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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고상한 것을 위하여! (빌 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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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상한 것을 위하여! (빌 3:4-11)    
 
: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지난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올해 노벨평화상 시상식에는 빈 의자가 주인공을 대신했습니다. 올해 수상자인 류샤오보는 중국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고, 중국 정부가 가족들을 가택 연금했기 때문입니다.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1888년, 노벨의 동생이 사망했는데 신문사가 착각을 해서 노벨이 죽었다고 부고기사를 냈습니다. 노벨은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의 제목이 ‘죽음의 상인, 다이너마이트 왕,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벨은 충격을 받고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인류에 공헌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상금으로 주는데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노벨의 자랑거리인 다이너마이트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자신의 사망 신문 기사를 읽고 인류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을 위한 노벨상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의 자랑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위기를 겪으면서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I. 자랑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자기의 자랑거리를 거침없이 늘어  놓습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3:3a)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 인간적인 조건을 자랑하는 사람을 개들이라고,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바울은 인간적인 조건을 자랑거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야말로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자기 자신의 과거 경력을 나열하며 자랑합니다. 자랑을 꾹 참고 있다가 다른 사람이 자랑을 하니 자신도 좀 자랑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까?

우선 바울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들어보겠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은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는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는 자신은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순수한 혈통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1. 그는 혈통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부모가 진실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은 도무지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순수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선민이라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는 엘리트로 최고위층 귀족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민족으로도 가장 우수한 혈통의 히브리인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은 한마디로 뼈대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양반 타령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골동품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미 혈통을 주장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신앙의 가문에서 자랐다는 것은 소중한 영적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다는 것은 인격 형성에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또 무엇을 자랑하였습니까?
     
다시 5절 말씀입니다.
: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이번에 주목하려는 말씀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과 히브리인 중에서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정통파 유대인의 시작입니다. 역시 바리새인은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고 힘쓰는 정통파 유대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여타 다른 유대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정통 중에 정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2. 그는 정통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필요합니다. 정통적인 신앙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릴 때 형성된 가치관이 일평생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유아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형식주의에 빠지면 안 되지만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신앙의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것을 고리답답하고 덜떨어진 것을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오징어 총각이 멸치 처녀를 사랑하였다지요.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인데 뼈대 없는 집안으로 시집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징어 총각은 그만 실의에 빠져 시름시름 앓아눕고 말았다지요. 이 소식을 들고 다른 오징어들이 펄펄 뛰며 말했다지요.
“감히 우릴 어떻게 보고 뼈대 없는 집안 이라고 업신여기는 거야? 우리 집안이야말로 대대로 먹물(?) 먹은 집안이라고!”
뼈대 있는 집안이든, 먹물 먹은 집안이든 좋은 의미에서 자신이 정통이라는 의식이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바울이 자랑스러워한 것은 또 무엇이었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과거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였기에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열심[/젤로스]히 노력하였습니다. 자신이 바르게 살겠다는 열정을 가졌을 뿐만 아닙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을 바로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불타올랐습니다.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열통이 터져서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면 열화가 올랐습니다. 
     
3. 그는 열통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열통은 열화(熱火)가 치밀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운을 가리킵니다. 열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서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그 이름을 드러내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열정을 가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혈통, 정통, 열통을 자랑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로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혈통이나 정통이나 열통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자랑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떻게 여긴다고 하였습니까?


II. 여김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세 번씩이나 ‘여기다’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여기다[hJgevomai/헤게오마이]’는 말은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생각한 결과로서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그 자랑거리들을 무엇이라고 여겼습니까?

7절 말씀입니다.
 :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여기에 바울의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전에 그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1. 유익하던 것을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혈통, 가문, 종교적 열심, 지식, 등등이 오히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막아서 방해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노벨상을 제정한 노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자랑하던 다이너마이트가 오히려 그 자신을 살인광이라는 더러운 이름을 가지게 하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발명이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무기가 되어 평화의 장해물이 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랑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는 장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 다른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순수성이 함께 어울려 하나님을 섬겨야 할 다른 사람들과 선을 긋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된 열정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채로 열심히 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하는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 가장 큰 장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자신에게 유익한 그것을 장해물로 여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 바울은 그 자랑거리들을 또 어떻게 여기게 되었습니까?
     
8절 말씀입니다.
: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여기에서 ‘배설물[skuvbalon/스퀴발론]’은 개에게 ‘던져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개에게 던져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쌍 디귿’(ㄸ)입니다.
     
2. 자랑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우리를 얼마나 처참하게 할 수 있는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이런 것을 일찍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어느 숲 속에 사슴이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내 뿔이 이렇게 멋있을까? 정말 아름다워! 나처럼 훌륭한 뿔을 가진 동물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사슴은 커다란 자기의 뿔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가늘고 긴 다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내 뿔은 이렇게 크고 멋있는데, 어쩌면 내 다리는 가늘고 못 생겼을까? 다리는 왜 볼품없이 만드셨을까?”     
사슴은 자기의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때 호숫가에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사슴은 얼른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사슴은 있는 힘을 다해서 힘껏 뛰었습니다. 사자를 가까스로 따돌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뿔이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이리저리 목을 흔들며, 잡아 당겨보았습니다. 나뭇가지가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못생겼다고 불평했던 다리가 자기를 살려 주었는데, 자랑스럽게 여겼던 뿔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자랑거리가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것이라면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하는 것이라면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을 방해한다면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자랑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대전환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인간적인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중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중생하였지만 믿음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랑거리들을 장해물이나, 배설물로 여겨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꼭 해야만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III. 목적

바울이 그동안의 자랑거리들을 장해물로, 배설물로 여기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8b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을 장해물로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서 ‘얻다[kerdaivnw/켈다이노]’는 말은 은유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제를 얻다’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얻기를 원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전혀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다 버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은총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동안은 세상이 주는 기쁨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이제는 하늘이 주시는 기쁨을 얻기 위하여 사모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을 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이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게 거하시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면 죽음 후의 천국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스도를 얻으면 그 사람을 위하여 천국이 준비됩니다.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으시는 여러분, 예수님을 더욱 풍성하게 알기를 사모하십시오. 

또 그리스도인들이 바라고 기대하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9절 말씀입니다.
: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를 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하였습니다. ‘발견되다[euJrivskw/휴리스코]’는 마주치다, 만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 바울의 간절함이었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확신하고 살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지 않으신다면 이런 비극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나는 자신을 예수님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나를 예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영원한 고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시기를 사모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에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바로 그곳에 나도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에베소서 2:5-6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예배하는 시간에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서 함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또 바라고 소망하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0절과 11절 말씀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이 정말로 바라고 소망하였던 것이 이제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마지막 때 부활하는 것 그것이 바울의 최종 목적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이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영원한 저 천국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 저 건너편,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부활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인간적인 자랑거리들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인간적인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살게 하는 부활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적으로 자랑거리가 있는 유용한 삶을 사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보다 더 내세우고 싶은 것이 있거든 그것을 아주 역겹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 마침내 부활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 날 천국에서 함께 기쁨을 누리는 형제와 자매들이 되시기를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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