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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을 우리 마음에 (고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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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우리 마음에 (고후 4:6)  


(고후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1. 로버트 스티븐슨의 유명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1886) 이야기입니다. 작품 내용은 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킬’(Jekyll)은 ‘내가(Je) 죽인다(kill)’라는 뜻을 담은 프랑스어와 영어의 합성어입니다. ‘하이드’(Hyde)는 ‘감추다’(hide)라는 영어에서 가져온 것으로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 중, 선한 사람인 ‘지킬 박사’(Dr. Jekyll)와 악한 사람인 ‘하이드 씨’(Mr. Hyde)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일종의 치밀한 범죄 소설입니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중년의 ‘지킬 박사’의 가슴속에는 어두웠던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의학 박사인 ‘지킬 박사’는 인간의 마음에 숨은 두 사람을 분리하는 약물실험에 성공합니다. 악마적인 본성을 발휘하게 되는 신비한 물질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지킬 박사’는 약의 효험(效驗)을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선택합니다. 약을 복용한 뒤 오래지 않아 추한 외모를 갖고 세상의 온갖 악질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하이드씨’로 변신하게 됩니다. 

‘지킬 박사’는 이처럼 자신의 본래 모습과 정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는 괴물의 출현에 대해 내심 희열을 느낍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명성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적인 압력에 굴복하고 주변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던 것에서 완전 탈피해 본능대로 마음껏 활보하고 행동할 수 있는 악한 ‘하이드’의 심리에 대해 일말의 쾌감을 얻었던 것입니다. ‘하이드’는 밤에만 움직이면서 온갖 못된 짓을 벌이고 다니지만 집에 돌아와 다시 해독제를 복용하면 원래의 근엄하고 품위 있는 ‘지킬 박사’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고아와 과부의 보호자’라고 불리 울 만큼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서 살아왔던 의로운 사람으로 돌아와 그 명예 또한 즐깁니다. 매일 낮밤 이러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지킬 박사’는 밤의 쾌락에 깊이 젖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해독제의 양(量)도 점차로 증가돼 이제는 ‘하이드씨’의 본성이 더욱 강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 어느 날 박사로 되돌아와 잠을 잔 뒤 깨어보니 약을 먹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하이드씨’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동안 억제해온 악이 스스로 커지면서 ‘하이드’의 힘이 강해지고 ‘지킬’이 약으로도 ‘하이드’를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사태에서 벗어나려고 ‘지킬 박사’로 돌아갈 수 있는 환원제(還元劑)를 찾았지만 약은 이미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지킬 박사’는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해 자살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사람 마음에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과 추악하고 위선적인 두 모습, 빛과 어둠의 두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7:19-24을 보겠습니다.
(롬7:19-24) 나는 내가 바라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선한 일을 하려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내적 존재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지만 내 육체에는 또 다른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과 싸워서 나를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현대역)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마음과 육체가 좋아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악한 마음이 공존하여 선한 마음으로 살기가 무척이나 힘들다는 고백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자신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하자 동생 아벨을 죽이고자 합니다. 예배를 믿음으로 드리지 아니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엉뚱한데 화풀이 하고자 하는 악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이를 모르실리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이겨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말씀은 사탄이 마음에 들어와 죄악을 범하도록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이겨야 하느니라.” 라는 말씀은 죄의 욕망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반드시 물리치고 이겨내라(master)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마음에 숨은 죄의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자기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유인해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육체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빛으로 어둠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가인과 같이 자기 속에 악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말로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었지만 마침내 그 죄의 세력과 싸워 이겨냈습니다. 자기 의지나 힘으로 이겨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겨낸 것입니다. 그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마음에 받아드리므로 죄의 세력을 이겨낸 것입니다. 빛이 되시는 예수의 은혜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어두움의 세력을 이겨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말씀과 은혜로 강하여(딤후2:1) 어둠을 이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삶에는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통과 슬픔, 낙심과 좌절 등은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앞뒤 좌우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삶의 어둠에 빠져 고통과 좌절 속에 눈물로 지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부부관계가 어두운 사람, 어둠에 빠진 자녀를 둔 부모, 직장을 잃거나 얻지 못해 경제적 어둠에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 한 순간에 사업을 날려 절망의 늪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 몸과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아픔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 인간관계에 어둠이 찾아와 고독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등 누구에게나 어두운 구석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밤은 한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정이나 나라 민족에도 밤의 때가 있습니다. 삶의 어두운 밤은 예수 잘 믿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오직 신앙생활에 성실한 사람에게도 어두움과 고통, 괴로움은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많다고 어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 운동선수가 슬럼프에 빠지는 것처럼 믿음이 깊은 사람에게도 슬럼프, 어둠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눅 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육의 생각도 담길 수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의 생각, 마음의 천국을 이룰 수 있는 영의 생각도 담을 수 있습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인격이며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을 때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빛과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영접할 때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담으면 인간의 마음에 깃든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빛을 담아야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빛을 담아야 그 인격과 성품이 밝아지고 그 생활이 밝아집니다. 사람은 마음이 밝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외모를 아무리 아름답게 가꾼다 해도 그것으로 행복한 삶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담아 마음과 인격, 그리고 성품이 밝아질 때 삶이 밝아지고 행복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우리 외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 관심을 두시고 그 마음 중심에 생명의 빛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어두움과 죄의 세력을 물리치고 빛과 생명으로 그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으로 어두움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창조 첫째날,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였습니다. 흔히 하루가 해뜨는 때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루의 시작을 저녁부터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부터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하나님은 저녁, 캄캄한 저녁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알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어둠가운데 빛을 창조하시고 캄캄한 저녁부터 하루를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힘들어하고 아파하며 좌절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침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실 때 삶의 빛과 어둠이 나누이고 창조적인 삶으로 변화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이 충만하셔서 항상 어둠의 세력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2:19)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는 뜻이 아니고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빛과 생명을 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워진 (마음의) 성전을 통해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등불이 비취고 있었습니다. 그 등불은 분명 예루살렘 성전 안의 어두움을 밝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전의 등불이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지는 못했습니다. 성전 안에 있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성전의 빛이 사람들 마음을 비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빛되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비난하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두고 ‘소경된 바리새인아’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를 “1)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 2)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들은 손끝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3) 하는 일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할 때 거룩하게 꾸민다. 4) 항상 상석, 높은 자리에 앉아 ‘선생님’, ‘아버지’, ‘지도자’ 라는 호칭으로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한 마디로 섬김을 받으려 하며 자기를 높이려 한다. 5) 과부 등 약자들의 재산을 착취하면서 거룩한 채 하는 위선자들이다.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다.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죄로 가득 차 있다.” 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소경된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 ” 시며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소경된 자들’이란 마음에 밝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도 여러분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며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고 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은 선하며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행위를 뜻합니다. 

성도의 “착한 행실”은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끄는 매력과 힘,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선이 있고 사람에게 반발을 느끼게 하는 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은 아름다운 것이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선을 베풀면서도 추한 모습과 주위의 반발을 사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선을 베풀고서도 사람을 이끄는 매력과 호감, 그리고 인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선한 행실은 빛이 되지 못한 경우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착한 행실”로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게 해야만 합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눈을 자기에게 집중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게 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빛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에 그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 영향력의 성격은 진실무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됨됨이가 예수님을 닮아야만 참다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감화력은 바로 인격에 있습니다. 

성도의 영향력은 얼마만큼 예수의 인격을 갖추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을 비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빛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교회에 영향력있는 빛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인간됨됨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착한 행실”로 세상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어느 아침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예수께서 “소경된 자들”이라고 부르셨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하나를 끌고 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우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8:4-5)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이는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시험하는 질문이었습니다.(마8:6) 어둠이 빛을 덮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계속해서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일어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계속 쓰셨습니다. 혹설(或說)에 예수께서 땅에 쓰신 것은 거기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땅에 쓰신 목적은,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예레미야17:13입니다.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그들의 이름이 흙, 먼지 중에 기록될 것이라는 것은 바람이 불기만 하면, 그 이름이 몽땅 날려가 지워져 버리고 마는 것처럼 버림받을 것을 말합니다.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람은 빛이고, 땅에 기록된 사람들은 어둠입니다. 예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자를 돌로 쳐라.” 는 말씀에 분명 ‘흙에 기록될 수밖에 없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해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까지 모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둘씩 모두 가 버리고 예수님과 거기에 서 있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빛 앞에 어둠이 물러간 것입니다. 빛을 덮으려던 어둠이 물러간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만 죄인인 줄 알았던 자들이 빛이 임하자 자신들도 죄인들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에 간음한 여인의 죄만 들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에 숨겨진 죄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남의 어둠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어둠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소경된 바리새인들”의 양심을 찌르고 어두워진 양심을 깨우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남을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주여 없나이다.” 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므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 여인의 어두웠던 삶과 사망의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생명의 빛으로 채워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요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이 여인과 같이 예수 앞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두움이 사라지고 생명의 빛이 그의 삶에 충만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통령, 사장, 박사, 예술가, 프로 선수 등 세상의 그 어떠한 칭호보다 최고의 칭호이며 찬사는 바로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도 여러분의 “세상의 빛” 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러한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은 예수처럼 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예수처럼 살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생활하게 될 때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십자가를 지고 그 사랑을 나타나게 될 때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새로 신자가 된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몇 사람이나 예수께 인도하였소 ” “나는 새로 믿어서 아무것도 몰라 남을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초가집이 절반쯤 타야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시오 ” “아닙니다. 불이 붙기만 하면 곧 빛이 나지요.” 그때서야 청년은 비로소 목사님의 말뜻을 깨닫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만이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이신 것은 세상에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충만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한 인생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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