 나타냅니다. 주님처럼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의 가정에 임한 구원은 단지 개인의 가정이 어떻게 구원을 입었는가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것의 결론이 바로 이 삭개오의 가정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후에 열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결산하시는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삭개오의 가정의 일이 바로 결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기생 라합이라고 하는 말처럼 여리고성의 라합은 아주 비천한 자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고 정탐꾼을 숨겨주고 대접을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삭개오는 세리였고 부자였으며 죄인이었습니다. 이 삭개오의 집에 정탐꾼이 아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가 집에 함께 들어가 먹고 마셨습니다. 삭개오는 이 일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주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기생 라합은 자기 소유의 절반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자기 소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자기가 착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지키겠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일에 제자들은 따라가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그럼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써의 구원의 삶이 무엇인가? 바로 이 주님을 따르는 삭개오의 고백에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집에 유하여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구원의 삶이 그의 고백에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뵙고 그와 대면하여 사는 구원의 삶입니다. 주님의 영광의 길,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사 다시 사는 구원의 길을 삭개오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바로 이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잃어버림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세상 나라에 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소유의 절반이나 내어놓아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구원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이 삭개오의 가정에 임한 구원에 이어 뒤에 나오는 열 므나의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어찌 보면 한 므나를 열 므나로 불려 놓았으니 많이 남기는 것이 주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할 만 합니다. 그러나 열 므나의 비유는 바로 이 삭개오의 구원의 삶을 따라 어떻게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저와 여러분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설교 모두에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빼기’의 삶입니다. 보통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항상 자기 자신이 얼마나 받았는가를 계산해 보고 감사하기 일쑤입니다. 기생 라합의 가정이 받은 은혜 정도로만 감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삭개오의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주님의 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이 생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주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긍휼일 것입니다.
  
이제 내게 주신 구원으로, 내게 주신 한 므나로 얼마나 봉사하여 열 므나, 다섯 므나를 남겨 주님의 왕되심을 인정하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 남긴 열 므나와 다섯 므나는 산수와 같이 더하기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빼기를 얼마나 다섯 므나처럼, 열 므나처럼 했는지 생각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즉 올 한 해에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수확이 얼마나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내 소유를 나누었는가로 우리가 이 추수감사주일에 감사해야 할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베품에, 주님의 긍휼하심에, 주님의 자비에 얼마나 많이 동참했는가를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뵙고 주님 안에 함께 먹고 마시는 이 영광의 구원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져왔습니까? ‘더하기’입니까? ‘빼기’입니까?
  
여러분과 저는 농사꾼이 아닙니다. 올 한 해 얻은 열매와 곡식들을 강단 앞에 나열하고 주님께 드리는 감사를 우리는 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것도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겠지만 우리의 감사는 ‘얼마나 베풀었는가?’에 대한 것이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긍휼함을 따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려고 오신 주님의 삶을 따라 우리도 얼마나 그와 동행하여 주님을 따름으로 자기 생명을 천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찢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일에 얼마나 함께 했는가를 감사하십시다.
  
그것이 주님을 왕으로 영접한 우리의 구원의 삶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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