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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가정 (엡 5:22-27,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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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가정 (엡 5:22-27, 엡 6:1-4)

CNN 기자였고 작가인 리온 해리스(Leon Harris)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역대 미국 대통령을 분석하는 글을 쓴 것을 흥미 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비교적 미국인들이 좋아했고 건강한 영향을 남긴 대통령들을 다시 3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1)유능한 대통령-조지 워싱톤, 링컨, 루스벨트, 케네디 등이 들어갔고, 
2)성실한 대통령-우드워드, 지미 카터가 들어갔고 
3)행복한 대통령이었는데 여기에는 로널드 레이건과 윌리암 맥킨리(William Mckinley)가 들어갔습니다. 

맥킨리 대통령은 특히 그의 겸손함과 조용한 미소, 그리고 평화를 느끼게 하는 부드러움으로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국민들은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의 행복이 어디서 유래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서슴없이 “교회와 가정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그의 성장과정에서의 시골 교회의 예배와 시골 자기 집의 식탁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고 하면서 교회 예배의 장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가정의 식탁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대화를 나눈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와 가정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오직 두개의 기관입니다. 창조 사역의 정점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로 가정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구속 사역의 정점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구속의 사역이 필요했던 이유는 인류의 타락 때문이었고, 구속은 곧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창조의 이상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통해 가정에서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을 배워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생활이 안정 안 되면 가정생활도 안정이 안 됩니다. 

성 어거스틴은 “교회를 어머니처럼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이동성(mobility)이 삶의 특성이 되어 잦은 이사로 교인들도 일생동안 평균 4-5교회를 섬긴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 성도들은 교회 옮기는 것은 어머니를 떠나는 것처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길 때는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했습니다.(특정한 미션을 위해 일시적으로는 떠날 수 있음) 나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한 교회에서 평생을 섬기다가 하늘나라 갈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안정된 교회생활이 바로 가정생활의 행복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남편의 아내 사랑하는 방법을 그리스도가 교회를 섬기는 그 모델에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의 신부인 우리가 주 앞에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로 세워지는 것이었던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를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27절) 

교회와 가정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이 결국은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거룩한 공동체는 어떻게 세워질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거룩한 관계가 거룩한 가정을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거룩한 가정을 만드는 두 개의 관계를 다시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 관계는 거룩한 부부 관계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부부 관계하면 아주 좁은 의미의 성관계부터 상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 개방시대의 한 트렌드라고 할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이런 유머가 생겨났습니다. 어떤 부부가 비행기 타고 미국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 입국 카드(영어)를 작성하는데 거기에 Sex란이 있어서 별 난이 다 있다고 생각하다가 OK 라고 썼다고 합니다. 다음에 가족 몇 명과 함께 탔느냐고 그래서 1명 썼습니다. 다음은 또 ‘관계’(Relationship)란이 있어서 성/관계 한참 묵상하다가 영어 실력을 총 동원해서 once a week(일주일에 한번)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관계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부부 상호간의 태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자, 먼저 성경은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가져야 할 관계의 덕목으로 복종을 강조합니다. 22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성경은 lady first의 원칙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일방적으로 아내에게만 복종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2절에 선행하는 21절의 말씀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복종은 부부 상호간에 모두가 필요한 것임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남녀의 성 차이를 아시는 주께서 아내 편에서 좀 더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 복종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왜일까요? 

23절에 보면 그렇게 할 이유가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을 머리되게 하는 것이 바로 아내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는 리더십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녀를 동등하게 지어주셨지만 여전히 가정의 리더십을 남편에게 기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리더십을 무시하면 그 가정의 자녀들은 리더십의 본보기를 보지 못하고 자라가게 됩니다. 

아동 범죄 연구소에서 나온 통계를 보니까, 소년 교도소에 수감된 문제아들의 45는 아버지와 함께 자라나지 못했고, 다른 40는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라났고 다시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어머니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려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세워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복종의 의미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아내 여러분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것처럼 남편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십시오.”(22절)

그러면 다음 남편의 아내를 향한 관계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아내를 향한 권면’(22-24절, 3절)보다 ‘남편을 향한 권면’이 훨씬 더 차지합니다.(25-33절,9절) 한 성서학자는 부부관계를 깨트리는 원인 제공을 남편이 훨씬 더 많이 하기 때문임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명하시는 가장 중요한 권면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25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의 아내사랑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의 방법에 무지한 것입니다. 

28절 이하에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 특히 자기 몸을 사랑하듯 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어떻게 몸을 사랑합니까? 우선 몸을 사랑하려면 몸의 신호에 민감해야 합니다. 몸에 필요에 민감하지 못하면 무의식중에 우리는 몸을 학대하고 몸은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자기가 아내를 학대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아내들은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남편들이 아내들의 정서적 필요에 민감하지 못한 채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남편이 자기의 존재감을 존중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내사랑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부부는 서로를 세워주고 그때 비로소 건강한 가정, 아니 거룩한 가정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둘째, 관계는 거룩한 부모-자녀 관계입니다.

성경은 먼저 자녀들이 부모에 대하여 가져야 할 관계의 덕목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과 공경입니다. 좀 더 실제적으로 이 두 단어를 살펴보면 순종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 할 수 있는 것이고, 공경은 자녀들이 좀 더 성숙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이 외적 상태라면 공경은 내적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공경은 부모의 은혜를 깨달은 자녀들이 적극적으로 부모를 존중하고 부모를 마음으로부터 기쁘게 해드리는 태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공경을 자녀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렵지요. 

바울은 본문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해야 할 이유를 다시 두 가지로 접근해서 가르칩니다. 하나는 ‘자연 법’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6:1절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 옳다는 말은 당연하다, 마땅하다, 곧 자연의 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지 않는 문화나 종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녀는 마땅히 부모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자연법(natural law)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연법을 넘어 선 ‘하나님의 법’(Divine law)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십계명은 본래 두개의 돌 판에 나누어 썼는데 첫 판에 1-4계명까지, 둘째 판에 5-10계명이 쓰여 있었는데 첫 돌 판은 하나님을 향한 계명(신률)이고 둘째 돌 판은 인간을 향한 계명(윤리)인데 이 둘째 돌 판의 첫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잘 지키는 자에게 성경은 두 가지 약속을 전달합니다. 하나는, <네가 잘 되고> 또 하나는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부모의 마음속에 자식을 보호하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을 따르면 우리의 삶은 보호되고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17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전설적인 존 웨슬리의 부인 수산나는 “할수 있으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십시오. 내가 아는 한 그것이 성공의 길을 걷는 유일한 길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주의 가정을 이루기 위해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의 덕목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자녀 관계에서 부모가 자녀를 향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것이 6:4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교훈’(교양)이 예방적 행위를 강조하는 단어라면 ‘훈계’는 치료적인 언어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자녀들의 행위와 말이 주의 뜻에 합당하도록 양육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부모 또한 주님이 기뻐하시는 행위와 말을 매개로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부모가 자녀들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로 가르쳐야 합니까? 무엇보다 부모 자신이 모범을 보이는 일입니다. 자녀 교육은 부모의 잔소리, 특히 분노로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노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약1:20을 보겠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 교육에서 ‘역할 모범’ 혹은 ‘모델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먼저 성경의 가치관, “주의 교훈과 훈계”를 내면화시켜 그런 가치관을 자녀들이 보고 따르게 해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의 화두를 미국의 맥킨리 대통령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이 행복한 리더는 그가 실천하는 리더십의 모든 비밀은 그가 시골 고향을 떠나기 전 그의 교회와 가정에서 배운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한번은 각료회의를 주재하는데 비서가 긴급한 전화가 고향 집에서 왔다고 전하더랍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이었습니다. 

당시 비행기가 여의치 못한 시대여서 그는 기차를 타고 긴 시간을 여행하여 켄튼 오하이오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아직 숨이 있었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들 빌입니다. 엄마, 하실 말씀 있으셔요?” “그래 난 네가 와 줄줄 알았다. 나를 네가 교회로 데려가 주지 않겠니. 내가 너를 교회로 데려 갔던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는 54세 된 아들의 등에 업혀 교회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 당도하자마자 아들의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가족들의 찬송이 끝나기 전 어머니는 평화롭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수년후 맥킨리 대통령이 암살자의 총을 맞고 입원한 그는 여전히 미소짓는 행복한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암살자를 기소하지 말라. 난 그를 용서한다. 나의 시간이 다 되어서 주께서 나를 부르신 것이라”고. 숨이 가빠지자 “각하 괜찮으십니까?”묻자 “괜찮네 이제 내 주님, 내 어머니를 만나야겠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입술을 움직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그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찬송, 어머니가 남긴 찬송을 자기도 부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뜻이 아니라,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It is God’s way. His will be done, Not ours)"속삭이며 주께로 떠났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임종입니까? 얼마나 거룩한 주님의 가족들의 모습인지요! 지금은 거룩한 가정의 회복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회복의 시작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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