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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의 예수님을 만나자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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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예수님을 만나자 (요 21:1-14)


미국 보스턴의 지하 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마음의 어둠 때문에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어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지르고 사납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회복 불가능' 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부모도 아이를 포기해 버리고 끝내 면회조차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누구도 그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회복 불가능’이라고 낙인찍힌 이 아이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회복불가능의 이 아이를 회복가능의 아이로 아니 세상을 회복시키는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요?

은퇴한 한 늙은 간호사가 이 소녀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조차 포기한 회복 불가능아이였지만, 간호사는 6개월 동안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결국 소녀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마음속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세상을 향해 문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 불가능’이라던 정신 질환마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마음의 빛을 찾은 소녀는 자신과 같은 정신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소녀가 바로 헬렌 켈러를 세상의 빛으로 이끈 앤 설리번 메이시(Anne Sullivan Macy)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설리반이 어떻게 헬렌 켈러 같은 위대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위대한 선생님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만남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만날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회복되며 불행이 행복으로 회복되며 슬픔이 기쁨으로 회복되며 불평이 감사로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을 만나 다시 회복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21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으니 라고 성경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자들은 어떤 제자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진정으로 그들을 필요로 하였던 그때 예수님을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떠나간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3년 동안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하여 가르쳐주고 길러주었는데 하루 아침에 헌신짝 내 던지듯이 예수님을 내팽개치고 도망쳐버린 그런 제자답지 못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하지 않고 여러분을 배신하고 떠나가 버리고 만 그 사람을 다시 찾아오겠습니까? 이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이 멀리 도망 와 있는 갈릴리 바다까지 멀다하지 않으시고 먼저 다시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먼저 찾아와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낙심과 실의에 빠져 있던 그들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처럼 한번 배신했다고, 한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를 저버리거나 모른 척하시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처음 제자들을 만나 주신 분도 예수님이요, 지금 다시 찾아와 만나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처음 만나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오늘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또 다시 이 예배에 여러분을 불러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앞으로도 변함없이 여러분을 계속해서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시고 복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또 다시 찾아와 주셔서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오늘도 그 예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다시 우리에게 오신 그 예수님을 우리 모두 말씀 속에서 예배 속에서 함께 만나고 돌아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디베랴 바다에 있던 제자들은 몇 명이었나요? 
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 도마, 나다니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또 다른 제자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총 7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로 간다고 하자 다같이 함께 가자고 배에 올라타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많이 잡았나요? 성경에 보니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들 중 대부분은 어부 출신의 그야말로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그런 베태랑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한 두명도 아니고 일 곱명 이서 함께 물고기를 잡았는데 어떻게 한 마리도 못 잡았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없이는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없이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편 127: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떠난 그들은 고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씽에 불과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섬기다 보면 주의 일을 감당하다보면 오늘 말씀의 제자들처럼 힘들고 지쳐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주저 앉고 싶고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맞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님 앞에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너무도 부족하게 보였던 우리가 모든 것을 능히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떠나 무엇을 한다면 그 결과는 뻔 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빌4:13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결코 no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no는 없습니다. 우리는 no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안 된다고 할 수 없다고 못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no를 뒤집어 on이라고 고백하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no를 뒤집어 보십시오. on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k.o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k.o시키려고 달려드는 수 많은 삶의 적들 가운데서도 k.o 되지 않고 오히려 o.k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이 n.o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k.o 시키려고 달려들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신 그 회복의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회복의 예수님을 만나심으로 n.o가 o.n으로 k.o가 o.k로 바뀌어지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자 이제 주님과 함께한 이들이 어떻게 되었나 살펴보죠? 
5절에 보니 예수님이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여기서 얘들아,.. 
얼마나 다정한 표현입니까? 헬라어 원어로 파이디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애들아 하는 것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내 새끼, 내 강아지 할때 처럼 정말 다정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정말 다정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들을 원수중의 철천지 웬수 혹은 배신자라고 불렀어야 맞겠지만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이나 가르쳐주고 키워주고 먹여주고 함께 사역한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갔어도 예수님은 그들을 원수처럼 여기지 않았습니다. 배신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자기의 자식처럼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 앞에 어쩌면 이 제자들처럼 배신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부족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대못을 수도 없이 박았던 원수의 모습으로 나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우리일지라도 용서해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불쌍히 여기며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이 말씀은 어찌 보면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아버지의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 흡사한 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왔던 그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이 놈의 웬수, 이 나쁜 자식하며 매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욕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아들을 꼭 껴안아주시며 그 아들의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더러운 몸을 씻으시고 깨끗한 새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위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말씀의 제자들을 향해 애들아 부르시는 음성으로 우리들을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우리의 손에는 가락지를 우리를 위해 새로운 옷을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풍성한 잔치를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깨끗게 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로 충만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애들아 이렇게 말씀하고 끝내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5절에 보니 예수님은 그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 밤새도록 몸부림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어쩌면 밤새도록 그들과 함께 새벽 찬이슬을 맞으셨는지도 모릅니다. 

4절에 보니 예수님은 이미 바닷가에 서계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갔던 그 순간부터 새벽 그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물고기 잡기 위해 몸부림치며 밤을 샌 것을 알고 계셨고 보고 계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 때문에 몸부림치고 힘들어하며 염려하고 있는 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워주기 원하고 계십니다. 도와주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때 항상 순종이라는 밸브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6절을 보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만큼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아이고 여보시요. 우리가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요, 그런데도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소.. 배 오른쪽은 무슨 오른쪽 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아마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은 순종의 밸브를 열 때 오는 것 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축복된 삶을 살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하나님의 축복이 오는 그 순종의 밸브를 열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이 마르면 수도꼭지를 틀면 물은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틀지 않으면 아무리 몸부림처도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기 원하시면 순종의 밸브를 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 실로암으로 가지 않았으면 그 소경은 눈을 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햇을 때 요단강으로가지 않았다면 , 혹은 여섯 번 만에 포기했으면 나아만 장군은 여전히 문둥병환자로 살아갔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 든든한 여리고 성도 하루에 한 바퀴씩 육일동안 6 섯바퀴 그리고 마지막날 일곱바퀴를 돌라고 하는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 하였을때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렸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귀챦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우리 딸 다은이에게 제가 가끔 심부름을 시킵니다. 심부름이래야 봤자 정수기에서 물 한잔 가져다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왜 사랑하는 딸에게 물 한잔 가져다달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딸이 물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 물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딸이 가져다 주지 않으면 우리 사랑하는 아내가 가져다 줄 것이고 아내가 가져다주지 않으면 내가 떠먹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할 수 없어서 해 달라고 요구하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아버지로 남편으로 대하는 지 보고 싶은 것입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 한잔 가져다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고 딸이 대견스러워보이고 예뻐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가 헌신하지 않으면 우리가 헌금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못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면 다른 사람 다른 사람도 안한다고 하면 천사들을 동원해서라도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바라십니까? 그 순종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사랑하는지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할 때 마치 제 딸이 가져다주는 물 한잔에 감동해서 지갑을 여는 저처럼 우리를 향하여 무엇이 필요하냐고 무엇을 줄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배 오른편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았습니까? 11절에 보니까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그 많은 물고기 중의 한 마리라도 예수님이 가져가셨겠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워놓고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나도 이득이 되지 않는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착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당신을 위해 순종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늘 하나님은 순종하는 그 사람을 위해 순종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필요가 채움 받기 원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순종의 밸브를 열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의 생수, 은혜의 생수가 여러분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물이 찢어지도록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볼펜에 숫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로 153입니다. 
왜 153이 새겨져 있을까요? 처음 이 모나미 회사를 만들기 전 이 사장님은 집사님이었는데 사업에 실패해서 큰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집사님은 실망하지 않고 작정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했죠...

그러던 어느날 꿈에 153이라는 숫자를 하나님이 보여주셨대요.. 궁금해서 목사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오늘 본문 말씀을 가르쳐주면서 집사님 앞으로 사업을 하실 때 집사님의 경험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업을 운영해보세요.. 그러면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집사님의 사업도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대요...
그 집사님은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결국 오늘날과 같은 문구회사를 설립하여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53의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축복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오는 축복인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153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길 바랍니다.  
제자들은 이 153의 축복을 통해 즉 들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물고기가 잡힌 그물을 통해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가리워졌던 영적 눈이 믿음의 눈이 뜨여지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회복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축복이야말로 제자들에게는 153마리의 물고기, 그물을 들수 없을 정도의 많은 물고기의 축복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큰 영적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빈 그물을 채워달라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달라는 육적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우리에게 소중하고 놀라운 축복은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 눈이 떠지는 축복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떠지는 영적 회복의 축복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영적회복을 경험한 제자들은 주님이 미리 준비하시는 조반을 대하게 됩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미리 조반을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9절에 보니 이미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오기 전에 숯불이 피워져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이슬을 맞으며 또 피곤과 싸우고 파도와 싸웠던 제자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이제 제자들이 필요로 하기에 앞서 예수님이 그들의 필요를 먼저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예수님이 미리 앞서 준비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회복은 곧 육적인 회복, 삶의 모든 부분의 회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요한3서 2절 말씀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도 회복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영적 눈이 보여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여 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지면 우리의 삶도 건강하고 튼튼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행복한 감사를 드릴 때 우리의 삶 역시 행복한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복의 은혜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 이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주님 앞에 제자들과 같이 배신자의 모습으로 부족한 모습으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모습으로 낙담한 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도 주님은 우리를 결코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찾아와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용서할 수 없고 여러분이 여러분을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예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예수님은 여러분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끝이라고 말해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다시 시작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면 회복될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회복의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여러분들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오른편에 내리라고 하면 내 생각에 왼쪽이 나은 것 같고 아니면 저쪽이  나은 것 같아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일단 그물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책임은 주님이 져주시는 것입니다. 153의 그물이 찢어질만큼의 엄청난 축복은 순종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우리가 주님을 향한 순종의 밸브를 열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주님을 위한 순종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순종입니다. 153마리중의 한 마리도 주님은 가지시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물고기는 다 순종한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었습니다. 
때로 순종하라고 말씀 하셨을때 no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더라도 또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황이 아무리 계속 진행하기에 어렵게 보이는 no의 상황 이라할지라도 믿음의 눈을 열어 on이라고 고백해보십시오. no가 on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안디옥 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회복의 예수님을 다시 만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영혼이 먼저 잘 되고 법사가 잘 되고 강건케 되는 축복이 차고 넘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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