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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앞에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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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전 5:1-7)  


오늘은 일 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12월의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살다보니 벌써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도 분주하게 세상살이를 하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 모두 분주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신일이 있는지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것은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속도를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더 빨리 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경쟁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 전도서에 보면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놓치고 사는 사람을 향하여 헛되고 헛된 인생임을 전도서에서 37번이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 누구보다도 인생의 허무를 깊게 깨달았습니다. 전 1:2을 보면 그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인생 그 자체가 헛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차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애써 보지만 그 모든 노력이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놀랄만한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헛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해 보지만 잘못하면 이것도 한낱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해 보지만 나중에 보니 하나님께서 모른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에 몰두하다 보면 이 신앙생활 역시 해 아래서의 몸부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9:27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우리도 이 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나중에 그 모든 노력이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신앙생활이 헛된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헛된 신앙생활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1. 헛된 신앙생활의 첫 번째 요소는 바로 헛된 예배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왜 성전에 들어갑니까?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하나님은 예배를 위해 자기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사43: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구원 받은 백성의 존재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요4:23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말씀으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천명합니다. 예배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육체가 회복됨을 체험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배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배드리는 가운데 무능했던 자들이 권능자로 변화되고, 아무 일도 감당하지 못하던 자들이 하늘과 땅을 진동하는 역사를 감당합니다. 

또한 예배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기도 합니다. 사명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 생명 걸고 흔들 수 있는 깃발을 발견합니다. 예배가 능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배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면 대답을 잘 못합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본문 1절을 보면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하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못박아 말합니다. 

한마디로 예배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배는 듣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듣는 게 무어 그리 힘드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세상에서 듣기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일단 말씀이 들리면 영광이 임합니다. 들리면 변화 받고 능력으로 무장됩니다. 안 들려서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안 들립니까? 사람이 범죄하자 이기심이 들어왔습니다. 이 이기심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말살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기 힘든 인생, 들리지 않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다고 할 때 '듣는다'는 표현은 매우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천 번의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하고 제안하셨을 때, 솔로몬이 무엇을 구했는지 아십니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라고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로운 마음” 이라고 번역된 “레브 쉐미즈” 라는 단어는, 본래 “듣는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는 마음’과 ‘지혜’는 같은 말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듣는 마음'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어 선악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제물만 드리고 악한 생활을 고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자기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고칠 수 있어 그 뜻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세상을 떠나가는 마지막 시간이 되어서 목사님이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숨이 넘어가기 전에 이런 충격적인 고백을 했답니다. “목사님, 저는 수 십년간 교회를 다녔지만 한 번도 설교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작심하고 잠을 자거나 수첩을 꺼내서 열심히 사업설계를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니 당장에 떠오르는 말씀이 없어 두렵습니다.” 실화입니다. 여러분, 이런 교인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회에 와서 앉기만 하면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습니다. 평상시에는 읽지도 않는 성경을 왜 설교시간에 읽습니까? 어떤 사람은 설교시간에 이것저것 뒤적입니다. 누구는 옆에 있는 가족과 필담을 나누고 누구는 잠을 청합니다. 이것이 예배하는 자세입니까? 마음이 떠난 자세요, 축복과 능력이 나타날 수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답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고후 4:4에 보니까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악한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합니다. 못 듣게 만듭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해서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구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들음에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들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지혜로워 집니다. 말씀을 들어야 인격이 변화되고, 말씀을 들어야 능력이 생깁니다. 안 들으니 무엇이 생기겠습니까? 늘 교만이 가득해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들어야 합니까? 생명을 걸고 들어야합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병이 낫습니다. 기도하다가 변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씀을 듣다가 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말씀이 선포 되는 시간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시간을 내어놓는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일수로 예배를 우습게 여깁니다. 건들건들 와서 적선하듯이 예배드린다는 생각으로 앉아있다면, 그것이 바로 참람한 범죄입니다. 

2. 헛된 신앙생활의 두 번째 요소는 헛된 기도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 ‘함부로 입을 연다는 것’은 성도의 언어생활 가운데 특히 기도 생활을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특별히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대답을 합니다. "기도가 제일 힘들어요. 

어떻게 기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1분만 기도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요. 목사님 기도를 꼭 해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가끔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위급할 때 신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면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닙니다.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면에는 솔직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감을 가진 육체를 입고 땅에서 사는 아주 미천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아야 알 수 있고, 들어야 깨닫고, 손으로 만져야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감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손을 휘둘러 봐도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들리는 음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가 이렇게 어렵다 보니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내가 말을 많이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선한 것을 다 우리에게 안겨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떻게 줄꼬? 어떻게 해야 이 좋은 것을 안 목사가 받아서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할까?'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거나 막 안겨주면 안 되는 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린애들에게 아무거나 안겨줍니까? 요즘 돈 좀 벌어서 재산이 있다고 해서 애들에게 돈을 갖다 막 집어 주었더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식들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펭귄 아빠다 뭐다 해서 미국에 보냈더니 갱이 되고 마약 중독자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밤마다 가서 춤이나 추고 말입니다. 도대체 그런 애들을 어디에 쓸 겁니까? 왜 그런 꼴이 되었습니까? 함부로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100만원이 1000원짜리만큼도 못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되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항상 주시면 좋겠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어떻게 주면 좋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는 방법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면서 기도 하라고 그러십니다. 무엇이 필요한 줄 다 알면서 기도하라고 그러십니다. '하나님, 왜 알면서 그러십니까?' 하면 '잔소리 하지말고 기도해.', '하나님, 내 형편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몇 번째 기도합니까?' 하면 '잔소리 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 하십니다. 다 알면서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손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내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면 내 자신이 변해버립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인자하심과 그 긍휼하심에 나도 모르게 사람이 바뀌어 버리고 생각이 바뀌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체험했더니 지금까지 '다오,다오' 하면서 욕심부리던 것이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십자가가 하루 아침에 가볍게 여겨집니다. 

나도 모르게 불평하던 입에서 찬송이 나옵니다.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없이 하는 기도 생활에서 이런 영적 체험이 없이 기도는 하되 함부로 입을 열고,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낼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의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 ‘함부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는 것은 마치 청구서를 내밀 듯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리챠드 포스터라는 분은 ‘기도’라는 책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안에서 상처를 받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무엇인가를 떼쓰듯이 간청할 때 하나님께서 상처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준비해 놓으신 것은 외면한 채 무조건 많은 것, 무조건 큰 것만을 요구할 때 상처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기도는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기도는 헛된 기도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쓴 기도라는 책을 보면 충격적인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 당합니다” 요즘 제 E-mail을 보면 정말 쓰레기 같은 메일이 수 없이 날아옵니다. 그래서 읽어보지도 않고 지워버립니다. 스펨 메일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나라에서 이렇게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헛된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나라에서 소중하게 읽혀지는 편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쓰레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겠습니다. 

3. 헛된 신앙생활의 세 번째 요소는 헛된 서원입니다. 

본문 4절 이하를 보면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에"서원"이란 히브리어로 "약속하다" "맹세하다" “서약하다”의 뜻을 함축합니다. 이 서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뜻에서 또는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하여 행해졌던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을 형 에서 몰래 가로챘다가 에서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루스드라에서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고 자기가 가졌던 기름과 베게한 돌을 세워서 서원하였습니다. 

그는 그 곳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하였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서원을 갚지 않았습니다. 벧엘로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겜이라는 땅에 눌러 앉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엄청난 아픔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은 살인을 하는 정말 씻기 힘든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온 가족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옵니다. 야곱은 이 모든 것이 지난 날 하나님과의 약속을 했던 서원을 이행하지 않음을 알고 가족과 함께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조금만 잘못하면 정죄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때를 따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우리에게 늘 가까이 하셔서 강건한 삶으로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에 젖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는 버릇없는 인생을 그냥두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아니면 어떤 직분에 임직할 때, 또 사업이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 서원 기도를 하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공개적으로 하기도 하고, 아니면 개인적으로 기도 가운데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원 기도를 하고 나서 잊어버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하나님 앞에 서원하였으면 잊어버리지 말고 빨리 갚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갚지 아니한 서원보다는 서원하지 않는 것 낫다는 것입니다. 왜 서원하고 갚지 아니한 것 보다 서원하지 아니한 것이 낫습니까? 

그 이유를 본문 6절에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우리가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찾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약속, 서원, 맹세한 것, 신앙고백이나 기도나 찬송의 고백이나 했으면 내게 해로울찌라도, 손해가 된다 할찌라도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꼭 은혜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힘든 것이 있다면 익숙해진 나의 습관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해를 결산하기 전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아 영적으로 나에게 문제가 없는가를 생각하고 특히 늘 상 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삶,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던 결단의 서원들을 쉽게 잊거나 어떤 상황에서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일이 없도록 오늘의 말씀 앞에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오히려 우리는 훨씬 더 편한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그 길은 너무나 험하고 너무나 많은 손해를 보는, 다시 말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가 몽땅 무너뜨리고 주저앉는 신앙생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의 파도가 우리 안에 밀려들어 우리를 새사람으로 행복한 신앙생활로 인도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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