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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나의 왕을 시온에 세웠다 (시 2:1-6, 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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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왕을 시온에 세웠다 (시 2:1-6, 24:7-10)


과거 인류 역사를 이루어온 위인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은 역시 '왕'들입니다.
그들은 좋은 의미에서든지 혹은 나쁜 의미에서든지 간에 하여튼 많은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을 실제로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또한 더욱 돋보이는 왕들을 우리는 '대왕' 혹은 '제왕'이라고 구별해서 부릅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왕들에게는 다른 평범한 왕들이 보여 주지 못했던 그들 고유의 특별한 '캐릭터'나 천재적인 '리더십'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든다면, '이것을 푸는 사람은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알려진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보게 된 알렉산더 대왕이 그것을 '단칼에 베어서 풀어 버렸다'는 일화라든지, 나폴레옹 황제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고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와 같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갔던 사건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속성 중에 하나도 역시 '왕'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박사들이 '왕에게 드리는 대표적인 예물'인 '황금'을 아기 예수님께 바친 것을 통해서도 증거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은 이미 구약의 '메시아 예언'에서부터 명백히 나타난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그 예언들에서 묘사되는 '왕으로서의 메시아'는 세상에서 내노라 하던 그 어떤 왕도 보여 주지 못했던 정말 놀랍고도 신기한 특성과 위대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구약의 수많은 메시아 예언들 중에서 특별히 시편 두 곳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기묘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특별한 왕'이 되신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대적들의 도전을 '일소(一笑)'에 붙이시는 영원한 '왕 중의 왕'이십니다.

시편 2편 1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1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1절의 "어찌하여"란 말은 무엇을 묻는 말이 아니라, 열방이 하는 짓들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열방" 즉 '세상의 나라들'이 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바로 "분노"하는 것, 즉 열방들 편에서 제 딴에 뭔가 비분강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불신 세력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늘 뭔가 불만을 품고 열을 올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런 '분노'란 사실은 "민족들의 허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항하는 짓이 자기들로서는 당연한 분노 같고 합당한 반발 같이 여겨져도 실상은 오직 '쓸데없는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2절의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란 바로 빌라도 총독이나 헤롯 왕,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같이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모든 불신 권력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 "대적하다"라는 말은 '한바탕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다'라는 뜻인데, 이들이 그처럼 열을 내어 싸움을 걸고 있는 상대는 곧 "기름 받은 자" 즉 '메시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그리스도를 향해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이유는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런 세상의 불신 세력들은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분노하며 펄펄 뛰면서 감히 반역 전쟁을 도발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불신 권력자들은 실제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이신 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현실적으로 분노하고 대적하는 대상은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 된 기독신자와 하나님의 지상 왕국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악하고 불법적인 권력자일수록 항상 기독교가 자신의 정권유지에 최대의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기독교가 국가에게 협조하지 않는다고 화내며 열을 올리고, 교회가 자기네들이 원하는 대로 사회에 이바지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합니다.
그런 불신앙적인 '군왕과 관원'들은 예배당의 강단에 일장기를 달고 신사참배를 하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공산주의의 무신론적 유물론 사상을 반대한다고 해서 신자를 투옥시키고 처형까지 시키는 가운데 실제로는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 정면도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4절의 "하늘에 계신 자"란 지상의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의 존재 전체를 다스리시는 진짜 절대주권자를 가리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정복자'니 어쩌니 해도, '하늘 위에서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하늘의 주권자께서 "웃으심이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이어지는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는 말씀대로 '정말 같잖아서', '너무 가소로워서' 웃으시는 웃음입니다.
그야말로 '냉소(冷笑)'인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그 얼마나 두려운 냉소이겠습니까?
도저히 상대도 안 될 것들이 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덤벼들고 있으니 천지와 우주의 대주재께서는 그저 '픽'하고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는 장면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웃음은 우리 기독신자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믿음직한 웃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웃음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여유'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쪽에서는 열을 올리고 창칼을 갈면서 덤벼드는 마당인데도 우리 주군께서는 그냥 입술꼬리만 살짝 올리면서 웃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긴장의 빛을 띄운다든지, 혹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자.'라고 당신의 백성들까지 바짝 긴장시키시기는커녕, 그저 당신 혼자서 씩 웃고 계시니, 이 얼마나 여유만만한 모습입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웃는 것으로만 끝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불신세상 권력자들이 하는 짓들이 너무 가소로워서 쓴웃음을 지으시다가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이라고 한 대로 결국에 가서는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라는 대갈일성 한방으로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셨습니다.
"내가 나의 왕을 세웠다"는 말씀은 장차 이 땅에 보내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파송하신 '만왕의 왕'이요 '왕 중의 왕'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는 말씀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세워질 '교회'가 바로 이 왕이 좌정하고 계시는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에 보면 암행어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 암행어사가 나오는 이야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하이라이트는 바로 암행어사의 비밀 부하들이 '암행어사 출도요!'라고 외치면서 사방팔방에서 나타나는 순간 암행어사가 마패를 꺼내들고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그 '암행어사 출도'라는 소리에 탐관오리들이 혼비백산을 하고 땅에 엎어지면서 암행어사의 부하들에게 체포되는 후련한 장면이 연이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6절의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는 말씀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신분을 세상의 불신 군왕들과 관원들 앞에 밝히심으로써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꼼짝 못하면서 엎드러지게 만드는, 너무나 시원하고도 통쾌한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이 땅에 보낸 예수가 바로 메시아다.' - 이 고함소리는 곧 당신의 자존하심을 의심하는 불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자기선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왕 중의 왕이다.' - 이것은 감히 하나님께 반역하고 대항하려는 인생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실로 우주 전체가 벌벌 떨며 진동하게 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포입니다.
'지상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기독신자들은 바로 이 위대한 왕국의 백성들이다. 너희들은 알아서 모셔라.' - 하나님께서 불신 사회가 깜짝 놀라도록 이렇게 소리 질러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후련한 것입니까?

세상의 군왕들은 자기 권위에 도전하고 반역하는 자를 두고 이렇게 '코웃음'치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제일 겁내는 대상이 바로 정적(政敵)이요 암살범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수라상에 올릴 음식에 혹이 독이 있을까 싶어서 미리 담당 내시가 시식을 해야 하고, 대통령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이 외출을 할 때에도 반드시 경호원이 따라붙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왕 중의 왕'이신 우리 예수님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 실로 여유만만하시기 짝이 없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이 혹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일까 의심하면서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을 죽이려고 난리법석을 치는 유대인들의 고발과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모르느냐'라고 위협하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하여 "'내가 다스리는 나라'는 '여기 세상에 속한 나라'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고 영역이 다르다."라고, 그저 한 번 '씩' 웃으시면서 넘기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당당하신 모습입니까?
  
실로 '왕 중의 왕'다우신 권위가 충만하지 않습니까?
설사 이 지구의 온 열방과 민족들이 기독교를 대적하고 박해하는 연합 총공세를 펼쳐 온다 할지라도, 그저 여유로운 미소 한 번 지으시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를 통하여 영원한 왕으로 세웠다.'라는 대갈일성으로써 그들을 깜짝 놀라고 꼼짝 할 수 없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주권을 더욱 경외하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전쟁하기 전에 '개선식'부터 먼저 행하시는 유일한 '필승불패의 왕'이십니다.

시편 24편 7절부터 10절까지에 기록하기를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옛날 왕에게 있어서 백성들 앞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어느 때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할 때입니다.
왕이 몸소 전쟁에 나가서 외적을 무찌르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때에 행진하는 군사들과 그 뒤에 포로들과 전리품들을 줄줄이 거느리고 자신은 멋진 마차를 타고서 거리를 누비고 광장을 지나 개선문을 통과하면 백성들은 그 왕 앞에서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꽃잎을 뿌리곤 하는 장면들을 우리가 영화에서 자주 봅니다.
그때 그 왕의 기분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붕 떠오른 듯한 느낌일 것이며, 실제로 백성들은 그렇게 승리하고 개선하는 자기네 왕을 정말 하늘에라도 떠받쳐 올려주고 싶은 기분일 것입니다.

이 본문 역시 일차적으로는 다윗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부르게 된 시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전의 개선식을 할 때에, 또 어쩌면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처음으로 옮겨올 때에 불렀을 가능성도 있는 노래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시편 24편의 전체적인 내용은 장차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라는 말은 지금 승전하고 돌아오는 왕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성문이나 개선문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라는 말을 시적으로 멋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라고 한 것은, 그런 유능하고 훌륭한 왕이 다스리는 한 성이나 나라는 영원히 보전될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영광스러운 환영을 받는 왕은 누구입니까?
이어지는 8절에 보면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왕은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왕인 다윗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부터 많은 전쟁에서 이겼고 왕이 된 후에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다윗이 왕으로서 제일 잘하고 자주 했던 것이며, 그러니 승리의 개선식을 하면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는 것은 다윗에게는 당연한 영광이기도 하고 또 익숙해 있었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개선식에서 자기를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편을 지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런 내용의 개선가를 부르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그런 개선식에서 "영광의 왕은 만군의 여호와시로다"라고 노래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나갈 때 법궤를 모시고 나갔으며 승전하고 돌아올 때에도 그 법궤를 제일 선두에 세우고 개선식을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돌아오게 될 때에 그것은 바로 그 전쟁을 이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선두에 서신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이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라고 찬양하는 것은 다윗에게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아주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런 개선식의 영광을 받으셨다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제 그런 영광의 개선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수난주간 첫째 날에 해당되는 '안식 후 첫날', 즉 오늘날의 종려주일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종이 되셨지만 어디까지나 '왕 중의 왕'이심을 나타냄과 동시에, 또한 말을 타고 호기롭게 입성하는 세상의 군왕들과는 달리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써 '겸손하신 왕'이심을 보여 주신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그 예수님의 개선식이 행해진 시기입니다.
개선식이라는 것은 당연히 전쟁에 이기고 난 후에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부터 개선식을 하려는 왕이 있다면 부하들과 백성들로부터 '우리 임금님이 미치셨나?'라는 소리나 듣기에 딱 알맞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수난주간의 첫날에 승리의 입성, 즉 왕으로서의 개선식부터 먼저 하셨던 것입니다. 
  
실제 전투는 겟세마네와 갈보리와 무덤에서 치러질 것이었고 일주일 후에 부활하게 되시면 그때야말로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개선식을 하기에 딱 알맞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사람처럼 일찌감치 개선식부터 먼저 치르셨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이상하게도 미리 개선식을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예수님께서는 수난주간에 맞이하시게 될 사상최대의 전쟁, 곧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그 엄청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을 이미 확신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인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는 절대로 질 수 없는 전쟁이었고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이상 절대로 질 리도 없는 전쟁임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 개선식에 걸맞게, 예수님께서 결국 그 전쟁에서 완전 승리를 거두시고 실로 '왕 중의 왕'으로 영광스럽게 승천하신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전쟁을 하기 전에 개선식부터 미리 행하신 예수님은 실로 얼마나 승리에 대한 자신이 철철 넘치는 왕이시겠습니까?
또한 그런 왕은 그 백성 된 자들에게 그 얼마나 믿음직스럽기 한이 없는 분이시겠습니까?
이런 왕이 오시면 그야말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강하고 능하신 왕이요 전쟁에 능하신 왕이 오신다."하고 기쁨에 겨워 환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왕이 다스리시는 왕국은 그야말로 "영원한 문"으로 지켜지고 있는, 실로 든든하고 안전하면서도 영원무궁히 번영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땅의 왕들은 그 누구도 이런 '필승불패'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가히 당대의 '군신(軍神)'이라 불릴 만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개선문을 통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적군을 둘로 분산시킨 후에 각각 격멸한다.'(devide and conquer)라는 필승전법으로 한때 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 황제도 마지막 워털루 전투에서는 그처럼 초전에 '나누어' 놓았던 영국군과 프로이센 연합군으로부터 좌우의 협공을 받아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한 위대한 군주의 통치를 통하여 한 시대를 휩쓸었던 '대제국'들이라 해도 그 중에서 지금까지 그 '문'이 지속되고 있는 나라가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만이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사단의 온갖 박해와 침공에도 불구하고 그 '영원한 문'이 요지부동으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제자들과 작별하실 때부터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승리 선언'을 미리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왕국의 백성 된 성도들만이 "세상나라들은 멸망 받으나 예수 교회 영영 왕성하리라 지옥권세 감히 해치 못함은 주가 모든 교회 지키심이라 / 백성들아 와서 함께 모여서 우리 모두 함께 개가 부르세 영원토록 영광 권세 찬송을 우리 임금 주께 돌려보내세"라는 똑같은 '개선가'를 부르면서 예나 지금이나 로마천주교를 대항하는 종교개혁의 전투현장으로,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연합군을 맞서 싸우는 진리사수의 전쟁터로 용감하게 진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신자들은 앞으로 미래의 그 어떤 전쟁에서도 결코 지는 법이 없으실 것이 너무나도 확실한 '강하고 능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모시고 있는 까닭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미리 승리의 개선식부터 거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보리와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미리 '영광의 왕'으로 승리의 개선을 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이 믿음직한 왕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교회를 중심으로 영광스러운 백전백승의 승리를 끝까지 함께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대통령들은 선거철만 되면 자기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상대방을 이기고 재선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씁니다.
자신의 정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적에 대한 온갖 인신공격이나 권모술수까지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당신의 절대주권에 도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무슨 '용을 쓰시기는커녕' 그냥 한번 '웃고' 넘어가실 정도로 여유만만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그야말로 '상대가 될 만한 상대'조차 없으신 진짜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자신의 정치 생명의 존망을 걸고 큰 도박을 하듯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그 국운이 걸린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를 위해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싸움에 돌입하기 전에 '승리의 개선식'부터 먼저 시작하실 정도로 여유만만하신 왕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실로 '강하고 능하신' 진짜 '전쟁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위대했던 위인을 가리켜 '불세출(不世出)'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기 어려운'이란 뜻으로 쓰는 말이지만, 문자 그대로 한다면 '세상에서 나올 수 없는'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이야말로 '역사를 통틀어서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정말 유일무이하고도 특별하신 왕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은 '세상이 낳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처럼 '하늘에 계신 자'께서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신 왕'으로,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께서 '사단의 머리를 누르는 왕'으로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자신의 왕으로 영접하고 모시고 영원히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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