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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께 입을 맞추라 (시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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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 입을 맞추라 (시 2:1-12)


시편 강해를 시작하면서 알 수 없는 영적인 흥분을 느꼈는데, 이제 두편 째를 준비하는데도 정말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반응하는 감각을 열어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 보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해 줍니다. 시편을 쓴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였고 하나님을 아는 자였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으면 하늘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4절에서 셋째 하늘에 올라갔었다고 간증하였는데, 시편 2편을 읽고 또 읽으면서 정말 그러한 체험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었지만 솔직히 하나님 보다 세상이 더 커 보였습니다. 세상은 너무 크고 강한데 교회는 작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으며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했었습니다.

시편 2편에서 바로 그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너무 많습니다. “민족들이” 게다가 한결같이 유력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이 세상 권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세상 군대의 대부분을 지휘하고, 과학 발전을 이끌며, 학교 제도를 운영하며, 정부를 이끌고, 재계를 지배합니다.

그런 반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얼마나 나약합니까? 우리는 겨우 기도만 합니다. 순진하게 하나님의 말씀만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언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까? 

초대 교회가 핍박을 받은 이유는 예수님을 왕이라 주라 고백하였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에 있어서는 반역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왕이라 고백하면 어디서나 문제가 생깁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우리는 심각한 조롱과 따돌림과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이 왕이심을 조롱합니다. “아, 예.” 하며 상대도 안해줍니다. 무시합니다. 그래서 야망이 있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시편은 우리 눈을 전혀 새롭게 열어줍니다.
4절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편은 이 세상 사람들을 보시면서 비웃으시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세상이 큰 것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크고 광대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G 20 세계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왕들과 대통령, 수상들이 통치하는 세상 보다, 신문과 텔레비전이 보도하는 세상 보다, 핵 물리학자와 군사 전문가들이 쓴 두꺼운 책들에 묘사된 세계보다 훨씬 더 큽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고꾸라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4에 보면 사도 바울은 성령에 의하여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갔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았고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난 후 그들에게 더 이상 세상이 커보이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전적으로 크기나 숫자로 경쟁하는 곳입니다. 힘과 돈과 숫자 만이 진리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려면 시편 기자처럼 세상만 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숫자를 과시하고 힘을 자랑하는 세상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스핑크스 보다 더 큰 신상을 세우던지 앙코르와트 보다 더 신비한 신전을 세우시던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6절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7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오늘 본문에 언급한 사람은 다윗 왕을 말합니다. 다윗은 물론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기름부으실 때 그는 정말 보잘 것 없는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아버지 조차 무시했던 여덟 형제의 막내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문제를 풀어가시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하나님 참 답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주위에는 장엄한 신전들과 무지비한 군대들, 거인 상들, 거대한 도서관들을 뽐내는 세계 열강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대한 신전이나 신상을 세우는 것을 철저히 금하셨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을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와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조직도 만드시지 않고 건물도 세우시지 않고 책도 쓰시지 않고 오직 제자 열 둘만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략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세상의 세력 앞에서 기름부음받은 자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꾸준히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2편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었다고 해석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또 변화산에서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택하신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윗 왕은 그 예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신 세상, 열방에 다윗을 세우신 것처럼 지금 이 세상에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성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저는 시편 2편을 묵상하면서 12절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한 주간 내내 이 말씀이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입맞춤이란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는 풍습입니다. 입맞춤은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나 부모 자녀들 사이에나 허용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깨달아지는 것은 예수님을 믿되 비인격적인 신으로 믿지 말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고, 사랑하고, 친밀히 교제하고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을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나 삶으로는 전혀 하나님을 믿는 증거가 없는 사람입니다.

딛 1:16『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계 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세상 두려움이 없어졌습니까? 세상 염려가 다 없어졌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표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어디 믿는 데가 있으신가 봐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입맞추는 관계가 있는 성도여야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입맞추라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단순히 설교를 듣는 집회가 아니라 예수님께 입맞추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고 기뻐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커보이던 세상은 너무나 작아지고 작아보이던 하나님은 너무나 커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입맞추는 것과 같은 예배는 창녀였던 마리아가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 앞에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를 풀어 발을 닦고 엎드려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던 것 같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향해 돌아올 때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달려 나아가서 아들을 껴안고 거지처럼 되어버린 아들과 입을 맞추었던 것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하가 왕에게 복종을 다짐할 때 왕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같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누구도 예배가 예수님과 입맞추는 시간임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계속 “떠들지 마!”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목사가 되고도 예배 순서, 기도자, 성가대, 설교에만 관심이 있었지, 솔직히 [하나님]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고백도 못 해보았습니다. 
이런 예배는 세상을 이기게 해 줄 수 없습니다.

군목 훈련 중 첫주 수요기도 때 종교행사를 어렵게 허락받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서 드린 예배, 들어가면서부터 눈물이 나왔습니다. 왜 이런 감격이, 며칠 동안 내내 예배만 사모함, 예배의 감격 문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저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며, 고백하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렸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를 통하여 모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힘을 얻었습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께서 자신의 교회 예배는 꼭 예수님 추도식 같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배는 “예수님을 모시는 시간”입니다. 예배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Presense of Christ)입니다.  

이제부터는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의 주 목적이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속회로 모일 때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목적이며, 선교회로 모여도 예배드리는 것이 기장 큰 기쁨이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부터 간단히 드리고...”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예배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감사헌금을 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러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러 가는 것입니다. 혼자도 좋지만, 성도들과 다 함께 예배하는 그것이 좋아서 모이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을 조금 더 길게 가집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믿으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친밀히 알지 못하면 두려운 일이 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도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8절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아무리 부인하고 무시하고 조롱하여도, 하나님의 나라는 장엄하게 이 땅 위에 임할 것이고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마지막 심판 날, 무서운 공포가 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9절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2절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얼마나 무서웠으면 계 6:16에서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할 것입니까?
 
누구에게 이 진노가 임합니까? 예수님과 입맞춤하는 관계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12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2편의 결론입니다. 

오늘 성찬식을 합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과 입맞추는 시간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되어진 일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예수님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사코 그들을 피하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찾은 것은 예수님께서 또 한번 떡을 만드는 기적을 베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리들은 질겁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들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몰려드는 사람에게 떡을 먹으려 하지 말고 내 살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임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렇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과 입맞추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식의 떡을 먹으면서, 예수님과 거룩한 입맞춤을 하는구나!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내 안에 거하시는구나 하고 주님의 임재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이처럼 하나가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과 문제는 너무나 작아지고 하나님은 너무나 커보입니다. 
세상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몰라도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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