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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적 전도 (막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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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전도 (막 1:38) 
 
 
오늘은 오직 성경과 관련하여 전도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으신 직후부터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권세 있게 가르치시고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셨을 때, 그 소문은 갈릴리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저물어 해질 무렵이 되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지요. 예수님은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다음날도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시몬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내서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고 알렸습니다. 사역 초기부터 엄청난 성공(?)의 조짐이 보이자 흥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막 1:9-37).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1:38). 성공적인 전도 집회로 평가할 수 있는 현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이 마을에서의 전도가 불가능할 만큼 방해되는 상황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몰려드는 일 자체를 전도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막 1:39). 여기서 다시 ‘전도’와 귀신 쫓는 일, 그리고 40절 이후의 병 고침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은 “전도”를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눅 4:43)는 일로 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전도라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전도로 보았지요. ‘은혜의 복음’에 대해 대단히 탁월한 책을 쓴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오늘날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이 효과적으로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세속적인 아이디어들을 많이 고안해 냈음을 잘 지적했습니다. 사람들이 부담 없이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죄는 역기능적 행동으로, 구원은 자존감 회복으로, 예수님 진노에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닌 삶의 모범으로 제시했다고 했습니다. 거부감 느낄 수 있는 성경용어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잘 포장해다는 것이지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 단계로 흥미유발을 시도하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실 기적은 흥미유발에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기적은 거의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그곳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으로 진단하셨음을 주목해 야합니다. 그분은 기적을 소문내시기는커녕 엄히 경계하여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막 1:44). 기적은 흥미유발에 탁월한 효과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기적으로 흥미를 유발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효과적인 복음 전도의 전단계로 사용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오병이어 기적 이후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요 6:26-27). 썩는 양식에 대한 흥미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일을 보시고 옳지 못함을 지적하셨지요. ‘행복해지고 인생을 성공하는 비결’을 안내하며 ‘일단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도록’ 부추기는 소위 필요 중심의 전도 현상과는 상반됩니다. 복음 아닌 것에 흥미와 필요를 느껴서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흥미 없는 어려운 설교를 하시자 모두 떠났습니다(요 6:28-67). 예수님께서 직접 설교하셨어도 은혜 받지 못했고 남지 않았지요.

전도자의 사명은 사람이 모이거나 남도록 ‘설득’하는 일이 아닙니다. 흥미를 주지 못해서 떠나보낼지라도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렇게 ‘도’를 전해야 ‘전도’(傳道)했다고 할 수 있지요. 선포된 말씀과 더불어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면 회개하고 남겠지만,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자신의 흥미를 좇아 떠날 것입니다. 전도 결과는 성령님의 몫이지 전도자의 몫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는 전도대상이 떠날까봐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는 또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이 현상은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적인 시대환경과 맞물려 있는데, 나눔 중심의 교제로 나타납니다.

상대주의는 ‘절대 진리’와 ‘절대 권위’를 부정합니다. 사실상 이런 상태에서는 원천적으로 교육이 불가능합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으며, 모두가 권위 있다고 말해야 하니까요.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과 내가 옳고 너는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례함이 됩니다. 절대 진리는 독단과 아집과 융통성 결여를 뜻하며, 절대 권위는 독재와 강압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상대주의 시대에 사람들을 붙잡으려면 수직적인 ‘선포’보다 수평적인 ‘나눔’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도 하나의 의견이고 나도 하나의 의견으로서 인정하여 대등한 권위를 가지고 공존하게 하는 것이지요.

나눔에서 중요한 것은 ‘내 생각, 내 느낌, 내 체험’이지 절대 진리의 선포가 아닙니다. 나눔 중심의 교제는 확실히 이 시대에 사람을 효과적으로 모으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복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탐구가 없는 가벼운 신앙, 말씀에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는 값싼 복음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교회는 참으로 전도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갈등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나눔 중심의 교제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하신 말씀에 얼마나 순종할 수 있을지 잘 살필 일입니다.

‘말씀 선포’ 대신 효과적인 방법론을 모색하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오직 성경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인식, 즉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적 행함이 회심을 위한 효과적인 전도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동시에 말씀의 능력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통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어떤 것으로도 구원할 수 없고, 사람을 상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단정하셨습니다.

오직 말씀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시대는 심리학,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CCM 등을 도입합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적절한 프로그램이 있어야만 우리의 자녀들이 복음을 영접하거나 영적으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했습니다. 거듭나는 것이 의사소통의 도구를 잘 갖춘다고 해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살아 있는 말씀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고전 1:21). 하나님을 아는 일에 지성인도 까막눈도 동일한 입장에 있습니다. 오직 “전도”를 통해서만 구원됩니다. 이점은 성인이나 아동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짜 모으면 좀 더 하나님을 잘 알 수 있고 효과적인 구원역사가 일어날 것처럼 생각한다면 성경에 반하는 일이지요. 신학적으로는 알미니안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떤 것으로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고 하셨습니다. 영접하지 않을 때, 그 지역을 돌면서 땅을 밟고 영적 세력을 결박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이 그런 일로 변화가 되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반성경적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일을 ‘영적 전쟁’이라 표현합니다. 하지만 선한 영역과 악한 영역을 물리적으로 구별하는 이런 일을 이원론이라 합니다. 진정한 영적 전쟁은 오히려 성경에도 없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철저하게 말씀에 쳐서 복종시키는 일겠지요.

중세 시대 교황제의 절정기에 십자군 전쟁이 발생했습니다(1096-1270). 십자군들은 이교도와의 싸움을 영적 전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했지요. 이슬람권에서는 거룩한 전쟁을 ‘지하드’(jihad)라 불렀습니다. 그들 역시 다른 신앙인을 죽이는 것을 거룩한 일로 여겼기 때문에 폭력과 전쟁을 선한 일로 합리화하고 후원했습니다. 무력으로 다른 신앙인들을 제압하는 일을 ‘거룩한 전쟁’으로 합리화하는 이원론적 사고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폭탄 테러, 단군 신상 목 베기, 봉은사 땅 밟기에서 그런 합리화 현상을 봅니다.

십자군 전쟁 중에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어린이 십자군 운동입니다(1212). 불과 12살 정도의 스테반(Stephen)이라는 목동 아이를 중심으로 2-3만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실패한 어른들의 거룩한 전쟁을 승리로 바꾸기 위해 출전했었지요. 그들 모두가 지중해에 수장되거나 사라센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잔인한 중세 마녀 사냥도 순수한 열정을 가졌던 수도사들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지하드를 불의한 폭력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의 폭력 역시 거룩한 전쟁이 아님을 인식해야 마땅합니다.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무력으로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고 했습니다. 어깨너머로 전도를 배우지 않고 성경으로 전도를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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