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직 한 길 (요 3:16)

첨부 1


오직 한 길 (요 3:16)


2주 전 화요일 오후, 우리는 실로 당황스럽고 두려운 소식을 접했었습니다. 북한이 대포를 쏘아서 우리나라 연평도가 포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곳이 마침 목회자 퇴수회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리 해군의 배에 올라 견학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배에서 우리 해군이 어떻게 근무하는지, 또 지난 연평해전에서 어떻게 전투를 벌였고 포 사격이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 영상물과 기록 사진들을 보며 우리 군인들이 그 배 안에서 근무하며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였습니다. 

바로 그 때에 누군가가 연평도에서 우리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여서 핸드폰으로 DMB를 켰더니, 정말 연평도에 포격이 있어서 연기가 올라오고 그에 우리 군이 맞대응하고, 북한에 자제를 요청하는 전통문을 띄운다는 소식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북한의 공산정권 지도자들은 제정신인 사람들인가? 정말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인가?

천안함 사건을 일으킨 지 얼마 안 되어 또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집으로 왔는데, 미국에 있는 동생이 걱정을 하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미국의 방송 뉴스에는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몇 배의 보복을 하려고 했는데, 미국과 주변 나라들에서 말리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사건과 뉴스를 겪으며 드는 생각은 전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군사력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북한에 월등히 앞서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함께 망하는 길입니다. 그동안 쌓아놓았던 경제적인 부, 국가와 국민의 번영을 위해 달려왔던 그 모든 것도 다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한 복판 뿐만 아니라 치안이 유지되지 못하는 한, 어느 곳에서도 살인과 약탈, 등이 벌어지고 인간 생명이 경시되고 곳곳에서 죽음이 쉽게 벌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연평도 포격시에도 아까운 젊은 군인들이 죽음을 맞았고, 민간인들도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만일 확전이 되어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것보다도 엄청나게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힘써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차피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 죽습니다. 한문에 죽을 사(死)자는 한 일(一) + 저녁 석(夕) + 비수 비(匕) 자가 합쳐져서 된 글자입니다. 죽음이란 어느 날 저녁에 비수와 같이 내게 오는 것입니다. 

15년 전,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제가 아는 몇 분이 그 백화점에 들렸거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중고등부 교사를 하던 김연진이라는 자매는 백화점이 무너지는 순간, 지하1층에서 1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던 중이었습니다. 올라오고 있는데, 건물이 흔들리면서 위의 천장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더래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자신의 몸이 날아가는 것을 느끼고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바람에 날려 백화점 문밖으로 몸이 나와 있었다는 겁니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서 심방을 갔더니 몸에 찰과상만 입었고,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 자매가 하는 말이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죽었구나’ 생각이 들더래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우리는 죽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비로소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고, 또한 그분이 보내신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3:16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서 노래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 16절” - 오늘 이 말씀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인 말씀이요, 우리들의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세례, 입교식을 거행하는 주일인데 오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는 분들이나, 입교를 하는 분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말씀은 가장 기초요,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의 말씀을 되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앞, 요3:1~15절 까지는 니고데모라는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요, 지성인이었고, 저명한 인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 산헤드린이라는 공회의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바리새인이었고, 선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밤중에 찾아온 것은 그의 높은 신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을 시간에 예수님을 찾아오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과 함께 해결 받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그는 큰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이 말씀에 니고데모는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로써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질문하기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 예수님은 다른 설명을 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 이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 거듭나는 것과 하나님 나라는 중요합니다. 오늘 세례 예식을 행함도 이 거듭남을 확인하는 예식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확인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계속해서 말합니다.

 (10~15절) “...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불뱀들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 죽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어 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든지 그 장대에 달린 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 놋뱀을 쳐다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건을 떠올리며 광야에서 들려진 뱀처럼 자신도 그렇게 들려질 것이라고 하면서 15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에 기초가 되는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새들 중에 펠리컨이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펠리컨은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인다고 합니다.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새끼에게는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준다고 합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 펠리컨의 희생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에서 ‘이처럼’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독생자를 보내신 일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떤 희생이나 어떠한 대가를 치르시더라도, 다시 말해서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의 나무에 달아매는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죽게 하셨고, 그 대가로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리입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1학년 때 학습을 받았습니다(당시에는 학습을 받고, 6개월 이상 지난 후 세례를 받았음). 세례 받기 전, 어느 날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해 체험을 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실 은혜받기 전에는 콤플렉스도 있었고, 불만도 있었습니다. 키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 집안 환경에 대한 불만,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를 엄청 사랑하신다는 것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깨닫고는 펑펑 울었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는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면 실감을 못하는 분들이 생각 밖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병원에 전도를 다닐 때 느낀 점입니다. 병원에 가면 시한부 인생을 사시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의식이 없이 중환자실에 있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의식이 있으면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이번 주에 뵙고, 다음 주에 갈 때는 또 뵌다는 보장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왜요? 생명에 대한 갈급함 때문에...  어린이 병동에도 죽을병에 걸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병동을 다녀오면 눈물이 납니다. 그 아이들에게 예수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저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늘 가까이서 겪으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구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은 ‘지옥’을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다, 유치해, 원 세상에 ... 요즘에 지옥이란 말이 통하기나 하는 거야?’ 라고 말합니다. 흔히들 죽음이나 마지막 심판이라는 말을 아주 우습게, 장난끼 있는 말로 가볍게 다루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조 시대에 정만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막 죽으려고 할 때 그의 친구가 옆에 앉아서 정만서에게 물었습니다. ‘죽음이 무엇이냐?’, 아마도 지금 죽는 사람이니까 아는가 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만서가 대답했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나도 잘 모르겠다”, 익살스러우면서도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 우리 중에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죽으면서 ‘처음 겪는 일이라서 잘 모르겠다. 내가 언제 죽어봤냐? 죽어보면 알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죽음 저쪽의 문제를 끄집어내어서 오늘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롬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우리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하시고 누구든지 이 사실을 동의하고, 신뢰하고,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기독교는 배타적이라고... - 예, 기독교는 배타적입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 누가 우리의 구원자입니까?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경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 오직 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방송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를 볼 때가 있는데 그 순서 중에 동물들이 불붙은 둥근 고리를 통과하는 것을 봅니다. 대개 동물들은 불을 싫어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고 꺼립니다. 그런데도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주저하지 않고 펄쩍 뛰어서 불붙은 고리를 싹 뛰어넘어 갑니다. 

동물학자들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동물들이 불을 통과하는 이유는 불에 뛰어든 후에 주어지는 보상이나 가혹한 훈련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에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조련사에 대한 믿음만으로 본능을 거스르면서까지 불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조련사가 절대 나를 해롭게 하지 않는다. 조련사의 말대로 해도 괜찮다.’ 이런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 무지막지한 동물들도 불이 활활 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일개 미물도 조련사를 믿고 본능을 이기는데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 아들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다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세례를 받고 입교를 하시는 분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시고 구원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