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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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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년 중 이 대림절 기간이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절이 됩니다. 왜냐하면 매 주일 하나씩 촛불을 켜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게 됩니다. 촛불을 하나 켠다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아니고 우리 마음의 촛불을 켜야 합니다.

동굴에 들어가면 빛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어둠이 지배하는 동굴 속이라 해도 촛불 하나만 켜면 동굴 속이 환해집니다. 아무리 죄악의 세상이, 어두움의 세상이 판치게 되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되면 또 그 빛을 받은 여러분과 제가 빛의 사람이 되면 이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빛은 세상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암흑이 있다하더라도 조그마한 불 하나만 가면 어둠을 정복할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오고 계시는 이 계절에, 빛으로 오고 계시는 이 계절에 여러분과 제가 우리들의 삶 속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 세상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시는 계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2000년 동안 대림절 기간 동안에 읽었던 서신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본문의 주제는 죄악 된 세상, 어둠의 세상의 옷들을 이제는 좀 벗어 버리고 빛 가운데로 오고 계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빛의 옷으로 갈아입자. 이런 이야기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처럼 빛의 갑옷으로 갈아입자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 이 세대에 대한 바른 판단과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이 세대가 무엇이 문제인가? 진단을 내릴 때 처방도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빛의 갑옷을 입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어두움의 세상을 비추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에 대하여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절)

이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지금 이 시기가 어떤 시기인가? 이 시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먼저 해야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진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도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낼 때 로마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와 그 때 당시의 분위기를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로마의 상황이나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어떤 면에서 같을까요? 

여러분이 학교 다니실 때에 로마가 왜 멸망했는가에 대한 공부를 아마 하셨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로마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붕괴되었었지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당시 로마시대의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사회 모습이 똑같습니다. 사도바울은 2000년 전 로마사람들에게 편지하기를 너희들이 빛으로 오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려면 너희들의 상황, 너희들의 시기가 어떠한가를 잘 분석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한 마디로 어떤 시기입니까?

첫 번째로 저는 우리 한국사회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한 시대라고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어떤 면에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했나요? 요즘은 제가 어릴 적 에도 그렇지 않았는데 너무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어른에 대한 공경!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 없습니다.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뭐 좀 잘못하는 것을 보고 어른들이 꾸짖었다가는 봉변을 당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항거하고 돈 대주지 않는다고 죽이는 이런 패륜 범죄가 왕왕 일어나는 때, 40년 50년 살았던 부부가 황혼 이혼하는 이 때, 가정의 붕괴와 해체,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 자살률이 1위이고 이혼율이 1,2등을 다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하고 가정이 붕괴되고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이것은 한국 사회가 종말을 향해 걷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한국 사회의 성적인 타락입니다. 한국처럼 돈 주고 성을 사기 쉬운 나라, 한국처럼 성 폭행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요 며칠 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어느 한 남자의 성 추행 사건이 있었지요? 밤 12시가 다 되어 막차를 타고 가는 전철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26살 된 아가씨가 얼마나 술에 취해 있었는지 신발도 벗고 아주 인사불성이 되어 자고 있으니까 옆에서 46살 남자가 여자 허벅지에 손을 짚어 넣는데 얼굴이 다 나왔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요즘 남자가 돈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해 있습니까! 또 어젠가 그제는 안양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여대생이 얼마나 졸았는지 종점에 도착했는데도 일어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깨웠습니다. 안 일어나니까 운전기사가 차 안에 있는 불을 끄고 여대생을 성 추행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이 시대가 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가정의 파멸을 부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여자를 더듬던 그 남자는 얼굴이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아내도 자식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 직장을 다닐 수 있을까요? 성적인 타락은 종말로 가는 지름길 입니다. 

또 이 시기!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한반도 땅에도 6.25가 지난 지 60년 만에 이번에 북한의 도발로, 폭격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습니까? 이 땅에 전쟁의 기운이 지금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만 있나요? 기근은 또 얼마나 많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기후의 변화로 수없이 많은 재앙들이 자연 재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정이 붕괴되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전쟁의 위협이 있고 기근이 있고 자연 재해가 있는 이 시대가 가만히 보면, 종말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시대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지요.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이렇게 암울하고 더럽고 추하고 죄 된 세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진단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시대를 살리기 위한 올바른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들에게 먼저 이야기 합니다. 네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어떤 시기인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한다고요. 우리는 지금 분명하게 죄악된 어두움의 시기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시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게 되면 두 가지 면에 대하여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11절 중)

자다! 밤중이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죄악 속에 살면서 이것이 죄인가? 그것이 무슨 죄야? 얼마나 편안한데, 즐기자!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죄 짓는 사람들을 보면 죄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죄인지를 알면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으니까 죄 속에 있으면 너무너무 편합니다. 죄를 죄라고 인정하게 되면 죄 속에 있을 때 거북하지요. 불편합니다. 그런데 죄 속에 있으면서도 너무너무 편안하니까 사람들이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도망갑니다. 죄 짓고 있지요. 얼마나 편했으면 배 밑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나요! 죄 짓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 짓는 것을 모릅니다. 양심의 가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편하고 딱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합니까? 지금은 죄악의 잠을 잘 때가 아니고 지금은 깨어 일어날 때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아무리 죄가 만연해 있고 많다할지라도 또 이 죄 속에 사는 우리가 너무 너무 편하고 좋은데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고 계시는데 그 예수님을 맞으려면 편안하다고 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이제는 아침이 오는데 이제는 날이 밝는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시고 계시는데 더럽고 추한 죄악의 삶을 벗어 버리고 깨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깨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죄 속에 살아가면서 이것이 죄라고 느끼지 않는 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타락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오든 말든 관계없습니다. 세상이 망하든 관계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더럽고 추한 일들에만 몰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지금은 죄악 속에서 잘 때가 아니라 깨어 있을 때라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11절 하)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믿었을 때보다 구원이 가까워졌다는 말은 예수님을 처음 믿었지만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계시는데 그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의 완벽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학자들이라던가 인류학자들 또는 문명 가들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류가 이렇게 가다가는 수십 년 안에 멸망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종말의 때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은 두 종류가 있는데, 흐르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고 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성경은 또 다른 시간을 이야기 하는데 그 시간은 어떤 특정한 때를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만 이야기 합니다. 술 먹고 나쁜 짓하고 더럽게 삽니다. 그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이야기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가는 날이 있으리라. 그 날이 오면, 그 날은 무슨 날입니까? 그 날은 예수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그 날은 인류가 망하는 날입니다. 그 날은 종말의 때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야 할 때는 흐르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 갖고 살아야 할 때는 예수님이 오시는 때,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제가 관심 가져야 할 때는 오늘이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이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논리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밤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잠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죄악 속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신다. 라고 분명히 믿는 사람들은 잠자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무언가를 분명히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마음의 촛불을 밝혀 우리를 환하게 만들어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지금은 ‘낮이 가까워진 시기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12절 상)  

낮이 가까웠다는 말은 뭔가를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의 사람들은 밤에 활동합니다. 일반적으로 더럽고 추한 것은 다 밤 문화에서 옵니다. 마약, 섹스, 어떤 음탕한 거래들은 다 밤중에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는 때는 영혼의 밤이 아니고 영혼의 낮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옵니다. 예를 들어서, 밤중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이 어두움을 빛으로 밝히려는 사람! 시기적으로는 밤중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지금 그 사람이 낮의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님을 맞아들이려면 지금은 깨어나서 일을 해야 될, 세상을 밝히는 낮의 사람, 빛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비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밤의 사람으로 어두운데,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발견할 수 있나요? 어둠 가운데서는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두워도 밝은 빛을 내는 사람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오고 계시는 이 계절에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 발견이 되려면, 주님이 우리의 심령 속에 오시려면 우리가 낮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제 우리는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 하)

어둠의 일을 벗고는 13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절)

여섯 가지 어둠의 옷을 이야기 합니다. 방탕하는 옷, 술 취하는 옷, 음란의 옷, 호색의 옷, 다툼의 옷, 시기의 옷, 이 여섯 가지 옷이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잘 때 입는 옷이 있고 운동할 때 입는 옷이 있고 파티 장에 갈 때 입는 옷이 있습니다. 옷이 다 다르지요. 그런데 세상에 살고 있는 어둠의 사람들이 입는 옷은 정해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여섯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 번째,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둠의 옷은 방탕함의 옷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탕함의 옷은 술 먹고 이런 옷을 말함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탕함은 목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 기질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 중심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의 삶을 방탕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좋은 목표를 정하게 되면, 그 목표를 가면서 다른 것들은 다 제거합니다. 벗어 버리고 끊지요. 그런데 목표가 없이 살아가면 그 때 그 때 보이는 데로 살아갑니다. 기준이 없으니까 오늘은 이렇게 살다가 내일은 저렇게 삽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돈 벌고 쾌락을 즐기고 세상의 명예나 권력이나 취하고 그저 되는 데로 생각 없이 몸이 가는 데로 감정이 가는 데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방탕함입니다. 

두 번째, 술 취함의 옷입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맨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는데,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고,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먹습니다. 이번에 성 추행한 46살 된 그 사람, 자수 했지요. 왜 그런 짓 했냐 하냐고 물었더니, 저녁에 막걸리 6병 먹고, 소주 한 병을 먹었답니다. 진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술 먹게 되면 나타나는 결과가 뭡니까? 인사불성 되지요. 술을 먹게 되면 음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가정이 파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둠의 일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사탄이 조정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그 사람 술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술 취해서 가정을 파탄 시키고 몸 망가뜨리는 것, 이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세 번째, 어둠의 옷은 음란의 옷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쾌락에 매여 사는 것이지요. 한국처럼 음란해 지기 쉬운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음란이 왜 나쁘냐 하면, 이것은 몸만 망가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음란해서 가정이 파괴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음란한 사람들은 점점 영혼도 정신도 마음도 다 피폐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 파는 사람들을 보세요. 음란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정신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어저께 인가 인터넷을 보니 사람이 음란한 것은 유전인자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란이라는 유전인자가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의 종말이 좋은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네 번째, 더러운 옷은 호색의 옷입니다. 호색은 말 그대로 섹스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돈으로 섹스를 삽니다. 여자건 남자건 관계없습니다. 보기만 하면 섹을 즐깁니다.   

다섯 번째, 다툼이라고 하는 더러운 옷이 있지요. 이 다툼은 언제 일어나지요? 자기가 잘났다고 떠들 때입니다. 당신은 잘못됐어. 나는 옳다고 여길 때 다툼이 일어나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 주변에는 관계가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만 오면 다툼이 일어나는데 누가 거기에 갑니까? 이런 사람들은 무시하는 사람들이지요.  

여섯 번째, 더러운 옷은 시기의 옷입니다. 시기의 옷은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어! 자기는 올리고 남들은 비난하는 옷입니다.  

이 여섯 가지 옷! 술 취함, 음란의 옷, 방탕의 옷, 호색의 옷, 다툼의 옷, 시기의 옷,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어두움의 옷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옷을 입고 살지요. 이 옷을 입고 밤중에 다닙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밤이고, 삶이 밤이고, 생각이 밤인 사람, 죄악의 도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 예수님이 빛으로 오시는데 이 죄악의 깜깜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이런 옷들을 벗어 버리라고요. 새 옷을 입으려면 더러운 옷을 벗어야 합니다. 바꿔 입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입고 있던 더러운 옛 옷들은 다 벗어 버리고 발가숭이가 된 다음에 하나님 저는 너무 너무 더러웠습니다. 음탕했고 거짓말 했고 시기했고 질투했고 싸웠고 술 취했고 목적 없이 방탕한 삶을 살아왔던 이 측은하기 짝이 없는 이 더러움, 이 알몸뚱이, 하나님!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더럽고 추한 알몸뚱이를 내 보여 줄 때, 주님은 그 때 빛의 옷으로 여러분을 새롭게 입혀 주십니다. 

끝으로, 성도들이 입어야 할 빛의 갑옷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입는 옷은 세상의 사람들이 입는 옷과는 대조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첫 번째는 말씀의 옷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까이 대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말씀이라는 것을 자꾸만 껴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은 성령 충만의 옷입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성령 충만 하지 않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내 안에 있어야 하는데 봉사하고 구제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이 모든 일들은 성령 충만 할 때만 가능합니다.  

세 번째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예배는 아버지 하나님께 가장 값진 것을 드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는 가장 존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제일 중요한 옷은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예배드리는 영혼 속에 하나님은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살아있고 예배가 회복된 영혼이 입고 다니는 옷이 바로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계시는데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을 주님이 좋아하시지, 죄악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주님이 어떻게 좋아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의 남편이 직장 갔다가 퇴근합니다. 아주 피곤해요. 그런데 남편이 또는 아내가 다니는 직장에는 아주 멋있는 여자, 멋있는 남자들이 머리 모양도 화장도 아주 깨끗하게 하고 일합니다. 직장도 그렇게 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멋있는 남자와 여자를 보면 남편이나 아내가 퇴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누라가 아침에 일어나서 여태까지 화장도 안했어요. 머리도 부시시 합니다. 치마도 어디서 이상한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남편이라고 한다면, 퇴근하고 돌아왔는데 아내가 그런 옷을 입고 얼굴은 부시시 하고 침 자국 그대로 있고 눈꼽 그대로 있다면 그런 아내보고 여러분 좋아하시겠습니까? 저 같아도 싫습니다.

제가 왜 이런 우스운 이야기를 하냐하면,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에 오고 계시는데 우리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느냐 예수님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더럽고 추한 죄악의 옷을 입고 있으면, 우리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에게 걸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퇴근한 남편이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그렇게 하고 있으면 남편이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싫어합니다. 세상에 예쁜 여자가 바깥에 얼마나 많이 있는데,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성 추행 하는 것, 남자들한테 잘못이 있지만 어떻게 26살 먹은 아가씨가 전철 안에서 얼마나 술을 먹었으면 인사불성이 될 정도가 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옷을 가리켜 갑옷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갑옷, 빛의 갑옷으로 갈아입으라. 갑옷은 언제 입습니까? 갑옷은 전쟁터에서 입는 옷입니다. 적이 화살을 쏘더라도 칼로 공격해 온다 할지라도 갑옷을 입으면 상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곳은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사탄하고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음란이라고 하는 불화살을 쏘면, 우리가 말씀 충만, 성령이라고 하는 두꺼운 빛의 갑옷을 입고 있으면 사탄이 아무리 화살을 쏜다 할지라도, 음란이라는 화살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방탕이라고 하는 화살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두꺼운 옷을 입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전쟁터에 우리가 있습니다. 빛의 자녀는 두꺼운 예수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고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그 옷을 입은 자 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이 두 주 앞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매일 매일 빛을 밝히면서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데요, 이 촛불이 교회 안에서 밝혀진다고 해서 여러분이 자동적으로 마음이 밝아진다거나, 여러분이 빛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벗으려고 하는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는 노력이 분명하게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두 주간 동안 더러운 것은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갑옷으로 갈아 입으셔서 주님이 여러분의 삶 깊은 곳에 들어와 여러분에게 크리스마스에 성탄절의 깊은 뜻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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