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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잉태사건에 대한 증언 (눅 1:26-31, 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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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태사건에 대한 증언 (눅 1:26-31, 46-48)


처녀가 결혼하여 아기를 낳으면 모두가 기뻐한다. 결혼한 여자는 아기 낳기를 갈망한다. 아기를 임신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기를 낳는 사람, 아기를 임신하여 산부인과에 다니는 사람이 부럽다. 결혼한 여자들은 아기를 잘 낳는 것이 복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녀가 결혼도 하지 않아 아기를 낳으면 모두에게 슬픔이다. 처녀가 잉태하는 소식은 부모에게 걱정거리다. 동료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걱정거리다.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고 하면 모두 다 한마디씩 한다. 처녀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결혼을 위한 순결을 잘 지켜야 한다고 수근거린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마리아가 약혼한 처녀인데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라는 것이다. 이 처녀에게 주신 말씀은 이렇다. 

눅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결혼도 안한 처녀가 사내를 낳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까지 ‘예수라 하라’고 지령하여 준다. 그러니 이 메시지는 세장적인 눈으로 볼 때 마리아를 함정에 빠뜨리는 메시지일 뿐이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 잉태가 이루어진다면 마리아의 삶은 망가진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규범을 깨뜨린 이 일은 불행과 비극의 시작이다. 그런데 아기를 잉태한 처녀 마리아에 대한 증언은 무엇인가? 정죄하기 좋아하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우리의 수근거림과 조롱과는 정반대이다.

1. 천사의 증언 -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여자다. (눅1:28)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마리아에게 이르렀을 때 눅1:28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마리아를 향한 천사의 증언은 은혜를 받은 마리아라고 하였다. 은혜를 받았다는 말과 똑같은 표현이 눅1:30에 다시 한 번 나온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받았다는 말이 은혜를 입었다는 말로 표현만 바뀌었을 뿐 거절할 수 없는 은혜, 불가항력적 은혜, 일방적으로 쏟아 부으시는 은혜 아래 마리아가 서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천사다. 소식을 전해주는 사랑의 천사다. 그런데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게 되는 것이 순전한 은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처녀의 몸을 사용하셔서 예수를 잉태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란 이름은 구원자란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리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를 예수에게 주시고 야곱의 집을 세세 무궁토록 다스리게 할 것이다. 이 예수는 왕 중의 왕이다. 이런 분을 잉태하였기에 이 일은 은혜 받은 일이요 측량할 수 없는 큰 은혜다. 

그러고 보면 신앙의 세계는 거꾸로다.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 되는 것이고 흥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망하게 되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꼭 잘 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꼭 못 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꼭 못 되는 것이 아니고 정상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꼭 잘된 것이 아니다. 신앙의 세계는 거꾸로 못된 것이, 가난한 것이, 장애인으로 살게 된 것이 은혜 입은 일일 수 있다. 

계2:8~11에 나오는 서머나교회를 보라. 서머나교회는 유대인의 비방을 받고 있었다. 사탄의 무리가 교회를 어렵게 하고 있었다. 또 받을 고난이 예비되고 있었다.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될 형편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교회를 향해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그러므로 두려워말라, 충성하라고 권면하신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고통받는 교회다. 허나 그 고통이 문제가 아니다. 실상은 부요한 자다. 은혜 가운데 서 있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일어난 사건을 세상적 안목과 가치로만 판단하지 말자. 두려움과 놀림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잉태의 소식, 그 소식의 주인공이 된 마리아는 비참한 여인이 아니라 은혜 받은 주인공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에 쓰시는 것, 그것 자체가 은혜의 역사다.
  

2. 친족의 증언 - 마리아는 복을 받은 복덩어리 여자다. (눅1:42~45)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마리아는 아기 예수 잉태를 믿음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유대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사가랴의 집을 방문한다. 그때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보는 순간 아이가 복 중에서 뛰노는 것을 본다. 엘리사벳은 그 때 성령이 충만하여 눅1: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엘리사벳은 본래 남편이 늙어지도록 본인도 나이가 많아 잉태치 못한 체 자식 없는 삶을 산 부부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의 고지에 의하여 요한이라는 아들을 낳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자요 이미 뱃 속에 잉태된 세례 요한은 6달이나 되었다. 아기를 잉태할 때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임을 공감학고 있는 엘리사벳은 영안이 열렸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리아의 잉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보았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가리켜 “내 주의 어머니가 나아오신다.”라고 하였다. 구원의 주님을 모신 어머니! 그가 마리아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복이 있는 여자라고 한 것이다. 눅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외쳤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여자의 일생은 비극의 일생을 가야 할 운명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어디에 가서 환영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성령 충만함으로 볼 때 신령한 눈이 열린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여자 중에 복이 있는 복덩어리 여자로 보였다. 따라서 복 중에 기쁨으로 뛰노는 아이를 보는 엘리사벳의 입술은 신령한 입술이 되었다. 그 입술의 증언이 마리아를 “복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자. 예수님 때문에 겪는 모든 일들이 복으로 보이고 시험, 환난이 오는 것이다. 복 중의 복임을 간증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리아는 친족의 입술을 통해 감격의 소리를 들었다.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 내가 주님을 모시기 위해 믿음으로 걷는 일들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 있는 일로 보여지길 축원한다.
  

3. 본인의 증언 - 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돌봄을 받은 여자다. (눅1:48)

눅1:46~55은 마리아의 찬가다. 은혜 입은 여자라는 천사의 증언, 복이 있는 여자라는 친족의 증언 앞에 마리아의 반응은 무엇인가? 주를 찬양하였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했는데 그 입술에서 찬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마리아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쳐났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이 놀라운 사건이 본인에게 기쁨이 되었다. 이는 마리아의 진실한 믿음을 보여준다. 믿음으로 모든 사건을 제대로 받아들인 모습이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변한 것이다. 의혹과 당황스러움이 변한 것이다. 천사의 증언과 친족의 증언으로 인해 찬송과 기쁨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증언한다. 마리아의 찬가에 자신의 증언을 담는다. 

눅1: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돌봄을 받은 존재라고 증언한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아기를 잉태한 사건은 비천한 여종을 고난 속에 집어넣는 불행이 아니다. 사람이 뭐라고 할지는 몰라도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버림 받은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말세에 복이 있는 여자라고 일컬음을 받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돌보심이다. 그러니 목이 터지도록 찬양하고 즐거워 할 일이다. 

마리아는 자신있게 노래한다. 모든 사람이 오해하고 약혼자마저도 등을 돌릴지 모르는 사건이라도 본인에게 이 잉태 사건은 하나님의 돌보심일 뿐인데 어찌 노래하지 않겠는가? 신앙의 승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이야기 할지라도 내 안에 확신이 있으면 된다. 세상이 무엇이라 떠들어도 내가 가진 마음의 증언이 분명하면 된다. 환난과 핍박이 심해지더라도 나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사람이다. 머리털까지라도 상하지 않도록 돌보심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나님이 나를 안다. 나의 이름을 안다. 나를 배려한다. 나를 언제나 돌보신다.”고 증언만 할 수 있으면 만사를 이겨낼 수 있다. 이 증언만 하면 내 주 에수 모신 곳이 하늘 나라가 될 수 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고통스러운가? 경악스러운가? 실망스러운가? ‘왜’라는 의문이 일어나는가? 마리아처럼 천사의 음성을 듣고 신앙의 동지의 증언을 듣고 자신 스스로 확신의 소신을 가져라. 강림절 셋째 주간,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고백으로 성탄을 기다리며 찬양과 즐거움의 마음을 회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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