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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그네 인생관 (벧전 1: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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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그네 인생관 (Pass the time of your sojourning here in fear)
성경 : 벧전 1:1-2, 17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1-2)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이 말은 특히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뀔 때이면 세상 사람들이 입을 모아 고백하는 말입니다. 사람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이 나그네와 같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나그네’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나그네 의식이 강한 민족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뒤 그들은 사방에 흩어져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 후 A.D. 70년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이스라엘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이들도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항상 떠돌아다니면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입니다. 유럽부흥개발은행 초대총재요 경제학자인 자끄 아탈리가 쓴 '21세기 사전'에 보면 21세기를 전망하면서 모든 분야에 불어올 변화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도시 유목민이라는 것입니다. 유목민이지만 옛날처럼 방랑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도시에 살면서 그 마음의 생각이 유목민적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지만 정작 개인은 고독합니다. 정착도 없고 안정도 없습니다. 그래서 소위 아파트 족을 보면 별 이유도 없이 2, 3년마다 이사를 합니다. 이사 안 하고는 좀이 꾸셔서 못배깁니다. 이것은 유목민의 마음입니다. 한 자리에 정착하지 못 하는 겁니다. 별로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도 아니면서 옆집으로라도 이사를 한 번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유목민의 속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목민 중에는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헤매고 다녀야 하는 그런 불쌍한 유목민이 있고, 또 하나는 나름대로 넉넉하게 물질이나 모든 여건을 갖추어 가지고 자기는 '넉넉하다' 스스로 만족하면서 사는 유목민이 있습니다. 
정착성 없는 나그네라는 점에는 마찬가지인데, 어디에 있든 간에 나그네의 성격, 나그네의 가치관, 나그네의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나그네이기에 우리는 성경적인 나그네 철학, 성경적인 나그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시작하면서 나그네 인생관을 확실히 세우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나그네로 사는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1. 나그네의 궁극의 목적: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 천국 사모 신앙)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나그네는 어느 곳을 다니든지 그의 최종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본 절에서는 핍박 때문에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 성도는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본서는 로마 황제 네로의 대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인 A.D. 64년경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기록된 편지입니다. 편지의 수신자들은 당시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그들은 1세기 초대교회 당시 어디에서나 겪어야 했던 박해 아래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갖은 비방과 인격 모독을 받았고, 일터에서의 해고와 폭행, 심지어는 죽임까지도 당하는 온갖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성도들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서 곳곳에서 그들에게 강한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다면 그를 믿는 성도들 역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 후에는 동일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소망이 고난을 이기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나그네’ 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닌 장차 나타날 영원한 도성을 인생의 궁극적 정착지로 삼아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참 성도는 천국 사모 신앙으로 무장한 자입니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입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자기 굴로 향하게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 강에 놓으면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폭포 위에서 연어를 부화시켜 놓았더니 폭포 아래로 떨어져 바다로 가서 살다가 돌아옵니다. 수천 마리 연어가 폭포 물을 타고 올라가는 장면은 귀소본능의 절정을 보는 듯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나그네는 고향을 늘 그리워하며 삽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늘나라로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늘 나라에 갈 준비를 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빌 3:20-2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러분은 나그네로 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시민권이 있는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며 살고 계십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히 11:15-16=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베드로 사도는 본서의 독자들을 ‘흩어진 나그네’ 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 ‘흩어진’의 원형 ‘디아스포라’는 분산, 또는 흩어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역(LXX)에서는 이방 국가에 분산되어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흩어진 자, 곧 디아스포라일 뿐 아니라 나그네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에서 낯선 자들, 이 세상에서 잠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인생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목적은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천국 소망 신앙으로 승리하는 나그네 되시기 바랍니다.

2. 나그네가 가진 모든 것: 내 소유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일 뿐 (= 청지기 신앙)
나그네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곳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떠날 곳, 떠날 날이 있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그네 인생관을 가진 성도는 청지기 신앙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는 이 땅의 것에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나그네 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청지기 신앙입니다. 주님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청지기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야곱은 가나안 땅에 밀어닥친 흉년을 피하여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70명 식구들을 데리고 옮겨갔습니다. 물과 식량이 풍부한 고센 땅에 살면서도 고향 가나안 땅을 늘 그리워했습니다. 그는 평생 나그네로 애굽에 살다가 죽으면서 자기 시체를 고향 땅 막벨라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창 49:29-30, 33 =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은 애굽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애굽은 나그네 땅이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천국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표상입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한 여행자가 폴란드의 유명한 랍비 호페츠 카임(Hofetz Chaim)을 방문했습니다. 여행자는 랍비의 집이 너무 초라한 것에 놀랐습니다. 책, 식탁, 의자, 그게 전부였습니다. 방문객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가구들은 어디 있지요?”
그러자 랍비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대의 것은 어디 있지요?” “제것 말입니까? 전 단지 여기 방문객인걸요. 그냥 지나갈 뿐이지요.” 
이윽고 랍비가 말합니다. “나도 마찬가지랍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도 그렇게 애써서 번 돈이 아까와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사놓은 땅을 모두 팔아라. 그리고 내가 은행에 넣어둔 돈도 다 찾아라. 그리고 내 무덤에 나와 함께 묻어다오.”
유언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수십 억 원을 무덤에 넣고 매장하려 할 때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친구가 오더니 당좌 수표 한 장에 수십억 상당의 수표를 써서 무덤에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돈은 내게 주시오.” 
그리고 그는 수표 한 장을 시체와 함께 파묻고 현찰을 모두 챙겨서 유유히 떠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그네 인생관은 이 땅은 다 사라질 것임을 알고 저 하늘에 보물을 쌓아가는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나그네 인생관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다만 이 땅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확신으로 청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청지기 신앙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나그네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나그네의 삶의 자세: 넘어질까 항상 두려워함 (= 경건에 힘쓰는 신앙)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사도 베드로의 권면은 계속됩니다. 나그네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쓰러지기 쉽고 넘어지기 쉬운 것이 나그네입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그네 된 성도는 항상 경건에 힘써야 합니다.
본절 상반절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우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신분과 같은 외적 조건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를 따라 편견 없이 판단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택함받은 민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잘못에 대해 눈감아 주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에도 영적 자녀라는 특권을 내세워 자기 멋대로 방자하게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역시 그들의 잘못을 눈감고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늘 경건한 삶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의 신분, 조건 등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이는 오직 판단을 위해 세워져 있는 엄정한 법적 기준, 혹은 진리에만 입각하여 공평무사한 태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각자의 내적 인격과 성품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행위를 따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롬 2:16). 
여기 ‘행위’에 해당하는 ‘에르곤’이 단수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선하거나 악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이며, 이에 따른 엄정한 판단이 주어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실제로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행위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은 선과 악의 많은 행위로 뒤섞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행위’가 단수로 기록된 것은 그 사람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행위인지 혹은 죄악의 지배를 받는 행위인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성도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결국 마지막 날 그의 행위는 의로운 것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바둑 두기를 매우 좋아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 주간에는 시간만 있으면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날이 되어 강단 위에 서서 보니 성도들의 머리가 바둑알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둑의 아다리 치는 것이 이쪽 저쪽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흰머리 검은머리가 흰 바둑알, 검은 바둑알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목사님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눈을 다시 한 번 비비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까지는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아멘”이 아니라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다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사도 베드로는 그 다음 장에서 계속하여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2:11).
나그네에게는 항상 유혹이 많습니다. 시험도 많습니다. 싸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그네 된 성도는 이 쪽 저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욕에 빠지지 않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에 힘쓰며, 넘어지지 않게 두려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막스 비어의 소설 ‘행복한 위선자’ 는 비양심적인 악인 로드 죠오지 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음뿐 아니라 행동에도 야비함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얼굴만 보아도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름답고 순결한 미어리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얼굴이 저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어” 하고 그를 거절했습니다. 로드 죠오지 헬은 온 마음을 다하여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고심 끝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인자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미어리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녀와 결혼하게 된 그는 날마다 그의 위선을 감추고 죽을 힘을 다하여 인내하며 너그럽게 보이려고 힘썼습니다. 좋은 사람같이 보이려고 끊임없이 그의 나쁜 성질을 억눌렀습니다. 
어느 날 옛 친구가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로드 헬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오랜 가면이 벗겨졌을 때 거기에는 거룩한 얼굴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얘기는 소설이지만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사람은 날마다 노력했던 만큼의 선한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인격이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람의 노력도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는데, 만일 우리가 성령님의 힘을 의지하면 놀라운 진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나그네입니다. 성도는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가진 신앙은 천국 소망 신앙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는 다만 하나님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 --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겠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경건에 힘쓰는 신앙으로 철저히 무장하는 서현의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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