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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한 사랑의 특성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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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랑의 특성 (고전 13:4-7) 
 
 
❚성숙한 사랑

두 주 전에 살펴보았듯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첫머리인 1~3절에서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주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아무리 신령하고 놀라운 은사를 다양하게 받았다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기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오히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성도들을 아프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은 사랑의 특성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성숙한 사랑’입니다. 몇 달 전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라는 시리즈로 설교하면서 이 ‘성숙한 사랑’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만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고린도교회는 정말 말썽도 많고 문제도 많은 교회였다고 했지요? 사도 바울은 은사도 많이 받고 지혜도 풍성하고 참 신령한 고린도교회인데도 이런 복잡하고 말썽 많은 교회가 된 까닭을 한 마디로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마치 젖을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이 고린도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그 수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간난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다 나이가 좀 들면 이유식도 먹다가 드디어 밥도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 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신자는 영적으로 마치 간난아이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가 잘 돌보고 도와주고 섬겨주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잘 먹여주어야 합니다. 기도로 말씀으로 먹여주어야 합니다. 언제까지요? 다 커서 자기 앞가림을 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좀 크면 이제는 남의 섬김을 받고 대접만 받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서 남을 섬기고 돕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도 받고 교회 다닌 지도 제법 된 사람이 여전히 성숙하지 못해서 간난아이처럼 굴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성숙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대접만 받으려 하고, 섬김만 받으려 하고, 자기주장만 앞세우며 고집 부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품어주지 못하고 저만 잘 나고 저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미숙한 성도가 있으면 교회에는 다툼이 일어나고 문제가 생기는 법이지요.

바로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만날 싸우고 다투고 문제를 일으킨 까닭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방언을 비롯한 은사가 충만하고 성도들은 지식이 넘쳐났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똑똑하고 잘 난 성도도 많았고 게다가 영적으로 신령한 은사까지 넘쳐흐르는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봐도 참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도대체 왜 파당을 지어 서로 자기네 파가 최고라고 싸우고 네가 잘 났니, 내가 잘 났니, 내 은사가 더 높으니 네 은사가 더 높으니 하면서 다투고 분쟁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다고요?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은사가 충만하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한 성도가 아닙니다. 성경 지식이 많고 똑똑하다고 해서 성숙한 성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성도가 진짜 성숙한 성도냐?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진짜 성숙한 성도는 ‘사랑’을 가진 성도다!”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성숙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에 걸쳐 이 성숙한 사랑의 특성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성숙한 사랑의 특성’을 하나하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현주소

이제 본문 4절부터 7절을 또박또박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함께 읽지요.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에는 성숙한 사랑의 특징이 모두 몇 개나 나옵니까? 한 번 세어보세요. 예, 열다섯 가지입니다. 꽤 많지요? “목사님이 열다섯 개라니까 틀림없이 맞겠지” 하지 말고 우리도 베뢰아 사람들처럼(행 17:11) 정말 그러한가 하고 직접 세어봅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열다섯 가지 맞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가만히 이 열 다섯 가지를 보노라면 한 가지 특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난히 많이 나오는 말이 있어요. 뭘까요? “아니하며”입니다. 왜 “사랑은... 아니하며”가 이렇게 많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여기 나온 말씀과 거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여기 나온 사랑의 특성들과는 정 반대의 신앙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살펴보려면 이 말씀을 정 반대로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읽어볼까요? 특히 “아니하고” 부분에서는 “아니하고”라는 말만 빼면 됩니다. 아주 쉽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읽어봅시다. 시작!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오래 참지 못했고”, “온유하지 못했고, “시기했고”, “자랑했고”, “교만했고”, “무례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성내고”,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지 못하고”, “모든 것을 안 믿고”, “모든 것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디지 못했다.” 이상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현주소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고린도교회에는 늘 문제가 끊이지 않고 분쟁이 일어나고 시끄러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설립자요 영적인 아버지로서 이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프지요. 내 치부가 드러나고 내 문제가 드러나니 얼마나 아프고 수치스럽겠습니까? 부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치 의사가 병명을 정확히 진단하듯 지금 고린도교회의 문제와 단점을 정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병이 빨리 낫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병의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부끄럽다고, 혹은 두렵다고 해서 그 사실을 숨기면 결코 고칠 수 없습니다. 언젠가 환부가 썩어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부끄러워도, 아파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심각한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치료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성숙한 사랑’만이 너희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거의 2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교회 성도들도 사도 바울의 뼈아픈 지적과 그가 제시한 ‘사랑’이라는 치료방법을 통해 큰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성숙한 사랑의 첫 번째 특성, 오래 참음

이제 좀 더 본문으로 깊숙이 들어갑시다. 현미경처럼 한 절 한 절 쪼개어 보면서 본문에 나타난 ‘성숙한 사랑의 특징’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절에서 성숙한 사랑의 첫 번째 특성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숙한 사랑의 첫 번째 특성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마크로뒤메오’인데 그냥 무조건 오래 참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 받는 상처, 즉 악행이나 손해를 견디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일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나한테 손해 끼치고 상처 주고 못되게 구는데 참으라고요? 저나 여러분이나 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부터 참 쉽지 않은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럴 때 참아야 하는 이유, 그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서 주께서 “오래 참으셨다”는 말도 ‘“사랑은 오래 참고”와 똑같이 ‘마크로뒤메오’라는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즉 우리가 참아야 하는 이유가 뭐냐?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오래 참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에게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지금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중에 구원 받을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말 우리의 악행과 죄를 오래 참아주셔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도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남에게, 타인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땠습니까? 못 참았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다툼이 있었는데 아마 이 문제를 세상 법정에 들고 가서 소송을 건 일이 있었나 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건 좀 심하다.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그걸 법정에 가서 고발하나?” 예,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가지고 세상 법정에서 고발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나는 고발 안 하고 소송 안 걸었으니 이 말씀은 나와 상관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21~22절에서 살인보다 무서운 범죄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발은 안 했지만 소송은 안 걸었지만 교회 안에서 형제를 향해, 자매를 향해 오래 참지 못하고 미워하며 판단하며 마음속으로 심판했다면 우리는 이미 살인죄보다 더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송 문제에 대해 고린도전서 6장 7절에 아주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게 바로 답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당할지언정 그래도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다른 사람 때문에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못된 사람 만나 큰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뜻밖의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지실 때 얼마나 많은 비난과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얼마나 많은 오해와 공격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길이 참으셔서 마침내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놀라운 것은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영원히 참으라”고 하지 않고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오래 참다보면 언젠가 반드시 고통은 끝나고 승리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오래 참다보면 때가 차매 주님처럼 남을 구원하고 사랑으로 굴복시킬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손해를 당하고 오해를 받고 다른 사람 때문에 고통당하시는 분들은 이 희망의 메시지를 반드시 기억하기 바랍니다.

❚성숙한 사랑의 두 번째 특성, 온유

성숙한 사랑의 두 번째 특성은 ‘온유한’ 것입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친절하다’는 뜻입니다. 온화한 마음으로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앞서 ‘오래 참음’이 나에게 손해 끼치거나 어렵게 만드는 사람에게 인내하며 참는 것을 뜻한다면 이 ‘온유함’ 즉 ‘친절함’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선대하고 도와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꾹 참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사랑 방법인 셈이지요.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웃는 얼굴로 남을 대하고 친절하고 정다운 자세로 맞아주어야 합니다. 미국사람이 한국에 오면 처음에 깜짝 놀라는 것이 “왜 한국 사람들은 다 화가 나있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이 다 화가 나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저도 길거리를 지날 때 참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표정입니다. 미국이나 외국 사람들은 길거리를 지날 때 정말 살살 웃으며 아무에게나 눈인사를 합니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은 다 화가 나 있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미국 사람이 오늘 우리 교회에 왔다면 어떤 말을 할까요? “(미국 사람 흉내) 왜 우리교회 성도들은 다 화가 나있습니까?”라고 할까요? 반대로 “리교회 성도들은 참 편안하고 친절합니다”라고 할까요? 이 미국 사람이 새가족이나 우리 교회에 방문한 사람이라고 칩시다. 그들은 우리의 표정과 태도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선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성도들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간에 온유와 친절로 품고 참아주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온유’와 ‘친절’이 부족했습니다. 남을 품고 이해하고 인정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져 서로 배척하고 자기주장만 고집했습니다. 심지어 한 성령께서 주신 은사도 받은 은사가 다르다며 남의 은사는 인정 안하고 서로 자기 은사만 크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어떤 사랑의 역사도 그 교회에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온유와 친절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에게 해를 끼치고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에게조차 친절을 베풀라는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온유와 친절은 결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아주 적극적인 자세이며 대적까지도 굴복시키는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대적을 굴복시킨 사람이 바로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험 링컨입니다. 링컨은 정말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고 깊은 신앙을 가진 분입니다. 지금도 미국인들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는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결코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반드시 나를 미워하거나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 한 둘쯤은 있게 마련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링컨을 미워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에드윈 스텐톤(Edwin Stanton)이라는 사람입니다. 켄터키 깡촌 시골뜨기 출신인 링컨과는 달리 워싱턴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고 야당인 민주당 소속으로 사사건건 링컨을 반대하고 끝까지 괴롭혔습니다. 그는 링컨을 ‘어릿광대’요 ‘오리지널 고릴라’라고까지 공공연히 모욕했습니다. 

그런데도 링컨이 대통령에 오르자 스텐톤을 각료 중에 최고 중요직인 국방장관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참모진이 한사코 말렸지만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 사람은 가장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이후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했을 때 스텐톤은 그의 능력을 훌륭히 발휘해 북군의 승리를 쟁취하여 자신을 그 자리에 앉힌 링컨에게 보답했고 나중에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스텐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세계가 보았던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누워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친절과 온유의 힘입니다. 이것이 대적까지도 굴복시키는 위대한 사랑의 힘입니다. 링컨은 다름 아닌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온 ‘온유’라는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온유와 친절의 반대말은 ‘복수’나 ‘대적’이겠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이겠지요. 나를 공격하면 두 배, 세 배로 되갚아주어야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생각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런 자세가 강한 것 같아도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가정이, 교회가, 이 사회가 이런 힘만 믿기에 점점 싸늘해지고 삭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센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 나그네의 두터운 외투를 벗기듯 우리의 강한 대응이 아니라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이, 친절의 자세가, 사랑의 힘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위대한 힘을 알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굴복시키는 위대한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살펴봅시다. 아직 시간 많습니다. 워낙 중요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이다보니 이렇게 깊이 있게 현미경을 가지고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오래 참는’ 마음으로 잘 들으실 뿐 아니라 나아가 말씀을 통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기대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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