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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자 (골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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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자 (골 3:12-14)
   

미국 달라스의 한 성형외과 의사가 들려주는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자가 성형외과를 찾아왔습니다. “제 남편에 관한 얘기인데요.”  그녀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남편이 화상을 입었습니다.   불타는 집안에 계시던 부모님을 구하려고 뛰어 들어갔는데, 결국은 실패하였고 부모님은 그 화재로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얼굴은 심한 화상을 입어 흉하게 일그러졌고, 남편은 그 후 삶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홀로 은둔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아내인 저도 만나려고 하지 않아요.  그의 마음의 문은 완전히 닫쳤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고쳐드리지요.   최근 눈부시게 발전된 성형기술의 도움으로 남편의 얼굴을 회복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죠.”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는 자기가 부모를 구하지 못한 데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벌하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내 얼굴도 내 남편처럼 망가뜨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남편의 고통을 직접 나누면 혹시 남편이 나를 다시 그의 삶 속에 받아들여 줄지 모르니까.  나는 정말로 그를 사랑해요.  그와 함께 있고 싶어요.  내 얼굴을 망가뜨려서라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저를 그렇게 하겠어요”    

성형외과 의사는 그녀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성한 얼굴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자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 그 남편을 찾아갔습니다.  방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큰 소리를 쳤습니다.  “당신이 그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말을 다 들으실 수 있지요.  나는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내가 선생님의 얼굴을 고쳐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의사는 간청했습니다.  “제발 밖으로 나오십시오.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전히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 의사는 문 앞에 다가가서 그의 부인이 의사에게 요청했던 것을 말했습니다.  “당신의 부인이 나에게 자기의 얼굴도 망가뜨려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하면 당신이 자기를 다시 당신의 삶 속에 받아줄 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말입니다.  그녀는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만큼 당신을 돕기를 원하고 있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화상을 입은 남자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부인의 사랑으로 그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은둔에서 벗어나 이제 그에게 새로운 시작이 주어졌습니다.  

요한복음15:13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세상에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려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개역성경에서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이라고 하였는데, 새번역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라고 했습니다.    “자처럼”이라는 말보다는 “사람답게”라는 말이 아주 좋은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와 거룩하고 사랑하는 자는 동격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 성별되었다, 따로 떼어놓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천국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요, 천국백성으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사43:1에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었다는 확신과 함께, 이제는 살아갈 삶을 결정해야 합니다. 

1.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람에게 있어 옷은 그의 인격이요, 그의 신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옷이 귀한 시대가 아닙니다.  옷이요, 참으로 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정말 옷이 귀하였고, 옷이 날개였습니다.   옷이란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의 연장선에서 입을 옷을 고르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감이 없으면 어떤 옷도 소화시키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 진군하면서 여리고를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성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다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했는데, 아간이란 자가 여리고에서 물건을 훔쳐 숨겼습니다.  시날에서 만든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좋은 옷을 입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여리고에 와보니, 시날에서 만든 외투를 보니 옷 한 벌 가지고 싶었습니다.   시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평원지대를 말하는데, 고대 바벨로니아를 시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의 왕들은 왕의 신분에 맞는 용포를 입었습니다. 귀족은 귀족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면서 비단 옷- 자색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법관은 법의를 입었고, 관리는 관복을 입었고, 군인은 군복을 입고, 경찰은 제복을 입었고, 평민은 평민의 옷을 입고, 상놈은 상놈의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옷은 곧 신분입니다.   목사는 성직자의 옷, 클러지셔츠(clergy shirt)를 입었습니다.  옛날의 종들은 실제로 목에 사슬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사슬에 대한 상징만 남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옷을 갈아입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자기의 부끄러움으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을 가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지나가는 짐승 한 마리를 죽이시고는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창3:21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기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진노 아래에 두시면서도 그들을 아주 버리시지 않고, 의절하지 않고, 인자하신 아버지로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의의 세마포로 갈아 입혀 주십니다. 

갈3:27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베푸신 세례를 받아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한 세례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롬13:14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산다는 말이요, 예수님님의 인격이 곧 나의 인격이 되도록,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유형의 신분증,  무형의 신분증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신분증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유형의 신분증에는 주민등록증이 있는데, 이 신분증을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사진과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주소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명서를 발행한 연월일과 시도의 구청장이나 군수가 발행하였다는 도장이 찍혀 있을 뿐입니다. 뒷면에는 지장 지문이 찍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내에서만 통합니다.  해외에 나가면 우리나라 외무부에서 발행한 여권이 필요합니다.  여권에는 본인의 사진과 단수여권인지 복수여권인지, 국적과 여권번호, 성과 이름, 생년월일, 주민등록번호, 성별, 여권발급일과 사용기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증에는 얼굴 모습과 언행으로 알 수 있는 무형의 신분증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옷을 입고 살아가는 무형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증이 카멜레온처럼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얼굴을 달리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신분증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편지와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형의 신분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새 사람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이제 새 사람에 알맞은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하십니다.  

긍휼이란 말이 참으로 좋습니다.  하나님의 연민, 가엽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친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요, 온유는 부드럽고 관대한 마음을 말합니다.  겸손과 온유는 정말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오래참음, 인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낮추고, 모든 교만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낮아져 남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래 참아야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국의 시골에서 미국 뉴욕에 사는 아들집에 놀러온 노부부가 한국인이 경영하는 슈퍼마켓에서 ‘순 참기름’을 사먹었는데 그것은 가짜였습니다. 그들 부부가 시골에서 직접 짜 먹던 참기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자기들이 한국에서 직접 참기름을 짜가지고 이곳 뉴욕에 가져와 장사를 하면 많은 이익을 얻으리라고 생각하고, 거금을 내어 참기름을 짜가지고 미국으로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기름의 이름은 “진짜 순 참기름”이라고 붙였습니다.   엄청나게 팔릴 줄 알았는데, 그 참기름은 팔리지 않고 결국 이들은 사업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파는 참기름이 가짜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이 가짜 참기름에 맛들어있어 진짜를 몰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이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디 참기름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한국사회가 가짜천국이었습니다.   이제 조금 살만해지니 진짜를 찾게 된 것입니다.  우리 보다 조금 못 사는 나라에 가보면 아직도 가짜 천국입니다.  

가짜가 진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진짜 그리스도인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짜들이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은 가짜입니다.   작은 시험이 오고 환란의 바람이 불어오면 다 날아가고 불에 태워질 뿐입니다.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기에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2.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13절 말씀에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 간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을 가질 수 있을 수 있습니다.   불만이라는 말은 불평거리를 말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다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다 만족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때에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용서해야 합니다.  

사람들 간에 용서하는 문제가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봅니다. 

예수 믿으며 가장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읽기입니까? 기도하는 일입니까?  전도하는 일, 예배드리는 일, 봉사, 헌금, 힘들기는 하지만, 가장 힘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순종하기 힘든 일이 용서하는 일입니다.  용서는 본능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당한 것 이상으로 앙갚음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용서는 도덕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도덕은 권선징악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을 용서할 때에는 반드시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일만 달란트나 탕감 받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이 내게 지은 것은 고작 일백 데나리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35살의 젊은 나이에 미국 텍사스의 큰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의 취미는 사냥이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는 사냥을 나갔는데, 노루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정 조준하여 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이것이 웬 일입니까?   노루는 간 데  없고, 노루가 아니라 사람이 총이 맞아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건을 수습하고는 자기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돌아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온 교회와 언론이 들끓었습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사냥이나 좋아하고, 아니  짐승과 사람을 구분도 못하다니, 목사가 사람을 죽이다니” 이런 말로 목사님은 결국 죄책감과 좌절감에 못 이겨 교회 앞에 진심으로 사죄하면서,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동정론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사람을 죽인 젊은 목사님을 어느 교회가 받아주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용서하지 않으면 목사님은 평생에 갈 곳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최고의 결정을 해야 할 기회를 만났는데 이 기회에 목사님을 한번 용서합시다.”라고 말하여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온 교인들의 용서로 목사님은 계속하여 그 교회에 남게 되었고, 그 뒤로부터 그의 목회 철학은 “용서”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하나인 달라스 제일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었고 54권의 저서를 남겼고, 성공적인 목회자로 존경받은 크리스웰 목사님이었습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은 교인들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혜를 93세에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목회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목사님은 35살 청년 시절의 용서받은 감격을 잊지 않았고, 용서를 주제로 설교할 때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용서하자고 외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번 용서받았기에 평생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그만 미워하시고 용서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3.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란 하나님의 택하시고 사랑받은 거룩한 백성들이 가져야 하는 덕목을 말합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를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덕목 위에 사랑을 더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한 덕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주며,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분쟁을 끝내고 모든 다툼을 종결하고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 사랑이 없다면 모든 옷을 입고도 띠를 띠지 않는 것과 같지만, 사랑을 더하면 그 모든 옷을 입고 띠를 띠므로 힘이 솟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하면 받는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데, 사랑은 주도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그 큰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해야 좋습니다.  그래야 오래 살고 의미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놀라운 기적이 따라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 강권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생명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힘든 것도 힘든지 모릅니다.  고통은 누가 뭐라고 위로해도 분명고통인데, 사랑하기에 고통을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기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신데, 그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으며, 우리를 위해 죄인이 달려 죽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던 예수님, 하나님이셨던 그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누리셨던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가장 초라하고 낮고 천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요일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만이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사람이냐, 아니냐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요15:12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13:34-35에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된 표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닙니다.  

저는 많은 사람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마지막을 살면서 죽음의 문턱에 넘어가려고 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무슨 졸업장이나, 무슨 집문서나 증권을 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값진 귀금속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을 읽고 마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삶을 가장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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