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과 심판 (벧전 4:12-19)

첨부 1


고난과 심판 (벧전 4:12-19)


지난 주일 교회설립기념주일에 베드로의 편지를 통해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무엇인가 살펴보았습니다.교회는 주님이 주인 되시고 성도들이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는 거룩한 모임이며,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그 몸의 지체들인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된 주의 거룩한 몸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긴밀한 관계를 이룰 때 교회다운 교회로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교회, 예수 그리스도 대신 사람들이 주인 노릇하고 사람들만 모인 교회는 이름만 교회이고 실상은 친목회나 동우회 혹은 자선단체와 문화센터와 다름이 없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건축하고 교인들을 많이 모으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나 본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순종할 때 교회답다 말합니다. 

교회가 순종해야 할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일까요? 지난 주일 베드로전서 4장1절-11절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죄악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려면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려면 희생과 수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교회가 이 말씀을 따라 주님 오시는 날까지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충실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 속에서 자주 반복하여 말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체험하신 모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즐거이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던 시기는 성도들이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환난을 당하던 때였습니다.그래서 사도들은 편지마다 환난 중에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공의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라 전합니다.(살전1:4-10 참고)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여러분을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하였습니다.불 시험이란 무엇을 말하는걸까요?정결한 금을 제련하기 위해 맹렬히 타오르는 용광로의 불 같은 시험이 성도들의 믿음을 단련하기 위하여 찾아옵니다. 순금을 얻으려면 금덩이 속에 있는 불순물들이 불태워 제거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믿음도 이런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집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의 찌꺼기들이 남아있습니다. 산에서 막 캐어낸 금광석은 거칠고 불필요한 것들이 함께 섞여 아직 금덩이라 할 수 없는 광물에 불과합니다. 순금을 얻으려면 용광로에 들어가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깨끗한 금만 따로 모아집니다. 정금같은 믿음으로 나오기 위하여 죄의 찌꺼기들은 불태움을 받아 녹아지고 사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불 같은 시험입니다. 이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성도들은 점점 성화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을 더욱 닮아갑니다. 

성도들이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죄를 닦고 묵은 때를 벗기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순결한 금이 나오기 위하여 고열의 제련 과정이 필요하고 아름다운 진주 한 알이 완성되기 위하여 진주조개는 수 많은 세월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다.여성들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보석 진주는 조개의 눈물이라고 불리웁니다. 어쩌다 모래알이 살에 박히면 조개는 그 고통을 덜기 위해 진주층이라고 하는 생명의 즙, 체액을 짜내어 모래알을 덮어 싸는데, 그러한 작업을 몇 년 계속하다보면 진주층이 굳어져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보석이 된답니다.우리의 삶에도 모래알이 박힌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순금을 얻기 위하여 용광로의 제련과정이 필요하고 아름다운 진주 한 알을 만들기 위하여 진주조개의 고통의 날들이 필요한데 하물며 성도들이 금보다 귀한 믿음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불 같은 시험을 통과하는 연단과진주조개의 눈물같은 눈물의 기도가 어찌 필요하지 않을까요?주의 뜻을 순종하여 살기 원하는 성도 여러분이 흘린 눈물의 기도와 고난의 시간들이 아름다운 결정체가 되어 주님께 인정받는 진귀한 믿음으로 나타나리라 믿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8-19) 하셨습니다.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실한그리스도인으로 사는데 왜 이처럼 어려운 일이 나에게 생길까? 이상하다 생각이 된다면 오늘 말씀을 보시고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것이 정상이구나 깨닫고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붙들린 사람이 아니라 예수께 붙잡힌 사람이니 예수님을 미워했던 세상이 예수님의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히려 그런 시련을 당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고 타협하다 보면 어느덧 세상과 익숙한 친구가 되어 편안하게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믿음을 단련하려는 불 시험이 오면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으니 즐거움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주님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지금 고난 받고 있는 성도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주를 위하여 욕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상급이 크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부끄러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이 소수에 불과했을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순수한 신앙을 지키려고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그런데 기독교 인구가 급성장하고 교회가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잘못된 기독교인들의 무례하고 무지하며 비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공동책임자로서의 부끄러움입니다. 차라리 주의 이름으로 의롭게 살다가 고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으면 부끄럽지 않을텐데 불신자들보다 못한 윤리의식과 가식적인 삶 때문에 듣는 비난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한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8:38; 눅9:26) 하셨습니다.비난 받을만한 행동을 하는 교회와 우리 자신을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드러낼 때 나에게 돌아오는 이상한 눈치와 수근거림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다가 물질의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만나며 가난하게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도적질하여 부자가 된 것보다 주의 이름을 위해 정직하게 살다가 가난한 사는 것이 훨씬 떳떳하고 복이 있습니다.오히려 영광스런 고난입니다.나 살자고 이웃의 생명을 빼앗고 다른 사람의 기회와 권리를 침해하여 내가 성공하고 명예를 높이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지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은 일년 52주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를 열심히 참석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고 2천년이 지났으니 우리는 주님 오실 날이 더욱 가까워진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 그날이 올지 아무도 모르지만 전 보다 더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준비하고 사는 것이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종말의 때는 심판의 때인데 그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하였고 진행 중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 시작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어떠하며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설 수 있겠느냐고 경고한베드로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심판 광경을 보고 기록한 내용이 에스겔 9장에 나옵니다. 허리에 먹 그릇을 찬 한 사람과 손에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든 다섯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먹 그릇을 찬 사람이 우상숭배를 반대하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먹으로 표시를 하면 나머지 다섯 사람은 이마에 표가 없는 사람은 모두 쳤습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온 성전 뜰에 시체로 가득 채운 다음 성읍으로 나가 똑같은 방식으로 이마에 표가 없는 부정한 우상숭배자들을 살륙하는 두려운 광경을 에스겔이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구약 에스겔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의 집은 에스겔서에서 말하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심판이 하나님의 자녀들부터 시작된다는 말입니다.그 심판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지난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 시간에 심판에 대한 아주 질문이 있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오늘 베드로가 말하는 심판은 마지막 날에 보좌 앞에 서는 최후의 심판이라기 보다는 앞에서 말한 불 같은 시험입니다. 자녀들의 믿음을 달아보고 죄로 오염된 찌꺼기들을 깨끗하게 제거하시려고 주신 고난의 용광로입니다. 

이 심판은 죄의 형벌이 아니라 믿음의 연단이며 믿음을 정화시키며 완성된 작품으로 다듬어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입니다.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처럼 성도들이 육체로는 갖은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며 결국 그 육신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심판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시작된 심판은 마지막 날에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형벌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을 연단하는 심판과 형벌의 심판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복음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입니다.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국 영원한 형벌의 심판이 따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관성 있게 강조하는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용광로에서 제련되며 고난을 견디는 동안 복음을 순종하지 않던 자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쌓고 또 쌓아 불태울 것들이 많아지게 합니다.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거절하던 사람들입니다. 육체로 살며 오직 육체의 정욕을 위하여 살았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그 고난을 거절하였습니다.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며 다가올 마지막 때의 심판을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육체로 사는 사람들이 도적질하며 살인하고 범죄하며 남의 일에 간섭함으로 받는 고난은 죄의 댓가이며 땅에서 육체로 사는 동안 응당 받는 법의 심판 혹은 형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받은 그 형벌이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심판을 면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그런 범죄로 고난을 받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의를 위한 고난, 주님을 위한 고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즐거이 받읍시다.이것이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권하는 말씀입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겠느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은혜가 아니면 구원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거역하고 복음을 거절한 죄인들이 어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떳떳이 설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을 너무 쉽고 값싼 것으로 오해하지 맙시다. 나의 공로와 노력 없이 은혜로 거저 주신 구원이라 가볍게 여겨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그 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치르셨습니다.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믿음은 결국 연단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삶의 주인이라고 인정하고 믿는다면 때로는 물질 앞에서 시험을 받고 명예와 권력과 성적인 유혹과 우상숭배 앞에서 나의 깨끗한 믿음을 나타내보여야 합니다.참 믿음은 시련 가운데 더욱 빛이 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는 고난이 따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들은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와 맞서 싸우며 의를 위한 고난을 당합니다. 

욥을 시험한 사단이 자식들을 빼앗아 가고 재산을 거두어 가며 건강을 빼앗는 등 의로운 사람 욥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처럼 다양한 시험들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죄와 대항하여 싸우는 성도들은 상실감, 이별, 소외감, 핍박과 욕을 당함 그리고 육체와 정신적인 압박감 등 수 많은 종류의 어려움과 씨름하면서 점점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향해 자라갑니다. 사단은 이런 방식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여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떠나가도록 부추깁니다. 그러나 욥은‘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23:10) 하며 그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며 고난 중에도 흔들림이 없이 의로운 삶을 힘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마10:28). 어떤 고난은 잠시 동안만 나를 연단하고 멈추지만 어떤 고난은 내 육신이 죽을 때 비로소 끝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아울러 영원히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으니 성도의 죽음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불 같은 시험을 만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처럼 심판을 받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봅시다.그리하여 정금 같은 믿음으로 변화되어 나를 단련하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육신을 입고 어린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의 고난을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범이 되신 주님은 세상을 이기고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지난 주일 4:1에서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주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죄를 그치게 하셨으니 그를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맙시다. 그대신 우리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려고 주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우리가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성탄절을 앞둔 네 주일을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육체의 고난을 마치신 주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또 다시 고난을 받기 위해 오시지 않고 이번에는 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로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도리어 지난 날 그런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따르던 것을 버리고 육체의 남은 날 동안 의를 위한 고난을 즐거이 받으며 주님이 오실 그날을 대비하며 삽니다. 이것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바른 신앙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